찰남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
'''察南自治政府'''

일본제국괴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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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1937년 ~ 1939년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구 일부, 허베이성 북부
수도
칼간(현 장자커우)
표어
'항시 백성을 살피고, 공산당을 멸하며,
민족협화를 이루고[2], 민생을 향상시킨다.'
정치체제
전체주의
국가원수
주석
언어
중국어,일본어
주요사건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중일전쟁 발발
1937년 9월 4일 찰남자치정부 수립
1938년 몽강공동위 가맹
1939년 몽강연합자치정부에 병합
성립 이전
중화민국
멸망 이후
몽강연합자치정부
1. 소개
2. 역사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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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내몽골자치구 지역, 허베이성 북부를 아울렀던 일본 제국괴뢰정부. 수도는 장자커우. 찰남의 뜻은 그 당시의 중화민국의 성이었던 차하르 성의 남부라는 의미가 있다.

2. 역사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이 화북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7월 11일,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29군 군장 쑹저위안은 <루거우차오 사변 현지교섭>을 체결하여 일본과 종전협정을 맺었지만 일본은 이 기회에 화북지방을 병탄해야 한다고 여기고 대규모 부대를 화북으로 급파, 7월 25일에 베이핑-톈진 전투에 돌입하여 7월 30일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35군 군장 겸 수원성 정부 주석 푸쭤이를 제7집단군 총사령관에, 13군 군장 탕언보를 7집단군 전적총지휘에 삼아 베이핑 탈환전에 돌입했으나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반격으로 8월 26일 퇴각길에 올랐다.
일본군은 탕언보를 격퇴한 여세를 몰아 차하얼성으로 진주하기 시작했고 8월 27일 차하얼성의 성도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그곳에 치안 유지 협의회를 설립하였다. 9월, 일본은 장자커우에서 이른바 몽골지역 평화 유지군 회의를 열어 찰남자치정부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그 지역의 친일인사였던 리우 칭을 주석에 앉혀 나름대로 정부의 구색을 갖추게 하였다. 그 이후 관동군의 권유로 1938년 진북자치정부, 몽골연합자치정부와 더불어 몽강공동위에 가맹하였고, 1939년 몽강공동위가 장자커우를 수도로 하고 데므치그돈로브를 수반으로 하여 몽강국을 구성함에 따라 기존 몽강공동위의 가맹정부였던 찰남자치정부는 소멸하게 되었다.

3. 기타


훗날 몽강국의 주력 사업이었던 '''아편''' 사업은 찰남자치정부 때 고노에 내각에서 흥아원을 설립하여 흥아원을 통해 중국내에 아편을 육성시키려는 방침을 세우고, 더해 일본군대가 아편사업을 통해 특산물이 없는 이 지역에서 내각의 아편육성방침을 통해 군 자금을 마련하고자 아편을 내각의 목표보다 더 대대적으로 육성시키며 몽강국의 주력사업이 될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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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찰남자치정부청사, 아래는 몽강공동위 건물[3]
찰남자치정부 성립축하행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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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첫구절 일본과 찰남은 하나다. 관련 포스터
두번째 구절 공산당을 박멸하자. 관련 포스터
세번째 구절 민족협화를 이루자.[5][6] 관련 포스터
마지막 구절 삶의 질을 높이자. 관련 포스터

[1]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는 깃발이 반대로 되어 있다[2] 만주국의 이념인 오족협화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협화회 참조[3] 두 건물 다 장자커우에 위치해 있었다.[4] 양쪽에 붙은 포스터에는 찰남 치안유지협의회라는 이름이 적혀있다.[5] 첫번째에 있는 여자애는 한복을 입고 있는걸 보아 조선인을 나타낸 듯하다.[6] 만주국의 포스터를 그대로 배낀듯한 모습이 여기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