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남자치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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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현 내몽골자치구 지역, 허베이성 북부를 아울렀던 일본 제국의 괴뢰정부. 수도는 장자커우. 찰남의 뜻은 그 당시의 중화민국의 성이었던 차하르 성의 남부라는 의미가 있다.
2. 역사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이 화북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7월 11일,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29군 군장 쑹저위안은 <루거우차오 사변 현지교섭>을 체결하여 일본과 종전협정을 맺었지만 일본은 이 기회에 화북지방을 병탄해야 한다고 여기고 대규모 부대를 화북으로 급파, 7월 25일에 베이핑-톈진 전투에 돌입하여 7월 30일 베이핑과 톈진을 점령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35군 군장 겸 수원성 정부 주석 푸쭤이를 제7집단군 총사령관에, 13군 군장 탕언보를 7집단군 전적총지휘에 삼아 베이핑 탈환전에 돌입했으나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반격으로 8월 26일 퇴각길에 올랐다.
일본군은 탕언보를 격퇴한 여세를 몰아 차하얼성으로 진주하기 시작했고 8월 27일 차하얼성의 성도 장자커우를 점령하고 그곳에 치안 유지 협의회를 설립하였다. 9월, 일본은 장자커우에서 이른바 몽골지역 평화 유지군 회의를 열어 찰남자치정부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그 지역의 친일인사였던 리우 칭을 주석에 앉혀 나름대로 정부의 구색을 갖추게 하였다. 그 이후 관동군의 권유로 1938년 진북자치정부, 몽골연합자치정부와 더불어 몽강공동위에 가맹하였고, 1939년 몽강공동위가 장자커우를 수도로 하고 데므치그돈로브를 수반으로 하여 몽강국을 구성함에 따라 기존 몽강공동위의 가맹정부였던 찰남자치정부는 소멸하게 되었다.
3. 기타
훗날 몽강국의 주력 사업이었던 '''아편''' 사업은 찰남자치정부 때 고노에 내각에서 흥아원을 설립하여 흥아원을 통해 중국내에 아편을 육성시키려는 방침을 세우고, 더해 일본군대가 아편사업을 통해 특산물이 없는 이 지역에서 내각의 아편육성방침을 통해 군 자금을 마련하고자 아편을 내각의 목표보다 더 대대적으로 육성시키며 몽강국의 주력사업이 될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