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돈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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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82호

'''383호'''

384호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image] '''대한민국 보물 제383호'''
'''창덕궁 돈화문'''
昌德宮 敦化門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412년 창건, 1608년 중건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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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昌德宮 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이다.

2. 이름


'돈화(敦化)' 뜻은 '(백성을) 도탑게(화목하게) 하고 교화시킨다'이다. 유교경전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萬物竝育而不相害

만물은 함께 커도 서로 해치지 않으며

道竝行而不相悖

도(道)는 함께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아서

小德川流 大德'''敦化'''

작은 덕은 시내처럼 흐르고 큰 덕은 두텁게 감화시키니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이것이야말로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

중용》 30장 中에서..


3. 역사


태종 때에 창덕궁의 내부 전각들을 다 지은 후에야 궁의 경계를 확정하여 1412년(태종 12년)에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창덕궁 전체가 불에 탔으나 궁의 외곽에 있는 돈화문이 탔는 지는 모른다.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저 때 화재를 입었다가 1608년(선조 41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다만, 1598년 5월 9일 자 《선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돈화문으로 멀쩡히 남았던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건물의 양식이 조선 전기와는 꽤 달라서 어느 쪽이 맞다고 확언하긴 힘들다.[1] 어쨌든 임란 이후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경복궁 광화문이 돌로 쌓은 성문 형식을 갖춘데 반해 돈화문은 나무로 만든 일반적인 한옥 대문 형식으로 만들어져 방어력이 광화문보다 훨씬 약하다.

  •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우진각이고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다포이다. 정면 5칸 중 양끝 두 칸이 막혀있는데, 이는 황제국의 문틀은 5개, 제후국의 문틀은 3개를 조성할 수 있는 규율을 이용한 것이다. 칸수는 황제국의 궁궐 문처럼 5칸이라도 실제 문으로 사용하는 칸은 3칸이라 재치있게 절충한 결과이다.
  • 원래는 장대석(長台石)의 기단과 층계가 있었다. 이는 19세기 초에 그린 《동궐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순종 즉위 후 차량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제가 도로 표면 높이에 맞춰 묻어버렸다. 이후 약 90년 동안 돈화문 바로 앞까지 도로였지만, 1990년대 중반 대대적인 창덕궁 복원사업에 맞춰 발굴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길이가 짧아 위엄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2020년에 걸친 율곡로의 높이를 돈화문 월대 높이로 낮추고 막힌 월대를 트는 공사를 계속 진행하여 2020. 12월 완성됐다. 월대가 탁 트일 때까지 약 1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 건축양식 자체는 예전 왕조의 건축 유물 및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유사한 양식이 보인다. 고려왕조의 본궐이 있던 만월대의 유적을 보면 궁성 정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문은 돈화문과 똑같이 천자국 제도인 5칸으로 세워졌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고려도경》에 따르면 저 네 대문이 모두 3문 형식이었다 하니 돈화문과 똑같이 5칸으로 세우되 3문만 이용한듯 하다. 즉 돈화문은 유서깊은 건축양식의 전형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5. 여담


  • 광해군 시기 인왕산 자락에 지었던 인경궁의 정문인 '명화문(明化門)'이 돈화문을 본따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경궁 자체가 공중분해되면서 현재엔 전하지 않는다.

[1] 저 실록에 나온 돈화문이 중층 정식 건물이 아닌, 임시로 세운 문을 일컬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