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이분지계
天下二分之計
천하를 북쪽의 조조군, 남쪽의 손권군으로 이등분하자는 계책. 손권군에서 감녕, 노숙, 주유를 거치며 구체화되었다.
〈감녕전〉에서 감녕이 손권에게 등용되고 나서 전략을 설파한다. 기회를 틈타 황조를 격파한 이후 파촉까지 진군해 조조에 대항하자는 내용이다.
〈노숙전〉에서 노숙이 손권에게 등용되면서 손권에게 형주 점령책을 진언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걸 천하삼분지계로 보고,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삼분지계를 논했다고 보기도 한다.[1]
손권이 노숙을 초빙하였을 때 진언한 계책과, 유표 사망 이후에 이를 구체화하여 설파한 계책이 있다. 노숙의 계책은 제3의 세력(초기에는 유표, 유표가 죽은 후에는 유비로 전환)을 변수에 넣고 서로 협력하면서 조조의 군세를 분산시켰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북방에 변란이 생길 경우 장강(양쯔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한 후에 중원을 도모한다는 계책이다. 다만 손권이 '''"형이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그런 장대한 계획을 실천할 만한 능력이 없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계점이 있었는데, 노숙의 두 번째 진언의 시점인 208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노숙의 안엔 형주 세력인 유종과 유비만이 있을 뿐이며 형주를 제외한 지역엔 별다른 고려가 없기 때문. 예를 들어, 제갈량의 계책엔 '유장을 잡고(익주 평정), 장로를 잡고(한중 평정), 서융을 위무해(마초, 한수 등 관서 군벌) 어찌어찌 한다'와 같은, 당대에 건재하던 군벌들에 대한 대책이 있는데, 노숙의 계책은 이런 부분이 없다. 노숙의 구도는 손권 vs. 조조뿐이다. 유비를 손권의 말로 형주에 박아둔다한들, 나머지 드넓은 익주와 한중, 서량주의 군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노숙이 진언한 계책은 당대에 존재하던 형주 군벌에 대한 전략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며[2] 실제로 계책 내부의 대상도 시간 흐름에 따라 유표→유종→유비로 바뀌고 있다.
주유와 노숙의 전략은 입장이 좀 달랐다. 주유가 좀 더 강경파, 노숙은 온건파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숙의 전략도 어디까지나 중요한 동맹 후보인 유비에 비해 손권의 세력이 우위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서 흡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세력 기반이 미약하던 유비에 비해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춘 손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입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천하이분지계는 주유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주유전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유도 형주를 점령해서 세력을 굳힌다는 이야기를 하며 주유는 잔챙이들 다 쓸어버리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하는 천하이분지계에 가장 가까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유와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서천을 점령한 후 한중의 장로를 병합한다. 한중에는 손유가 머물며 마초와 동맹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촉에서 돌아온 주유가 손권과 북상하여 양양을 친다. 그러나 이 전략 자체가 군사적인 공략을 말하고 있을 뿐 서촉을 점령한 후 행정적인 배려와 내정을 다진다는 구체적인 사항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를 말할 당시엔 유감스럽게도 주유는 남군공방전에 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미 깊은 병에 걸려 있었고 얼마 안 가 주유의 요절로 실행되지 못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주유가 요절하고 그 후임으로 노숙이 임명되자 노숙은 자신의 계책을 설파하고 형주를 유비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조조와 손권 세력권 사이에 완충 지대로 두었다. 우선 당시 유비와 동맹을 해서 강릉 일대를 손에 넣긴 했지만, 형주지방 관민들은 손권을 따르지 않았다고 노숙이 지적하고 따라서 그걸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편 이 사이 유비는 유기를 형주목으로 지목하고 사실상 형주의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숙은 유비를 방패로 활용하여 이 지역을 수비케하여 조조에게 맞서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당시 유비는 강하와 형남 4군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세력권이 없었고 남군공방전 직후 주유가 남군 일대 일부를 분할하여 유비에게 나누어준 정도였는데, 이 덕분에 유비는 강릉을 비롯한 다른 남군의 주요 지대에 대한 권리까지 양보받을 수 있었다. 이 권리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언제까지 이 권리가 유효한지 명시하지 않아 후일 분란의 씨앗이 된다.
노숙의 계책은 어디까지나 유비가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지만,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고 한중에서 조조와 현피를 뜨면서 사실상 오의 통제력을 벗어나 버렸기에 주유가 기획하고 노숙이 보완한 이 계획은 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익양대치 수준에서 형주를 분할하여 양측의 갈등은 잠시 봉합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던 친 유비 성향이던 노숙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노숙의 전략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차후 남북조 시대에 숱하게 전개된 분열 양태는 주로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비슷했다. 관중/하북/강남 구도가 괴철의 천하삼분지계인데, 실제로 삼국지 이후 전진-전연-동진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주유 안이라 볼 수 있는 북위- 남조 왕조들 이었다가 다시 서위(북주) - 동위(북제) - 양 구도가 되었다. 수나라의 통합 이후에 이런 공식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게 되지만, 금나라의 융성으로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자 오랜만에 다시 남북 대결 구도가 나타나다가 이후 원나라 시대 이후 장강 남쪽에서 일어난 명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론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주유의 구도대로 된 남북조 분열 구도의 경우, 남방 국가가 주유의 구상보다는 훨씬 유리했는데도[3]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북조에게 흡수되는 결말을 맞았다.[4]
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역사체계는 군사병종과 역사를 연결하는 연구체계가 사실상 없거나 약했기 때문에 알수가 없었지만 20세기 미국, 유럽의 중국사 연구는 북방은 유목민들이 대규모 기병을 육성하기 좋은 기후였기 때문에 남조계열 국가들보다 훨씬 많고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을 양성하거나 그렇게 양성된 기병을 용병으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기병병종의 압도적인 우위가 대다수 남조계열 국가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대부분 북조계열 국가가 더 우세한 기병전력을 통해서 중국을 통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몽골제국이 송나라를 이긴 것, 남쪽에서 예외적으로 발흥한 명나라에서도 결국 북방에 기반을 잡은 영락제가 황위쟁탈전에 승리한 것도 기병 우위를 기반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몽골제국의 송나라 정복으로 40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남송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무려 160만 명인 데 반해서, 몽골제국이 동원한 총병력은 고작 35만 명이다. 이는 중국위키피디아와 일본위키피디아 모두 동일하게 표기되는 전력으로 실질적으로 몽골제국 35만 군대가 남송군 160만을 40년에 걸쳐서 붕괴시킨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병전력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기병과 보병의 전력비는 최소 1:3으로 기병 1명이 보병 3명에 맞먹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며 그게 유목민 기병이라면 더욱 차이가 벌어진다고 봐야하겠고. 이러한 기병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몽골제국은 고작 35만 명으로 160만 명이 동원된 남송을 상대로 대부분 전쟁에 우위를 가지고 싸워 정복한 것이고 이러한 기병전력의 차이로 인한 북방에 의한 일방적인 남방정복 혹은 우위의 형태가 청나라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기병체계의 문제만으로 남조의 패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남북조 시기의 북벌로 남조가 상당부분 중원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던 전적이 있고 후일 결국 몽골이 송을 굴복시켰다고는 하나 그건 몽골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려 40여 년을 송을 공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나마도 원나라는 남방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명나라의 발흥을 불러 북쪽으로 쫒겨났다. 그리고 실제 영락제는 건문제의 우유부단 함으로 인해 정난의 변을 성공시킬수 있었지 전체적인 전력면에선 압도적인 열세였다. 이런 점을 그저 무시하곤 기병의 우위로 인해 승리할 수 있었다 운운은 결국 그 시대를 군사적인 요인으로밖에 보지 않는 단편적인 시각인 것이다. 결국 남조의 패망은 남방 국가의 한계란 점보다는 제도적인 혁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게 더 원인이 크지만, 여하튼 흥미진진하게 생각해볼 수는 있는 사실이다.
1. 개요
천하를 북쪽의 조조군, 남쪽의 손권군으로 이등분하자는 계책. 손권군에서 감녕, 노숙, 주유를 거치며 구체화되었다.
2. 삼국시대 주유의 천하이분지계
〈감녕전〉에서 감녕이 손권에게 등용되고 나서 전략을 설파한다. 기회를 틈타 황조를 격파한 이후 파촉까지 진군해 조조에 대항하자는 내용이다.
〈노숙전〉에서 노숙이 손권에게 등용되면서 손권에게 형주 점령책을 진언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걸 천하삼분지계로 보고,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삼분지계를 논했다고 보기도 한다.[1]
손권이 노숙을 초빙하였을 때 진언한 계책과, 유표 사망 이후에 이를 구체화하여 설파한 계책이 있다. 노숙의 계책은 제3의 세력(초기에는 유표, 유표가 죽은 후에는 유비로 전환)을 변수에 넣고 서로 협력하면서 조조의 군세를 분산시켰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북방에 변란이 생길 경우 장강(양쯔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한 후에 중원을 도모한다는 계책이다. 다만 손권이 '''"형이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그런 장대한 계획을 실천할 만한 능력이 없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계점이 있었는데, 노숙의 두 번째 진언의 시점인 208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노숙의 안엔 형주 세력인 유종과 유비만이 있을 뿐이며 형주를 제외한 지역엔 별다른 고려가 없기 때문. 예를 들어, 제갈량의 계책엔 '유장을 잡고(익주 평정), 장로를 잡고(한중 평정), 서융을 위무해(마초, 한수 등 관서 군벌) 어찌어찌 한다'와 같은, 당대에 건재하던 군벌들에 대한 대책이 있는데, 노숙의 계책은 이런 부분이 없다. 노숙의 구도는 손권 vs. 조조뿐이다. 유비를 손권의 말로 형주에 박아둔다한들, 나머지 드넓은 익주와 한중, 서량주의 군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노숙이 진언한 계책은 당대에 존재하던 형주 군벌에 대한 전략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며[2] 실제로 계책 내부의 대상도 시간 흐름에 따라 유표→유종→유비로 바뀌고 있다.
주유와 노숙의 전략은 입장이 좀 달랐다. 주유가 좀 더 강경파, 노숙은 온건파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숙의 전략도 어디까지나 중요한 동맹 후보인 유비에 비해 손권의 세력이 우위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서 흡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세력 기반이 미약하던 유비에 비해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춘 손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입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천하이분지계는 주유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주유전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유도 형주를 점령해서 세력을 굳힌다는 이야기를 하며 주유는 잔챙이들 다 쓸어버리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하는 천하이분지계에 가장 가까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유와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서천을 점령한 후 한중의 장로를 병합한다. 한중에는 손유가 머물며 마초와 동맹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촉에서 돌아온 주유가 손권과 북상하여 양양을 친다. 그러나 이 전략 자체가 군사적인 공략을 말하고 있을 뿐 서촉을 점령한 후 행정적인 배려와 내정을 다진다는 구체적인 사항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를 말할 당시엔 유감스럽게도 주유는 남군공방전에 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미 깊은 병에 걸려 있었고 얼마 안 가 주유의 요절로 실행되지 못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주유가 요절하고 그 후임으로 노숙이 임명되자 노숙은 자신의 계책을 설파하고 형주를 유비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조조와 손권 세력권 사이에 완충 지대로 두었다. 우선 당시 유비와 동맹을 해서 강릉 일대를 손에 넣긴 했지만, 형주지방 관민들은 손권을 따르지 않았다고 노숙이 지적하고 따라서 그걸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편 이 사이 유비는 유기를 형주목으로 지목하고 사실상 형주의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숙은 유비를 방패로 활용하여 이 지역을 수비케하여 조조에게 맞서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당시 유비는 강하와 형남 4군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세력권이 없었고 남군공방전 직후 주유가 남군 일대 일부를 분할하여 유비에게 나누어준 정도였는데, 이 덕분에 유비는 강릉을 비롯한 다른 남군의 주요 지대에 대한 권리까지 양보받을 수 있었다. 이 권리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언제까지 이 권리가 유효한지 명시하지 않아 후일 분란의 씨앗이 된다.
노숙의 계책은 어디까지나 유비가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지만,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고 한중에서 조조와 현피를 뜨면서 사실상 오의 통제력을 벗어나 버렸기에 주유가 기획하고 노숙이 보완한 이 계획은 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익양대치 수준에서 형주를 분할하여 양측의 갈등은 잠시 봉합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던 친 유비 성향이던 노숙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노숙의 전략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3. 유사 사례
차후 남북조 시대에 숱하게 전개된 분열 양태는 주로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와 비슷했다. 관중/하북/강남 구도가 괴철의 천하삼분지계인데, 실제로 삼국지 이후 전진-전연-동진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주유 안이라 볼 수 있는 북위- 남조 왕조들 이었다가 다시 서위(북주) - 동위(북제) - 양 구도가 되었다. 수나라의 통합 이후에 이런 공식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게 되지만, 금나라의 융성으로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자 오랜만에 다시 남북 대결 구도가 나타나다가 이후 원나라 시대 이후 장강 남쪽에서 일어난 명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론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주유의 구도대로 된 남북조 분열 구도의 경우, 남방 국가가 주유의 구상보다는 훨씬 유리했는데도[3]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북조에게 흡수되는 결말을 맞았다.[4]
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역사체계는 군사병종과 역사를 연결하는 연구체계가 사실상 없거나 약했기 때문에 알수가 없었지만 20세기 미국, 유럽의 중국사 연구는 북방은 유목민들이 대규모 기병을 육성하기 좋은 기후였기 때문에 남조계열 국가들보다 훨씬 많고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을 양성하거나 그렇게 양성된 기병을 용병으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기병병종의 압도적인 우위가 대다수 남조계열 국가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대부분 북조계열 국가가 더 우세한 기병전력을 통해서 중국을 통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몽골제국이 송나라를 이긴 것, 남쪽에서 예외적으로 발흥한 명나라에서도 결국 북방에 기반을 잡은 영락제가 황위쟁탈전에 승리한 것도 기병 우위를 기반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몽골제국의 송나라 정복으로 40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남송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무려 160만 명인 데 반해서, 몽골제국이 동원한 총병력은 고작 35만 명이다. 이는 중국위키피디아와 일본위키피디아 모두 동일하게 표기되는 전력으로 실질적으로 몽골제국 35만 군대가 남송군 160만을 40년에 걸쳐서 붕괴시킨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병전력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기병과 보병의 전력비는 최소 1:3으로 기병 1명이 보병 3명에 맞먹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며 그게 유목민 기병이라면 더욱 차이가 벌어진다고 봐야하겠고. 이러한 기병에서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몽골제국은 고작 35만 명으로 160만 명이 동원된 남송을 상대로 대부분 전쟁에 우위를 가지고 싸워 정복한 것이고 이러한 기병전력의 차이로 인한 북방에 의한 일방적인 남방정복 혹은 우위의 형태가 청나라 때까지 계속 반복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기병체계의 문제만으로 남조의 패망을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남북조 시기의 북벌로 남조가 상당부분 중원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던 전적이 있고 후일 결국 몽골이 송을 굴복시켰다고는 하나 그건 몽골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려 40여 년을 송을 공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나마도 원나라는 남방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명나라의 발흥을 불러 북쪽으로 쫒겨났다. 그리고 실제 영락제는 건문제의 우유부단 함으로 인해 정난의 변을 성공시킬수 있었지 전체적인 전력면에선 압도적인 열세였다. 이런 점을 그저 무시하곤 기병의 우위로 인해 승리할 수 있었다 운운은 결국 그 시대를 군사적인 요인으로밖에 보지 않는 단편적인 시각인 것이다. 결국 남조의 패망은 남방 국가의 한계란 점보다는 제도적인 혁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게 더 원인이 크지만, 여하튼 흥미진진하게 생각해볼 수는 있는 사실이다.
4. 관련 문서
[1] 단 노숙이 주인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일 뿐, 계책으로 보긴 조금 무리다. 구체적인 방안은 물론이거니와, 삼분의 주체도 없는 막연한 비전 제시였다.[2] 물론 그 전략의 궁극적인 목표는 손권의 천하통일이다. 형주 대책은 그 목표의 제1보.[3] 익주 일대는 물론 수중에 있었고, 오가 그토록 애썼는데도 얻지 못했던 합비 일대는 디폴트로 깔아두고 있었으며, 그렇게 오나라가 얻고자 하고 때로는 신포도 취급까지 했던 회수 이남은 다 평정한 상태에서 가끔 그 이북으로도 찔러보는, 삼국지 시대의 오나라는 상상도 못했던 형태였다. 유유의 시대에는 서주와 청주, 예주, 연주를 비롯해 장안과 낙양까지 판도에 넣을 수 있었다.[4] 단, 주유의 구상보다 상위호환으로 점령한 시기는 동진과 유송 대에 한정할 수 있을 듯 하다. 적어도 유송-소제 교체기 즈음에는 익주가 점령당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