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
말 그대로 셋이서 솥발과도 같이 천하를 삼등분하는 계책.
1. 초한쟁패기 괴철의 천하삼분지계
초한지의 배경이 되는 초한쟁패기 때 한신의 모사 괴철이 한신에게 훗날의 천하삼분과 비슷한 계책을 제시했으나, 이는 한신의 거절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유방의 한, 항우의 초가 대결하는 가운데, 본래 유방 휘하에서 출발한 한신은 '''유방의 휘하이면서도''' 한신은 위(魏), 대(代), 조(趙), 등 옛 삼진(三晉) 지역을 평정하고 제나라, 연나라 등도 평정하여 당대의 하북지방을 거의 점령해 이미 유방/항우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장, 항우가 파견한 용저의 20만 대군을 전투 한 번에 붕괴시켜버렸을 정도이니.
여기에서 한신이 유방의 휘하를 떠나 독립을 선언하고, 한초의 대결에서는 중립을 선언하면 중원은 거의 대등한 세력을 가진 3국으로 갈려 균형이 유지된다는 전략안이다. 이것이 성사되면 대략적으로 한신의 국가가 훗날의 조위, 유방의 한나라는 훗날의 촉한, 항우의 초나라가 훗날의 동오 위치를 점하게 되고 전력적으로는 초나라에게 밀려도 위치적으로는 하북 쪽이 유리한 데다가 이미 한과 초는 전력을 다해서 서로를 공격하느라고 한신을 제압할 역량이 되지 못했으므로 한신이 중립으로서 양측의 균형을 조율하려 한다면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루어 안정적인 삼국의 형세가 유지 될 수 있었다. 만약 이랬다면 이후 중국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통일 중화제국으로서의 중국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한 한신은 역이기가 유방의 명을 훌륭히 수행해 제나라를 복속시키자, 괴철의 설득에 넘어가 공격을 감행하여 죽게 만들거나, 또 얼마 후 한창 항우한테 두드려 맞던 유방이 원군을 요청하자 뜬끔없이 왕을 시켜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유방을 상당히 자극했음에도 불구,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등용해준 유방을 배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괴철의 제안을 물리친다.[1] 그리고 이때 괴철의 말을 안 들은 한신은 훗날 숙청 당하게 된다. 다만, 이는 단지 한신이 정치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신이 따로 군사를 이끌어 위, 조, 제나라를 격파하고 항우를 사방에서 포위하는 대전략을 유방에게 건의했을 때, 유방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군사를 내주며 한신의 밑에 후에 상국의 자리에 오르고 공신 2위에 오를 만큼 충성심을 인정받은 조참을 비롯 유방의 충신들을 대거 동행시켜 한신을 견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역이기를 죽이면서 한신이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는 숙청당하는 과정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조참이나 장이가 한신이 독립한들 따랐을 가능성은 적다. 한신은 잡음 없이 독립할 만큼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고, 유방은 한신 때문에 기회를 놓치게 되니 이렇게 될 경우 온전히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한신보다는 항우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천하삼분을 먼저 제시한 건 괴철이 아니라 항우 측의 사자인 무섭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삼분지계는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 당장 한신은 정치적 능력은 떨어질 지라도 군사적 능력은 항우를 제외하면 당대에 적수가 없던 수준이었고, 그가 차지한 제나라 땅과 하북 지역은 대기근이 든 유방의 관중 지역이나 팽월에 의해 초토화 된 항우의 초나라 지역보다야 훨씬 사정이 좋았다. 유방의 인심 장악 능력이 뛰어나긴 했어도, 이좌거와의 문답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퍼져간 한신의 명성과 인망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당장, 항우가 겁을 먹고 회유를 시도했을 정도이니. 물론, 유방은 소하, 장량, 진평을 포함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던 반면에 한신은 주위에 인재가 거의 없었고, 유방이 보낸 관영, 조참, 주발 등의 장수들도 한신의 주변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이었기에[2] 한신이 잡음 없이 반란을 꾀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반란에 성공하기만 하면, 유방과 항우와 동일한 세력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괴철의 언급대로 중국 전역을 개박살내며 싸우고 있던 유방과 항우를 중재하는 역할로서 모든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유방과 항우를 중재한다는 것도 당시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명분이었고.
한신이 죽기전 남긴 말에 따르면 괴철의 말을 따라 삼분지계를 하지 못해서 이리 죽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하며, 아이러니하게도 한신은 죽었어도 계책을 낸 당사자 괴철은 살았는데, 괴철이 잡히고도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본 유방은 괴철의 태도가 진정한 한신의 충신답다고 생각하고 괴철을 칭찬하면서 그를 살려 줬다고 한다. 어차피 더 이상 괴철의 천하삼분지계를 들어주고 그를 실행할 역량이 되는 제후들이 없기 때문에 풀어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고조의 도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 삼국시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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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으로나마 구현되어 완성된 219년, 제갈량의 융중대(천하삼분지계)를 보여주는 그림.
형주와 익주를 온전히 아우른다는 시도는 적벽대전, 익양대치 등으로 실패했지만 전성기 형주의 1/3과 익주를 아우른것만으로도 유비 세력은 형주와 익주, 한중에 이르는 조조, 손권과 버금가는 광대한 세력을 갖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유비세력의 파상공세는 조조의 말년을 그야말로 지옥으로 만들었고[4] 주요 도읍지인 장안, 낙양, 허도를 노리는 유비의 날카로운 공격은 그동안의 판도 자체를 뒤흔든 무시무시한 기세이었기에, 천하의 세력구도는 다시금 뒤바뀔 뻔했으나 여기에 이르러 형주의 상실과 뒤를 이은 이릉대전으로 제갈량의 원대한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관련글"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험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화목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3]
으로 출병하신다면, 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 中 융중대(隆中對), 초려대(草廬對)
삼국지, 삼국지연의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유명하며, 실제로 당대의 천하를 조조-손권-유비의 축으로 '삼분(三分)'하겠다는 구상은 그에게서 나온 게 맞다.
당시 식자들 사이에 형주를 중심으로 엇비슷한 계책들이 구상된 바는 있으나, '''1)삼분의 주체를 설정하고, 2)구체적인 방안 제시를 통해 주인을 한 축으로 만든 뒤, 3)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구상은, 사료에 기록된 대로라면 제갈량이 가장 먼저 했고, 당대의 현실에 구체화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갔던 것 또한 제갈량의 안이었다. 결국 유비는 제갈량의 진언대로 형주, 익주, 한중을 모두 제패했고, 이로써 삼국의 초기 형세가 성립되었다. '천하삼분지계=제갈량의 전략'으로 인식된 것은 그 때문이며, 이는 연의의 유명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중원을 장악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야 된다는 점, 천하가 삼분된 이후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조건으로 반드시 북방에서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라 삼은 점, 북방이 안정될 경우에는 자기 세력을 키우고 지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처럼 당대에 천하 삼분지계를 이야기 한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왜 굳이 '삼분' 지계인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흔히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캐삭빵 떠서 센 쪽이 이기는 것으로 끝나기 쉬운 1:1 구도에 비해, 1:1:1 구도는 협력과 견제를 통한 균형 유지가 가능하다. 하나가 유독 강해지면 둘이 손을 잡고 맞서면 된다.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 할 때 흔히 '''솥발'''에 비유하여 발이 두 개인 솥은 세울 수 없지만 세 개면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5] .
또한, 이 문서의 배경인 삼국시대의 상황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당대의 최강자는 황제를 옹립하고 중원과 하북을 장악한 조조였고, 조조 이외의 세력들에게는 '어떻게 조조를 막을 것인가' 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조조에 맞서던 대표적인 세력은 유표(형주), 유장(익주), 손권(양주)의 세력으로, 조조의 영토 남쪽에 포진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6]
이 경우, 가장 조조에게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익주(촉), 형주, 양주(오니까… 교주는 덤.) 전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묶는 것이다. 일단 상식적으로 작은 세력 여럿보다는 큰 세력 하나가 더 효율적이고, 따라서 조조가 장악하지 못한 중국 남부 전체를 하나의 세력으로 묶어서 조조에게 맞서는 것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이 경우, 당대 중국 사회,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중원을 장악한 조조보다 세력이 크다고 하기는 힘들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되어 패권을 다툴 수 있을 것이다. 후방이 비교적 안전한 남중국에 비해 북쪽에는 흉노족, 선비족 등 강대한 북방민족들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일대일로는 좀 부족하더라도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중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 자체가 3개의 중심지[7] 에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누가 조조에게 맞서기 위해서라고 자기 세력을 남에게 통째로 넘겨주겠는가? 그렇다면 무력으로 다른 세력을 합병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서로 간에 큰 세력 차이가 나지 않는 동등한 세력들 사이에서 무력 합병이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고, 조조도 바보가 아닌데 이 세 세력이 통합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서로 싸우다가 세력 통합은 못하고 지치기만 한 틈에 이를 노린 조조에게 잡아먹힌다거나, 다른 세력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세력이 오히려 조조에게 붙는다거나, 세 세력 중 두 세력이 싸우는 틈에 조조가 나머지 한 세력을 먹어버릴 수도 있는 것. 말하자면, 조조라는 강적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반 조조세력간의 분쟁에 힘을 소모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 게다가, 문화-경제-정치의 중심지이던 중원을 장악하고 황제까지 옹립했다는 권위를 얻은 조조와는 달리, 중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들은 서로 동등한 세 중심지로 나뉜 상태였다. 설령 무력으로 다른 세력을 장악해도 한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까지 통제하기는 어렵고, 이는 잘해봐야 본래 중심지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반 독립적 세력 정도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반 조조세력의 전략적 구상은 중국 남부의 반 조조세력 전체를 통합하기는 어렵고, 각 세력 단독으로 조조를 막기도 어려우므로 반 조조세력의 협력을 통하여 조조를 막아내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를 생각하면 천하사분지계... 같은 것도 가능하겠으나, 삼자 동맹은 아무래도 양자 동맹에 비해 유지가 까다로울 가능성이 높고, 제한된 남부의 세력 기반이 셋으로 나뉜 것보다는 둘로만 나뉜 것이 역시 효율적이다.[8][9] 게다가, 천하삼분지계가 본격적으로 구상되고 실현되던 시기는 유표의 죽음으로 형주가 혼란에 빠진 시기였으니, 이를 흡수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상황이었던 점도 있다. 말하자면, 노숙의 것이든 제갈량의 것이든 천하삼분지계란 결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을 효율적으로 재편성하고, 손을 잡아 조조에 맞선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는 것. 다만, 노숙은 손권이 우위에서 유비를 통제하는 것을 지향한데 비해, 제갈량은 유비가 손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이 되는 것을 지향했다는 점이 다르다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삼국시대의 천하삼분에서는 "하나가 유독 강해지면 둘이 손을 잡고 맞선다"는 원리에서 어긋나게 된다. 특히 천하를 삼분해서 남쪽 세력 둘이 힘을 합쳐도 중원과 하북을 장악한 위나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열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천하삼분지계에서 통일의 조건으로 '''북방의 변란'''을 꼽은 것 역시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조조의 경우 북방의 유목민 및 그 유목민에 맞서기 위한 변방의 군벌세력과 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방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반면 남방은 바다로 막혀있거나, 적어도 유목민족만큼 강하고 위협적인 이민족은 없으므로 좀 더 위나라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다소 열세인 남부의 세력이 조조를 제압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또 아직 한실에 기대고 위에 반발하는 인사들도 있을수 있으므로 이들 역시 북방의 변란의 한 축이 될 수도 있었다. 즉, 위에서 후술하겠다고 미뤄둔 동북의 공손강이나 서북의 마등 세력이 이 지점에서 중요해진다. 둘 다 독자적으로 천하를 노리기에는 세력이 작지만 조조의 본거지인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북방 유목민과 상시 대치하던 입장상 강병을 거느리고 있으며 특히 양질의 군마를 구하기 쉬워 강력한 기병전력을 갖추고 있던 이들은 조조의 입장에서도 쉽게 제압하거나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북방의 군벌이 조조의 후방을 위협하면서(북방 유목민 세력을 끌어들이면 나름의 위험요소가 더 생기긴 하지만 그 효과는 더욱 배가될 것이다) 남쪽의 주 전선에서 손권과 유비가 동시에 조조를 공격할 경우 조조로써는 아주 고통스러운 다면전쟁을 강요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위험상황 때문에 조조의 정국장악력이 떨어질 경우 조조의 세력권 내에서 한나라 충성파 세력이 활동할 여지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제갈량이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진언한 계책으로서, 괴철 이래 '삼분천하(三分天下)'를 노린 전략들 중, 실제로 중국을 세 구역으로 분할하는데 성공했던 최초의 사례다. 물론 이는 제갈량의 원맨쇼가 아니라, 그가 제시한 구상을 바탕으로 유비 이하 참모진 모두가 진력한 결과였다. 사족을 달자면, 제갈량의 천하삼분은 천하통일을 위한 1차 목표였을 뿐, 삼분 그 자체를 최종 목표로 둔 전략은 아니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1단계로 북방의 조조는 강하고, 동쪽의 손권도 기반이 잡혀있으므로, 쇠락한 유표를 대신해 형주를 접수하여 기반으로 삼고, 손권과 동맹을 맺으며 유장의 익주, 장로의 한중을 타 넘어 제패하면서 그 지세의 험함에 기대어 (조조를 막고) 유비의 세력권을 완성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눈다.[10] 제2단계로 서쪽으론 융족들과 화친하고[11] , 남쪽으론 이족들을 위무하고, 동쪽으론 손권과 화친을 강화해 변경을 안정시키면서 내정을 충실히 키우다가, 제3단계로 북방에 중대한 정세 변화가 발생하면 유비가 익주에서 장안으로, 다른 장수(역사적으로 보면 관우)가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양한의 수도를 동시에 석권하고 조조를 격멸한다. - 여기까지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통칭 '''융중대'''의 골자다.[12]
사실 익주를 중심으로 관중으로 치고나가 천하를 차지한다는 계획의 골자는 한고조가 실행한 것이고 형주(남양)을 기반으로 치고나가 천하를 차지하는 계획의 골자는 광무제가 실현한 것이다. 제갈량이 왜 유비에게 형익을 동시에 석권하라 권했느냐면 한고조, 광무제와는 당대의 상황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고조 때는 천하가 합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뉘었고 각지의 제후들은 제후 분봉에 불만을 품었고 고조를 감시할 삼진의 제후들은 인심을 잃어 한고조가 쉽게 익주에서 진출이 가능했다, 광무제 때는 신나라가 인심을 잃어 천하에 대란이 일었고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기에 광무제가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미 조조가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하나로 만들었기에 한고조와 광무제의 방식에서 변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느 한 방향으로 단독으로 치고 나가면 그 방면에서 집중된 역량으로 공세를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형주는 교통의 요지라 역공도 가능하다. 예컨데 형주방면에서만 낙양, 장안을 치면 그 방면으로 방어가 들어올 뿐더러 다른 방면으로 조조군이 치고 들어올 수 있다. 익주지역은 든든한 후방기지로 놔두고 이쪽에서 진천으로 진출하는 이유가 이것. 또한 형주 없이 익주에서 관중으로 나아가는 것은 익주와 관중사이 진령산맥의 함악한 길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걸림돌이 되기 쉽다. 한마디로 형-익 양쪽을 석권하고 익주에선 유비가, 형주에선 믿을 만한 상장이 동시 진출하여 시선을 분산시키는게 최선의 전략이었다.[13] 즉, 융중대는 양한의 선조들의 방식을 한실부흥의 대의를 내세운 유비에 맞게 변환한 대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갈량의 소위 융중대 전략은 유비가 직접 익주에서 출병해서 공격하고, 동시에 상장 한 명(아마도 관우)이 형주에서 북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관중으로의 진출이 오히려 주공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제갈량의 일차 목표는 처음부터 관중의 장악에 있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의 유비가 처음부터 익주 대신 한중으로 진공해서 한중을 차지했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14] 그러나 만약 당초 계획대로 북형주가 있었다면 북형주에서 조조를 막으면서 한중으로 진공이 가능했을 것이나(실제로 융중대를 처음 제시할때 제갈량은 북쪽 한중의 장로와 남쪽 유장의 익주를 통틀어 익주라고 표현하며 같이 차지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후일 조조에게 북형주를 빼앗기면서 번성-양양의 물적, 인적자원, 교통로를 모두 장악당해 빼앗기고 남형주를 기반으로 했어야 했던 것이 유비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될 경우 천혜의 요새인 상용과 한중의 험지를 익주라는 풍요롭고 병력이 충분한 배후지 없이 아직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남형주 가지고만 돌파해야 한다는 난점이 생긴다.
거기다가 만에 하나 차지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익주가 없으므로 서쪽의 한중부터 남쪽의 남형주까지 영토가 길고 좁게 형성되고, 그곳 중 어느 한 곳이 끊겨버리면(예를 들어 중간의 상용이라던가) 관중이나 익주 등 어디 외부로 진출하기도 전에 각 지방에 주둔한 군세가 고립되어 외각에서부터 먼저 각개격파 될 수도 있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원 역사에서도 유비가 익주로 자리를 비운사이 남형주에서 조조군과의 청니대치가 발생했는데, 만약 영토가 이렇게 될 경우 위험성은 더더욱 증가한다. 아니 애초에 북형주를 빼앗겨 상용-한중의 동쪽 측면이 노출된 것도 문제로, 만일 상용, 혹은 한중을 치고 있을때 조조군이 옆구리를 공격하여 유비의 군세 뒤를 끊거나, 고립시켜 버리거나 협공을 가하면 정말 답이 없어진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15] 거기다가 한고조도 한중을 차지했을 뿐만이 아니라 파촉을 배후지로 두고 관중을 먹여 살리고 형양 · 성고 전역을 치루었기에 결국 익주를 먹었어야 한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남군을 비롯한 남형주만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유비세력이 한중을 우선해 먹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당시 세력구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16][17]
결국 배후지인 익주를 완전히 유비가 차지하지 않는 이상 한중만 먹는다고 조조까지 칠 수 있다고 보는건 여러가지로 무리수에 뒷통수가 간질간질한 일이었던 것이고 유비가 먼저 익주를 온전히 석권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혹자는 그냥 형주를 접수하고 바로 낙양[18] 과 허창으로 돌진하면 안 되느냐, 굳이 익주까지 석권할 이유가 있느냐 하지만 이미 형주에 근거를 두고 허도를 노리는 전략은 신야시절 유비가 불완전하게나마 시도해 본 전략이다. 거기에 이미 옛 광무제가 일어선 형주 완땅은 조조에게 장수의 항복으로 넘어간 상태였고 강하에선 손권의 파상 공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형주는 사통팔달의 지세라 이처럼 사방에서 공격받기 쉽고 당시 형주 그 자체의 역량만으로는 하북 4주를 손에 넣고 천하의 2/3를 손에 넣은 조조를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이미 천부지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전한시기부터 관중의 배후지로서 경사를 부양한 부유한 익주지역을 손에 넣어 역량을 증진시키고 양주의 이민족들과 군벌과 손을 잡아 형주, 익주의 양쪽 군대를 합쳐 2배 이상으로 불려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었다. 즉, 세력을 키워야 그나마 조조에게 상대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하삼분지계가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실현되어 촉한이 세워진 뒤, 제갈량이 한중의 방어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해보자. 물론 북벌 한방에 조조를 무너트릴수 있다면야 그보다 더 좋을 게 없지만 세상일이 유비와 제갈량 좋을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북벌이 실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만약 형주 접수 이후 바로 세력을 총동원하여 허창과 낙양을 공격하는 날빌을 사용할 경우 한방러쉬가 실패하면 바로 사통팔달의 요지인 형주로 조조의 역러쉬가 시작될 것이고, 인구수에서부터 열세인 유비군으로써는 조조의 역습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한번 실패하면 뒤가 전혀 없는 도박성 빌드라는 것. 애초에 자신보다 더 전력이 강한 적을 한방에 거꾸러트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그 한방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것은 삼류 도박중독자의 사고방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19] 북벌의 핵심이었던 제갈량이나 강유 역시 북벌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았기에 한번의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중 방어선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인데... 익주 겸병 없이 형주만으로는 만약의 경우 후일을 도모할 여지가 거의 없었던 것.
설령 형주가 후일 손권의 뒷치기로 넘어 가듯이 형주를 북벌 중에 잃는 불상사가 발생해도 익주의 지세는 험난하고 이를 기반으로 뒷날을 대비할 수 있는 보험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 만약에 그나마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허도를 얻고 황제를 끼고 있고 민심의 지지를 얻은 유비가 되었다고 한다면 조조 입장에선 그냥 강동을 쳐서 손권을 잡고 유비의 허리를 분쇄해야 그나마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조조는 형주를 노리고 있는 손권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고[20] 본거지를 잃은 유비는 지원을 받지 못한 관우가 그랬던 것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형주가 어떠한 일로 잡혀 버리면, 가장 방어가 용이하고, 고립된 시간을 이용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회복을 도모할수 있는 땅이 필요하며 그 보험용이 파촉땅이었다. 실제로 형주 재탈환을 노린 이릉대전이나 익주 단독 북벌로 양주를 거의 손에 넣을 뻔한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은 형익을 합치고 양주를 동맹으로 삼아 북방의 변란을 통한 천하통일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갈량이 이 상황까지 염두해두고 형주에서 바로 북상하지 않고 익주를 먹고 나서 북상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천하삼분지계는 유비의 입장에서 최대한 역량을 키워 조조와 대적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며 이는 유비 외에도 노숙이나 주유 같은 전략가[21] 들 역시 형, 익주를 아우르는 게 반조조세력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과 일맥 상통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익주에 있는 유장은 익주를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고 익주를 조조에게 넘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만약 양주가 조조에게 넘어가고 유비가 익주를 먼저 차지하지 않았더라면 조조는 익주를 얻고 서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득롱망촉의 고사가 실현되면 유비 입장에선 그야말로 끝장이다. 훗날 오나라가 그렇게 망했듯이 익주를 그냥 가만히 놔둔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짓이고 익주를 얻으므로서 형주의 안정[22] 과 시너지효과의 증진이 가능한 것이다. 후일 관우가 한중공방전에서 조조가 대패하자 형주의 1/3만 가지고 북벌하니 천하가 그의 이름에 진동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비록 가진 땅이 적었기에 물량에 밀렸지만 온전한 형주와 익주를 가졌고 양쪽에서 북상에 조조의 힘을 분산시켜 양쪽에서 치고 나간다면 적어도 농서, 사예 둘 중 하나는 얻을 수 있다. 형, 익의 시너지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형주만 얻고 치고 나가자는 것은 당시 전략가들과 선비들이, 왜 이런 유사한 계책을 내놓았는지, 그리고 계획을 최종적으로 정립한 제갈량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역사적인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익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한고조가 일어난 땅이라는 상징성 역시 막대했기 때문이다.
유비가 형주를 접수하는 계책을 끝내 거부했고, 어차피 조조의 기습 때문에 그럴 시간도 부족했으므로, 실제 계획은 약간 수정되었다. 그러나 손권과 협력하여 조조를 격파한 순간부터, 유비 세력이 보여준 행보는 철저히 제갈량의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남아 있는 형주와 익주를 제패했고, 자칫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한 손오와의 형주 분쟁을 '''대치'''로 마무리 짓고 상호 합의를 봤으며, 조조를 격파하여 한중을 점령하고 한중 장악 이후 형북지방과 이어지는 요충지 상용을 곧바로 유봉/맹달을 파견하여 점령했던 것까지 완료되어 전략의 제1단계인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까지는 성공했다.[23] '''그러나...'''
한 가지 미진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조조에 대항하는 촉한-오동맹의 결속성이었다. 제갈량의 계책에 따르면 이 동맹의 유지가 필수였는데, 최초 융중대 계획의 수정으로 인해 양자간에 형주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고 이 패인 골이 촉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그런 짓을 하다가 오히려 위, 촉 양측에서 공격을 받아 망할 뻔한 건 덤이다.
깃발 꽂을 땅조차 변변찮던 유랑 군벌을 천하의 한 축으로 만들어, 당대 최고의 세력을 위협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전략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으며, 그 미완의 기저에는 내부 문제의 비중도 컸다. 요약하자면, 전략은 훌륭했지만 그 전략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세력에 한계가 있었다 정도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2.1. 천하삼분지계가 실패한 이유
그러나 문제는 형주를 차지할 때 유비가 후일 형주를 반환하기로 약속했다는 것. 당시 유비는 최소 손권이 점령했던 강릉부분 정도는 확실하게 손권에게'빌린' 상태였고 이것을 기반으로 형주를 점령했다. 유비가 힘이 강했다면 스스로 먹던가 입 싹 씻고 배를 쨌을 것이나, 그러질 못했다. 그러나 형주를 돌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오와는 동맹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유비는 '양주를 차지하면 형주를 반환하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 말도 안되는 제안이 손권을 화나게 만들어 촉나라과 오나라간의 골이 패인 것.
애당초부터 융중대, 그러니까 천하삼분지계는 유표가 죽은 이후 온전히 형주를 차지한다는 계획이었다.(유기측과 유비가 연결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천하삼분지계는 적어도 강릉과 형남 4군은 온전히 먹고 들어간다는 가정에서 나온 계책이다. 그러나 유표의 이른 죽음과 플랜 B인 남군(강릉) 단독점령도 조조의 신속한 남하와 결정적으로 유비의 10만 군중 인도로 인해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면서[24] 유비가 강릉을 가지지 못해 계획은 재수정되어야 했기에 융중대는 처음의 기획과는 달리 불완전한 계획이 되었고 오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돌발 변수가 생겼다.
결국 오나라의 간섭이라는 변수를 맞이해 형주 지분을 나누어야 했고 유비나 제갈량이나 이 시점에서 오가 유비측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거라고 기대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계획엔 커다란 차질이 빚어진다. 실제로 손권과의 결혼동맹에서 동맹결속을 주장한 제갈량 자신도 손부인의 횡포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법정에게 토로할 정도였으니 오나라가 마음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터, 그래서 굳이 자신이 동오에 외교관으로 가서 천하삼분지계를 설명하고 친유비파인 노숙과의 협력을 통해 이 체제를 굳건히 만들려고 했고, (촉서 요립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형주에 진수하고 있었을 때 손권이 직접 사자를 제갈량에게 보내 우호를 다지고 제갈량이 이에 답장하는 등 제갈량이 형주에 있었을 때는 양측의 외교 관계를 긴밀하게 설정하려고 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삼분지계의 특성상 '익주와 형주를 온전히 차지한다'와 '오와의 동맹을 유지한다'는 극히 모순적인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상 외교파탄은 예정되어 있었다. 촉이 오와의 외교에 아무리 매진했다 할지라도, '손권의 익주 진공을 막아놓고 유장을 배반해 익주를 차지한 것', '형주를 반환하기를 거부한 것'. 촉이 형주를 반환하길 거부했을 시점부터 촉과 오의 동맹은 금이 갔다.
나중의 일이지만 자신이 위나라 북벌을 할 때도 항상 오나라와의 동맹을 중요시 했고 오나라의 움직임을 신경쓰고 대비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노숙의 이른 사망에 이어 형주 공격 및 완전 소유를 주장하는 여몽의 등장으로 손권이 거기에 솔깃하면서 이 체제가 붕괴한 게 치명타였고, 오나라의 노선이 형주쟁탈을 위한 강경노선으로 변한 상황에 대 동오 관계에 있어서 강경파였던 관우 역시 더 강경하게 나가는 상황이 되고야 만다. 거기에 익주와 형주의 긴 거리상 형주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던 유비군의 처지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처음 융중대가 논의될 적만 해도 손권은 잡호장군인 토로장군에 불과했고 손가의 힘을 결집시키던 손책이 중도에 죽었기에 호족들의 온전한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당초 계획대로 유비가 온전히 형주를 얻고 익주까지 손에 넣었다면 이런 굳게 결속되지 못한 손권세력과의 동맹은 관위나 세력에서 앞서는 유비의 우위로 주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랜 A인 온전한 형주 복속이나 플랜 B인 남형주의 온전한 점령도 실패했기에 유비는 적벽대전을 통해 세력이 결속되고 관위를 높여 권위를 세운 손권에 주도권을 내주는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손권 역시 적벽대전-남군공방전 승리 지분에 유비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형주를 둘러싼 양측의 분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손권의 형주 요구' 를 비판적으로 본다면 조조에 맞서기 위해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대상인 유비를 상대로 유일한 영토인 형주를 모두 내놓을 것(=굴복하고 손권 세력 밑으로 들어올 것), 즉 사실상 무조건적인 굴복을 요구함으로써 동맹관계를 불가피한 파탄에 이르도록 만들고, 이로 인해 발생한 형주 공방전의 와중에서 유비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조조 세력까지 끌어들임으로써 가장 위험한 주적인 조조세력(위)가 형주에 한 발 걸칠 수 있도록 하고, 이 때문에 촉오동맹이 위를 공격하기 위한 중요한 길목인 형주루트가 봉쇄됨으로써 삼국정립 이후의 주도권 쟁탈전에 몹시 불리한 영향을 끼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반대로 보면 적벽대전 이후 형주에 세력기반을 제대로 구축하는 데 실패한 유비세력은 손권세력의 입장에서 보기에 대등한 동맹관계가 될 자격이 없었고, 그렇다고 손권측에게 적벽대전의 성과물인 형주를 양보하면서까지 유비가 제대로 세력을 구축하기를 기다려 줄 의무도 없으니 차라리 유비의 세력을 휘하로 포섭하여 천하이분지계를 실현하는 것이 손권 세력의 입장에서는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변호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천하삼분의 성립을 전제로 하더라도 오의 입장에서는 영토 핵심부의 방어거점인 동시에 북벌의 요충지인 형주를 장악해두는 것이 촉과의 동맹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데 유리했다는 것. 북벌에 대한 제갈량의 구상이 '한중 방면에서 옹주 및 장안으로 출병' 하는 동시에 '형주 방면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허창으로 출병' 하는 양면공격을 전제로 하고 오의 역할은 '건업에서 합비를 넘어 수춘으로 진격하는' 조공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것 역시 제갈량은 어디까지나 유비의 입장에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손권측의 입장에서 보면 손권이 직접 합비를 공격하고, 다른 장수(예를 들어 주유나 이후 등장한 여몽, 육손 등)는 형주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과 허창을 직접 노리며 유비군은 한중에서 장안으로 진격하는 조공 역할을 해주는 쪽이 훨씬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것. 다만 이 경우엔 당시 손권 세력의 주력군이 당시 중국의 중심지였던 낙양-장안을 직접 노리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결국 종합적으로 보자면 적벽대전 직후 무시하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크지만 그렇다고 대등한 동맹 상대로 인정해 줄 정도는 못되었던 유비가 크기를 굳이 기다려서 파트너로 삼기보다는 흡수해 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 손권의 판단이었지만, 유비가 손권의 기대처럼 만만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기에 손권측의 공격으로 구도가 약간 망가졌을지언정 유비는 천하삼분의 한 축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는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둘이 연합을 하려면 형주를 어떻게 분할할건지는 확실하게 해야하고 결국 익양대치로 인해 확실히 분할안을 냈지만, 손권의 뒷치기로 인해 동맹은 파탄나고야 만다.
이후 손권의 형주 뒷치기로 형주가 오에게 넘어가며 관우의 전사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촉한과 오의 관계가 제대로 틀어졌다. 이는 유비의 촉한이 오를 침공하는 이릉대전이 이어졌으며 이 두 차례 전쟁에서 촉한이 오에 패하며 그 여파로 촉한의 인재와 군사력이 크게 소진됨으로써 제갈량이 세운 계획은 완전히 끝났다. 이미 215년에 양자의 합의로 분쟁을 종결지었음에도 노숙 사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릴 계책을 짜서 상대방을 경계시키고 굳이 동맹을 배반한 손권이 문제. 특히 이릉대전의 원인이 된 이유가 오나라가 형주를 손에 넣은 후 촉한의 영역인 익주와 한중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촉한을 멸망시킬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오는 촉한과의 동맹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촉한을 멸망시켜 중원 남부를 통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나라에서 논의한 천하이분지계가 좋은 예다.
특히 오나라의 인구는 촉한의 2배가 되었기에 병합시키고도 충분히 남았다.게다가 오나라나 촉한이나 애초부터 목적이 중원 통일이기에 서로간의 동맹도 위나라를 막으려고 동맹을 맺은 것뿐이지,위나라만 아니면 두 국가는 서로 적이 되어 전쟁을 벌이게 되어 있다.문제는 오 역시 그럴 만한 역량이 전혀 안 되었다는 것이다. 에당초 형주도 혼자 못 먹어서 위나라와 동시 공격을 했기에 관우를 물리칠 수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오는 이릉대전에서 승리하고도 촉한을 병합하지 못하고 촉한과 다시 동맹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여담으로 형주를 손에 넣었지만 오나라도 중요 방어지인 영안 백제성[25] 까진 손에 넣지 못했기에 백제성 없는 형주는 이후 오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영안까지 오가 먹었을 경우 촉한과는 두번 다시 화합이 불가능하다. 영안이 장강의 목줄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촉한 침공 교두보로 쓸수 있는 곳이니까.이런 딜레마가 형주를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오나라의 딜레마로 남게 되어서 위나라-서진의 기회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천하삼분지계의 조건 중 하나이던 북방 이민족, 군벌의 위나라 견제도 성공적이지 못하거나 공동으로 압박할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서량의 마등 세력이나 요동 공손씨 정권은 비교적 허무하게 몰락했고, 이민족도 한창 독발수기능이 세력을 떨치는 전성기 때는 이미 촉이 망하고 오나라만 남아 균형이 깨진 상태. 이후 북방 이민족의 포텐이 폭발하는 영가의 난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20여년 뒤의 일이었다.
3. 유사 사례
제갈량 안대로 진행된 천하삼분은 삼국시대가 유일했지만 비슷하게 영토가 전개된 예는 있다.
첫 사례는 전국시대의 진(통일왕조)로 삼국구도는 아니었지만 관중(關中)과 파촉지역을 장악한 국가[26] 가 다른 모든 국가를 쓰러뜨리고 중원까지 차지한 경우다. 진나라는 파촉을 얻고 바로 후일 형주로 불리게 될 지역을 격파하고 천하통일에 성공까지 했으므로 제갈량이 어느 정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두 번째로는 바로 유비가 한중왕으로 그렇게 벤치마킹했던 그의 조상 한고조를 들 수 있다. 한고조는 촉땅인 한중 남정에서 나와 분열되어 있던 관중을 얻었는데 옛 진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잃어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삼진왕을 상대로 했기에 쉽게 관중을 확보하는 게 가능하였다. 어쨌거나 한고조를 이를 바탕으로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제패하였으며 이후에도 장안을 도읍으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유경의 말 따라 설령 천하의 제후들이 반기를 들어도 요지인 관중과 파촉에서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이후로는 남북조시대 북조 국가인 북주가 있다. 이 국가는 관중을 중심으로 형주 북부와 강릉(후량)을 손에 넣고 파촉을 아울러 제갈량의 플랜인 형-익주를 아우르고 이민족과 화친을 쌓고 진천(관중)을 확보한다는 전략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또, 화북의 라이벌 북제와의 국경이 낙양이고 적국 북제의 수도 업이 코앞이라 순식간에 밀어버릴 수 있었다. 두 국가와 삼국시대 촉나라 영토를 비교해보면 제갈량과 강유가 왜 그렇게 북벌에 집착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나라는 파촉뿐만 아니라 관중, 형주 일부 등 상당한 외부 영토도 수중에 있었는데 촉나라는 세를 확장하기는 커녕 오히려 산맥 안에 갇힌 꼴이었으니…그리고 이 북주는 후일 통일제국인 수-당의 전신이 되니 가히 그 성세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책도 천하삼분을 계획했다지만 그냥 그랬다는 말 밖에 없고, 상세한 계획의 내용 같은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걸 구체적인 천하삼분지계로 포함시키기엔 애매하다. 아마도 당시 원소와 조조가 싸우는 사이 자신이 제 3의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식의 계획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4. 관련 문서
[1] 후엔 다른것도 아니고 모반 혐의로 유방이 군사를 끌고 오는데도 '에이,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라며 맨몸으로 나갔다가 단숨에 붙잡히는 걸 보면(…) 한신은 유방에게 정말로 크게 감사하고 있었고, 유방이 그걸 당연히 알아줄 거라 여겼던 모양.[2] 유방은 이들 핵심 장수들이 전부 다 밖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항우의 맹공격을 막아냈다.[3] 秦川, 진령산맥 북쪽의 위수(渭水)유역 평원 지대. 지난날 이곳이 진(秦)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4] 조조의 세력 팽창은 관도대전 승리를 기점으로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적벽대전에서 넘어지고 유비에게 번성과 한중을 뺏기고 더이상 큰 진전을 하지 못했다.[5] 여기서 말하는 솥이란 鼎(솥 정)으로 건설기술이 발달하여 솥이나 냄비를 놓을 수 있는 화덕을 쉽게 만들 수 있게 되기 이전, 고대 중국에서 사용하던 세 발 달린 솥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가마솥같은 큰 솥에 다리가 3개 달려있어 솥채로 땅에 세울 수 있는 형태. 이 다리를 이용하여 솥을 세워놓고 그 밑에 불을 지펴 음식을 익혀먹는 것이다. 이런 솥은 고대 부족시대부터 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데 사용했기에 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고, 이것이 주나라 시대의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구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즉, 솥(鼎)이라는 물건 자체가 어떤 영역(넓게는 천하)와 그 영역을 다스리는 권위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기에 "솥발과도 같이 3개의 다리로 천하를 지탱한다" 는 비유가 절묘한 상징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6] 마등이나 마초, 공손강 등의 예를 보면 동북과 서북 방면 역시 확고한 조조의 영향권은 아니었다고 봐야겠지만, 천하삼분지계가 나온 시기는 조조의 남정 시기이니 일단 저 세 세력에 초점을 맞추고 동북/서북지역에 대해서는 후술.[7] 파촉(익주), 형주, 강동(양주+교주)[8] 3자가 대치 중인 상황에서는 1위를 견제하기 위해 2, 3위가 좋든 싫든 연합할 수밖에 없다. 2, 3위가 서로 싸우면 이겨봤자 1위는 어부지리로 둘을 쉽게 제압할 것이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각자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이고 예외도 있다. 이릉대전이라든가… 헌데 4자 대치는 이러한 자연적인 균형점이 없다. 왜냐면 2, 3위가 4위를 협공해서 갈라먹어도 3자 대치상황으로 바뀔 뿐 균형은 유지되는데다, 4위는 언제라도 2위와 3위 세력에게 먹힐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1위와 협력할 공산이 크다. 왜냐면 1위 입장에서도 4위가 2위나 3위의 세력에게 먹혀 세력 커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기도 할 것이고, 만약 1위가 4위 세력과 협력해서 성과를 얻었다면 그것대로 좋거니와, 여차하면 후에 4위 세력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게 된다. 4위도 1위의 손을 뿌리치면 남은 것은 멸망뿐인데다, 2, 3위가 존재하므로 1위에 먹히더라도 나름 대접 받을 수 있기에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호 협력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삼국시대 당시의 상황에 맞춰보자면, 중원을 장악한 조조에 맞서는 군웅들의 세력기반은 일단 강동(양주+교주), 형주, 파촉(익주)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중 강동과 파촉은 조조의 본거지와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고 큰 강이나 험준한 산맥과 같은 자연 방어선의 이점도 누릴 수 있었기에 조조의 세력이 강성해도 버티기 유리했던 반면 형주는 조조의 본거지와 거리도 가깝고 중원-강동-익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기에 방어에는 불리한 입지였던 것. 따라서 형주가 버텨내려면 파촉/강동세력과 동맹을 맺고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인데... 파촉/강동에 기반을 둔 세력의 입장에서는 굳이 형주세력을 지원해줄 이유가 별로 없다. 차라리 양쪽에서 형주를 협공해서 갈라먹어버린 뒤 이후 3자 대치 구도에서 1위 조조를 공격할 교두보로 삼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따라서 형주 세력은 차라리 조조에게 붙어서 파촉/강동을 공략할 거점을 제공한 뒤 그 대가를 받는 것이 '최악을 피한 차악', 또는 '최선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의 차선'에 해당하는 선택이었던 것. 따라서 유표의 사망 후 조조의 남진과 형주의 항복, 유비+손권의 대조조 항쟁 과정 자체가 (완전히 교과서적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4자 대치구도의 성립이 어려움을 보여주는 예시라 할 만 하다. 뭣보다도, 당장 자기 기반도 없는 상태의 유비와 제갈량조차 '형주를 차지한 후 이를 기반으로 익주를 차지하여' 조조에 맞서는 것을 대전략으로 삼았지 '형주를 차지하여 유장, 손권과 3자동맹을 맺어' 조조에 맞설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따.[9] 한국사의 삼국시대에서도 이런 상황으로 정세가 전개되었다. 삼국시대 후기 당시 2위 고구려가 4위 신라의 화친을 거절하자 3국 균형이 깨지고, 4위는 2위 고구려와 3위 백제에게 큰 압박감과 위협을 느끼고 1위 당나라와 연합해서 2위와 3위를 제압해버렸다. 가야가 아직 존재했던 6세기의 판도 또한 비슷했는데, 4위 가야가 2, 3위 백제신라 사이에서 치이다가 살아남기 위해 1위 고구려를 끌어들여 독성산성 전투가 일어났다. 다만 이 때는 1위 고구려가 2, 3위 연합군에 패배해서 북벌을 당해버리고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10] 익주는 본디 한고조의 기반이고 형주는 본디 광무제의 기반이니 유비는 양조의 기반을 동시에 차지하는 셈이다.[11] 자세히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서쪽 융족과의 화친 부분은 이들의 인심을 얻어 깊게 연관되어 있고 사실상 반강족이나 다름 없던 마등-마초 등 서량군벌과의 연계도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비가 진격할 진천은 곧 관중이나 다름없으니 이 지역 군벌이나 강족, 저족을 포섭하자는 말. 후일 유비가 마초가 귀부하자 중요 직책에 그를 계속 기용한 이유도 바로 이것에 있다.[12] 물론 조조 세력의 병합에 성공하면 훗날 등지/손권이 예상했듯, 촉과 오의 싸움이 있었겠지만, 융중대에선 시점이 시점인 만큼, 거기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13] 그렇기에 후일 융중대 붕괴 이후 제갈량의 북벌은 한고조의 고사에만 따라 기습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동맹인 오와의 연계하거나 강족, 저족, 선비족등 이민족과의 연계를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했다.[14] 중국에서는 아예 융중대를 비판한답시고 조조가 오기전에 '''신야'''에서부터 장로는 약해빠졌으니(...) 한중을 노리고 연이어서 양주를 공격했어야 한다는 괴악한 글을 쓴 작자도 있다.(...) 일단 객장인 유비를 받아들인 유표가 허락할지는 둘째치고 조조가 행여나 처들어오면 그나마의 근거지 신야를 잃는데다가, 신야에서 상용을 거친 후 한중까지의 거리나 보급의 불가능성, 길의 험악함은 말할것도 없고 장로도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군벌에 지형의 이점까지 있는 상황에서 당시 형주를 온전히 아우르지 못한 유비의 세력으로 한중을 차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연이어서 조조도 어렵게 상대한 양주 군벌 세력을 공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제갈량도 이 지역을 공격할때는 이 지역 융족과 화친하라고 조언했을 정도니 말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그 글을 본 사람들 가운데 '차라리 신야에서 장안을 치는게 더 가까우니 장안을 치라고 하지 그래요?'라고 한 사람도 있다.(...)[15] 당장 후에 상용을 차지했던 것도 익주를 기반으로 한중을 차지하고 조조가 유비와의 싸움 후 한중에서 패퇴하여 병력을 물린 사이 형주 의도군의 군세-익주 한중군의 군세가 동시에 움직여서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니.[16] 또는 아예 한중도 무시하고 관중을 먹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천하의 한고조도 한중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고 또 이런 상황에서 무관 돌파가 가능할지가 문제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17] 거기다 마침 형주를 차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11년에 익주가 도움을 요청하고, 그전에 내응을 약속하는 장송, 법정 등의 세력들이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험지에 기대어 방비하는 세력을 치는게 좋겠는가, 아니면 내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좋겠는가?[18] 익주를 차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주 군벌과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또 관서군벌은 그 세력구도가 유동적이어서 얼마든지 회유가 가능한 세력이기도 했다. 익주를 유언이 다스리던 시절엔 유언과 손을 잡고 장안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이후 조조와 화친했으나 마초 시대에는 다시금 관서를 위협하는 조조와 일전을 벌였다.) 사례지역은 이미 종요와 가규등이 안정화시켰기 때문에 허도까지는 몰라도 낙양까지 치고 가기엔 형주만의 역량으로는 힘이 부친다. 거기다 융중대가 처음 제시되었을 당시엔 관서군벌의 필두인 마등과 한수가 조조에게 협조적이었기에 곽원의 사례와 비슷한 모양이 나올 수도 있다. 관우-장비vs마초-방덕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말. 융중대에서도 양주의 융족(과 군벌)과는 화친하고 유비본대는 진천, 그러니까 관중으로 들어가며 형주군은 허도와 낙양을 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사전에 양주와 협조하여 그 힘을 늘리고 평양전투같이 양주 군벌이 형주에서 진격하는 형주군을 상대로 관중, 사례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차단하는 일거양득의 계책이었던 것.[19] 그나마 천하의 맹장 관우가 있을 때는 단독으로 어느 정도 모험을 거는 것도 가능했지만, 사실 관우의 공세 자체가 <삼국정립이 이루어진 뒤> 에야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유비가 익주+한중+상용을 장악함으로써 익주에서 형주 방향으로 위협이 가해질 가능성이 사라지는 수준을 넘어 배후지로써 지원을 제공하는 역할까지 해 줄 수 있게 되고, 그 연결고리 역시 튼튼해진 상황에서 가능했던 일인 것. 구체적으로 보면 관우의 공세가 성공적일 경우 유비의 본대가 한중을 넘어 제 2 전선을 열어 협공할 수 있고, 설령 좀 모험적인 공세를 펼치다 실패하여 도리어 수세에 몰리더라도 익주의 지원으로 형주를 유지한다는 보험이 생기는 것이다. 즉 '관우가 단독으로 모험을 걸었다' 는 해석 자체가 틀렸고, 관우의 공세는 어디까지나 '천하삼분지계의 일부'로써 천하삼분지계가 성립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형주 하나만 가지고 조조에게 덤벼든 정신나간 도박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으로 보면, 일단 천하삼분지계가 상당한 수준으로 실현된 상황에서도 손권(동오)의 배신+상용을 통한 익주+한중-형주간 연계의 일시적인 단절이라는 악재가 겹치자 결국 관우의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고 오히려 역습으로 유비 세력이 형주를 상실했음 역시 생각해야 한다. 익주(촉) 방향으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이 완전히 배재된 상황에서도 이 정도로 위험한 전략을 익주 없이 시행한다는 건 그냥 효율적인 자살행위일 뿐이다.[20] 만약 유비가 허도를 치고 황제를 옹립해버릴 경우, 손권 입장에서 보면 유비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면서 '유비와 손을 잡고 조조에 맞선다' 는 대전략을 유지할 의미가 없어진다. 위에서 서술된 것처럼 '북벌에 성공한 이후에는 촉-오 역시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 문제는, 형주만을 기반으로 북벌을 진행할 경우 이 '결판' 에서 손권이 손쉽게 유비의 본거지를 장악할 수 있어 유비로써는 지나치게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21] 다만 주유는 무리한 군사적인 통합을 불사하여 천하를 이분하려 든 강경파였고 노숙은 천하를 이분, 삼분한다는 개념보단 각 군벌 세력들의 합종을 주장한 것에 가까운 현실주의자였지만.[22] 익주를 얻으면 남형주의 중심지인 강릉을 보전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천혜의 요새인 강릉, 새로 수축한 공안에서 버티면서 익주의 지원군을 금방 얻어낼 수 있다. 이는 익양대치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고 관우도 강릉을 잃지만 않으면 형주에서의 유비 세력은 얼마든지 재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강릉과 공안 방어에 만전을 기울였던 것도 이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오늘날 옛 강릉인 징저우에는 관우가 새로 수축했던 성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이기도 하다.[23] 관우는 양번으로 진군하여 천하를 진동시킨다. 조조는 천도를 고려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고, 위나라의 대부분의 전력이 형주 지방에 집중된다. 합비에 파견한 장료까지도 형주방면으로 돌리는 것이다.[24] 유비가 조조에게 좌초된 장판파는 현재의 징먼시에 있는데 징먼은 징저우(형주, 옛날의 남군 강릉)의 입구(荊門)이라는 이름 그대로 조금만 더 가면 강릉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만약 유비가 백성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강릉을 손에 넣고 형남 4군까지 지배해 조조와 대립했다면 플랜 B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는 그런 사람이 못 되었고 결국 남형주의 완전복속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25] 그 백제가 아니고, 중국 영안 지역의 성.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6] 진(秦)나라는 관중에서 파촉으로 확장한 경우고, 촉나라는 파촉에서 관중으로 진출하려 했다. 끝내 실패했지만.[27] 당시 보수여당이던 새누리당과 거대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에 더해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이 원내 제3세력으로 등극.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정반대의 한 정당 천하통일 수준으로 간다.[28] 중국의 삼국시대가 아닌, 한반도의 고/백/신 삼국을 말한다. 어찌 보면 세 나라 중 하나가 강해지면 나머지 두 나라가 손을 잡고 맞서는 과정을 거듭한 끝에 700년(...)간 세 나라의 경쟁과 반목, 화친과 배신이 반복된, 진정한 의미에서 삼분지계의 균형이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나라의 꼴을 갖춘 시기인 5세기경부터는 정말 삼국지연의 뺨치는 배신과 화친이 끊이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