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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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제27대 군주. 제11대 왕. 원래 이름은 위(圍)였으나, 왕이 된 뒤 건(虔)으로 고쳤다. 초공왕의 차남. 자신의 조카이자 전대 초왕인 겹오 웅균[1] 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초 영왕은 대외적으로 채나라와 진(陳)나라를 멸해 그곳을 초나라의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으나 반란이 일어나 쫓기는 신세가 되어 우윤인 신해의 집에 머물다가 결국 잡히면 죽는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2. 그의 인생 초반기
겹오 3년(기원전 542년), 웅위는 조카인 겹오에 의해 영윤이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공자 흑굉과 백주리[2] 로 하여금 정나라와 초나라 경계 땅에 주, 겹, 역 3개 성을 쌓는다. 그것 때문에 정나라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다.[3]
겹오 4년(기원전 541년) 12월, 초 영왕은 정변을 일으켜 겹오를 시해했다.
3. 초 영왕의 치세
초 영왕 원년(기원전 540년), 웅위는 초나라 왕으로 즉위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름을 건으로 고쳤다. 그는 가는 허리의 여자[細腰]가 취향이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 굶어 죽는 일이 적지 않았다. 언젠가 제나라의 상국 안영이 초나라를 방문했는데, 초 영왕은 그가 키가 작은 것을 깔보았다. 그래서 그를 기죽이기 위해 거한들에게 병거를 타게 했다. 그러나 안영은 기죽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했다. 그리고 안영은 초나라의 신하들과 설전을 벌여 말빨로 제압을 했으며,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르자 그것을 가지고 초 영왕이 제나라 사람들을 까니 안영은 남쪽에서는 귤나무였던 것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면서 초 영왕을 말빨로 눌렀다.
초 영왕 3년(기원전 538년) 6월, 제후들과 신 땅에서 회맹했다. 7월에 오나라(吳)를 쳐서 8월에 오나라에 의탁한 제나라의 몰락한 권신 경봉의 일족을 멸하였다.[4]
초 영왕 7년(기원전 534년), 장화대를 건립했고, 그곳에 미녀들을 채웠다.
초 영왕 8년(기원전 533년), 공자 기질에게 명하여 진나라를 멸했다.
초 영왕 10년(기원전 531년), 채나라 군주인 채영후에게 입조를 요구해 술을 퍼먹여 취해 곯아 떨어졌을 때 죽여버렸다.[5] 그리고 공자 기질로 하여금 채나라를 멸망시키게 했다. 그리고 그를 채공에 봉했다.
초 영왕 11년(기원전 530년), 서나라[6] 를 정벌해 오나라를 위협했다.
초 영왕 12년(기원전 529년) 봄, 진나라와 채나라의 옛 신하들이 초 영왕의 아우인 공자 비, 공자 흑굉, 채공 기질을 설득하여 초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의 치세를 뒤엎으려 했다. 그러자 초 영왕은 쫓겨났고, 반란군은 공자 비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초 자오다. 초 영왕은 정처없이 달아나다가 우윤 신해의 집에 숨었다. 여름인 5월에 초 영왕은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우윤 신해는 그의 두 딸을 초 영왕과 같이 순장했다.[7]
4. 여담
뒤를 이은 군주인 자오는 초평왕인 웅거에 의해 내쫓기고, 초 평왕은 처음에는 나라를 나름대로 다스리다가 간신 비무기의 말을 듣고 미인인 진나라 공주, 그러니까 원래 태자와 결혼할 며느리 감을 차지해버렸다. 충신 오사 등이 그 부당함을 간했으나 결국 그것 때문에 비무기의 미움을 사서 오사를 잡은 뒤 편지를 보내 오상과 오운을 죽이려 했으나 오상만 오고 오운인 오자서는 공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에서 오나라로 떠돌다가 오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초 평왕이 죽고 초소왕이 즉위했을 때 비무기 또한 정변으로 인해 죽었다. 그후 오자서는 초나라를 침공해 초 평왕의 시신을 두들겨 패는 등 패권을 장악했으나 결국 신포서 등의 충심으로 초나라는 중흥하게 된다.
[1] 달리 웅운, 웅임이라고 하는데, 한자는 항목 참조[2] 오나라의 간신배로 유명한 백비의 할아버지다.[3] 강대국인 초나라가 자기 경계에 군사 행동을 하니 겁나지 않을 수 없다.[4] 초 영왕이 오나라를 친 명분이 바로 경봉을 죽이기 위해서였다.[5] 그런데, 여기에도 명분은 있는게, 채 영후는 아버지 채경후가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를 NTR하자 아버지를 시해했다. 바로 그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그에게 입조를 요구해 죽여버린 것이다.[6] 서주 부근의 소국.[7] 이 당시 아직 순장의 악습이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