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
1. 개요
殉葬. 장례 방식 중의 하나. 죽은 지도자가 사후에도 그 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부장품을 넣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산 사람을 같이 묻는 것을 말한다.
2. 설명
같이 묻는 사람은 시종, 궁녀, 노예라든가 무덤의 주인공이 왕 등 높은 사람이면 그 신하나, 심지어 생전의 가족까지 같이 묻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생매장이지만 순장하기 전에 같이 묻을 사람들을 먼저 살해한 뒤 시신을 묻기도 한다. 이는 순장된 시체의 깨진 두개골 등 여러 상처를 통해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빈번하게 행해졌으며, 가혹한 풍습이라 나중에는 용(俑)이라는 인형을 대신 묻는 것으로 대체하다가, 유교의 보급으로[1] 이마저도 사라진다.[2]
결초보은의 경우처럼 유언에 의해 순장을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망한 사람의 의사뿐만 아니라 산 가족들 중 영향력이 있는 자들의 의사가 더 반영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3] 자신과 대립하는 자들을 숙청하는 용도로 쓰기도 하였다.
인간을 같이 껴묻는 까닭은 한마디로 ''''사후 세계에서도 생전처럼 봉사하라''''는 것이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정적을 합법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기에, 권력 다툼에서 밀린 파벌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주로 권력자들이 죽기 전에 마음에 안 들었던 부하를 지목하며 "내가 죽을 때 '''충성스런 저 부하 녀석도 같이 좀 묻어주면 좋겠구나'''" 혹은 파벌 싸움에서 이긴 쪽이 "고인께서 '''저 세상에서 자네들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할 거야 그치?" 이런 명분이었다. 실제로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붕어하고 제위를 승계한 아들 요태종이 어려서 선황의 아내 겸 금상의 모후로서 수렴청정한 술율평은 그 과정에서 수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싸그리 순장시켜버렸다.[4]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생전의 지도자에게 호감을 샀던 여자들도 순장의 대상이 되었다. 한 예로 영락제가 죽자 영락제가 생전에 아낀 조선인 후궁 한씨(인수대비 한씨의 고모)가 순장당했다.[5] 또한 계승자 입장에선, 배다른 자식들과 그 후견인이 될 만한 후처들은 언제나 유력한 정적 후보였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처리했던 것이다. 뭐 혹은 말 그대로 "죽어서도 주인을 모셔야지" 이런 식으로 '''자원했다'''는 사례도 없지는 않다고 한다. 지배자의 신격화가 더 잘 먹혔던 고대에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고 한다.
이후 점점 인명과 관련된 인식이 '죽은 후에도 호사를 위해 데려가는 것보다는 살아서 일을 시켜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흐르며 법적으로도 금지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한편 죽어서도 호사를 누리고 싶어했던 지배층은 사람을 같이 묻지 못하는 것을 대신하기 위해 인형을 대신 넣어서 매장하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 법적으로는 살인죄로 처벌받으며, 어떻게 제물로 바쳐졌냐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진다.
특정 인물이 죽으면서 같이 죽는다는 개념 때문에 특정 인물의 지지층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 특정 인물이 죽거나 몰락할 때 평소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 너흰 순장 안 하고 뭐하냐는 식으로 비꼬는 것. 정치권에서도 간혹 사용하는 말인데, 특히 이런저런 권력형 스캔들이나 초대형 사고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권의 임기 말에 입각하거나 여당 총수를 맡게 되는 경우에 순장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정황으로 보면 순장이라기보다는 순사 쪽에 더 가깝지만, 순장 쪽이 더 잘 알려진 거라 이쪽으로 많이 쓰인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이니 순장이라면 순장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제 사례
청동기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철기시대 부여,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특히 많이 행해졌다.
3.1. 한국사
일반적으로 순장의 주된 대상은 폐쇄적인 신분제 사회인 고대의 상황에 따라 '''사망자의 노비'''가 대부분이었고, 사망자의 사병이나 신하가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고조선, 부여, 고구려, 가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요동에서 발견된 강상무덤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순장묘 형식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특히 한국사에서 순장을 가장 활발히 했던 나라가 바로 대가야인데''', 옆동네 신라나 금관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1~5명 같이 묻는 정도였던 반면[6]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있어서 한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이 밝혀졌다.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런 대가야의 대량 순장 풍습 덕분에 현대까지 가야는 도굴당하지 않고 잘 보존된 고분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시신과 같이 묻었던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과거 왕이나 고위 귀족이었을 무덤 주인공의 덧널을 가장 먼저 노린다. 그리고 유물의 급이 좀 떨어지는 주변 순장 무덤은 건드리지 않은(혹은 발견 못 한) 경우가 많다. 현대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쪽 유물은 순장덧널에서 나온 유물이 많다. 순장이 잔인한 풍습이긴 하지만 가야를 연구하는 데 그나마 순장 풍습이 존재했던 덕을 좀 보는 셈이다.
고구려 동천왕 22년(248)조에는 왕이 승하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장하려고 하여,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하면서 금하게 했으나, 정작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서처럼 사망한 사람을 따라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다버려 순장되는 '자사순장'의 풍습은 부여에서 보이는 살인 순장과 비교되는 또 다른 형태의 순장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지증왕 3년(502)부터 공식적으로 이 제도를 금지하고,[7] 순장을 마지막 시기까지 유지하던 가야가 진흥왕의 정복(562)으로 멸망하면서 한국 역사에서는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요즘 학계에서는 한국에서의 순장을 일반 하층민보다는 순장자와 비슷한 계급자를 넣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부여, 가야, 신라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마도 같은 문화권하에 묶여져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 몇몇 묘에서는 꽤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는 순장자나 순장자용 묘가 발견되기도 한다. 다만 발해에서는 순장이 남아있었다고도 한다.
3.2. 중국사
중국도 오랫동안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춘추시대 진목공의 경우 무려 177명을 순장으로 살해했고, 전국 7웅을 통일한 진시황의 장례식 때도 비록 숙청의 목적이 있었지만[8]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해돼 순장당했다. 이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남아서 한때 위왕 조조 무덤으로 추정되었던[9] 무덤에서 20대와 40대로 추정되는 여자가 순장된 유골이 발견되었고 # 또한 정사 오서에서는 진무가 합비 공방전에서 전사하자 손권은 진무의 애첩을 강제로 자결시켜서 순장 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자성어인 결초보은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진나라 대신 위주(魏犨)[10] 에게 총애하는 첩이 있었는데, 위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첩을 재가(재혼)시키라고 했다. 그런데 병세가 더 위독해져 정신이 많이 흐려지자 말을 바꾸어 첩을 순장시키라고 한 뒤 죽었다. 이에 위과가 고민하다가,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한 말이 진심일 거라 생각해서 서모를 재가시켜 주었다. 이후 전쟁터에 나갔다가 적군의 추격으로 위험에 처했는데, 갑자기 적군이 낙마하는 바람에 위기를 벗어났다. 그날 밤 그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자기는 그가 순장하지 않고 재가를 보낸 서모의 친정아버지로, 풀을 묶어서 적군의 말을 쓰러뜨림으로써 딸을 살려준 보은을 했다고 하였다는 이야기.
워낙 반인륜적인 풍습이라 공자를 시작으로 지식인들이 전방위적으로 까댔고, 국가적으로도 정복 전쟁이 활발한 시기에 이런 일로 인력을 없애는 건 국력 손실이라서 후대로 갈수록 금기시 되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인구도 적던 시대였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수백 명씩 묻어대면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주나라 때부터 용(俑)이라는 제례용 인형으로 순장 피해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시도했고,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상당히 일반화되어 순장 피해자들이 줄어들게 된다.[11] 다만 후술하겠지만 성인 공자는 용마저도 비판을 넘어 저주를 퍼부었는데, 유교의 사상을 생각해보면 죽은 사람의 사후를 위해 사람이든 재산이든 낭비하는 것을 헛짓거리라 생각한 것 같다.[12]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가 유입되고, 순장이라면 학을 떼는 유교도 다시 정비되어가면서 수나라 때에 와서는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정복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순장 문화가 부활한다. 거란족과 여진족을 비롯한 정복 왕조의 주류 민족들은 순장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중국에서 다시 순장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인 유학자, 관료들의 강력한 비판과 반대로 요, 금 양대 정복 왕조의 순장 문화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사라졌다. 그러다 원나라 때에 다시 순장이 부활, 한인 왕조인 명에까지 영향을 끼쳐 명대까지도 순장 문화가 살아남아 황제가 붕어하면 후궁이나 궁녀들을 순장했다. 명을 받들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명의 순장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반도에선 이미 천여 년 전에 금지된 나쁜 제도를 아직도 운용하고 있었으니... 일례로 세종 때 허조는 영락제 사후의 순장 소식을 듣고, 공자가 말했던 ''''용(俑) 처음 만든 놈은 자손이 끊기리라!''''라는 구절[13] 을 언급하면서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데 '''중국의 풍습이라고 해도 본받을 게 못 됩니다.'''" 라는 촌평을 남기며 비판했다(세종실록 1425년 10월 9일 기사).[14] 사극 대왕 세종에서도 허조(김하균 분)가 명나라 예부상서 여진 앞에서 대놓고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디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나라에서는 홍무제가 후궁과 궁녀를 순장시킨 이래 영락제는 물론이거니와 '인선의 치'라 일컬어진 명군 홍희제와 선덕제도 숫자만 적을 뿐 순장 제도를 유지했다.
명사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껄끄러운 역사인 관계로)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락제 당시의 순장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장된 30명의 후궁, 비빈 중 두 명이 한씨, 강씨로 불린 조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 기록을 근거로 했을 때, 명나라 순장은 생매장 형식이 아닌, 목을 매달아 죽인 뒤 같이 묻어주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제가 죽은 뒤 자금성 전각에서는 궁녀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이들은 한날 한시 같은 장소에서 목이 매달려 죽었다. 그러던 중 정통제가 붕어하기 전에 순장을 금하는 유조를 내려 명나라에서는 막을 내리지만, 순장 문화를 유지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선 후, 또다시 순장이 부활한다. 그나마 청나라에서는 초기에만 순장이 유지되다가 중단되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청나라 건국 전인 후금 시기에 딱 한 번 순장이 이루어졌다. 건국 군주인 누르하치의 사후 그의 대복진이던 오랍나랍 아파해와 첩 덕인제가 순장된 것. 이 순장은 사실상 대칸으로 즉위한 황태극이 자신에게 위협적인 아제격, 도르곤, 다탁 삼형제의 생모인 대복진을 제거하고자 한 정치적 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순치제까지 순장이 유지된 뒤에 폐지되었다.[15]
이와 별개로, 대만 정씨 왕국에서는 2대 국왕인 정경(鄭經)의 장남이었던 정극장이 이복동생인 정극상(鄭克塽)의 장인 풍석범(馮錫範)을 위시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그의 아내였던 진(陳)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순장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는 풍석범의 계략이었는데, 진 부인이 정극장의 조력자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진영화(陳永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해당 사건을 끝으로 중화권에서 순장 풍습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3. 기타 지역
고대 이집트의 경우도 제1왕조 3대 왕인 제르(Djer)의 무덤에서 318구, 4대 왕인 제트(Djet)의 무덤에서 132구, 5대 왕인 덴(Den)의 무덤에서 136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는 등 순장 풍습이 남아있었으나, 이미 제2왕조 1대 왕부터 '우샤브티'라는 나무, 혹은 도자기 인형들로 교체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키타이족의 경우에도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순장을 행하였다. 왕이 죽으면 귀족 청년 수십 명과 그들 숫자에 맞춰 말까지 죽였는데, 말 잔등 위에 청년의 시신을 태우고 뾰족한 나무로 꿴 다음, 왕의 시신 주위에다가 돌아가면서 배치하면서 마치 죽은 왕을 호위하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바이킹의 경우 족장이 사망했을 때 노예 중에 한 명을 자원받아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 아랍 상인 이븐 파들란이 볼가강 유역에서 만난 바이킹들의 장례를 목격한 바에 따르면 죽은 족장의 재산을 3등분하여 유족에게 남길 유산, 장례를 치를 비용, 그리고 함께 죽을 노예 호강시키는 돈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자원하는 노예는 대개 여자 노예가 되는데, 10일 동안 모든 종류의 장식품으로 머리를 꾸미고 좋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쾌락에 탐닉한다.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늙은 여인이 수의를 만들고 모든 장례 물품을 준비하면서 이 노예를 안락사시킬 사람들을 선별한다. 안락사를 시킬 때는 독한 술로 의식을 흐리게 만든 후,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또 한 사람은 단검으로 갈비뼈 사이의 급소를 찌른다고. 이렇게 죽은 노예는 족장의 시신이 실린 배에 함께 태워 물에 띄워보낸 후 화장시킨다.
4. 매체에서
EBS '''어린이 드라마(!!)''' 점프에도 이 내용이 나왔으며, 순장제도가 사라지게 하는데 주인공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16]
MBC 사극 김수로에서는 순장이 한국사에서 가장 활발했던 가야가 배경인 드라마답게 노비들이 둔기로 살해당한 뒤 주인의 묘에 순장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가야 사람인 우륵의 일대기를 다룬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가실왕의 순장 장면이 나오는데, 담담한 필체로 꼼꼼히 묘사되어 있다.
주윤발이 주연으로 나온 공자 영화에서도 순장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
엽기적인 그녀에서 소녀의 무덤에 소년이 산 채로 순장(생매장)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년은 무덤에서 빠져나와 도망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머리를 삽으로 얻어맞아 기절하면서 소녀의 무덤에 산 채로 생매장을 당한다.[17]
중국 사극에서 순장이 형벌이나 정적 제거 또는 선왕 운운하면서 협박용으로 등장한다.
5. 유사개념
- 사티: 이건 순장은 순장인데 생화장이다. 더군다나 상당히 현재진행형이다.
- 순사#s-2: 순장의 변형. 일본의 경우, 순장을 대신하여 17세기 무렵 성행했던 적이 있다.
- 정권 말기에 할 일이 많은 부서의 중요 보직에 보내지는 사람을 순장조라고 칭하기도 한다.
6. 같이보기
[1] 공자는 순장 풍습을 매우매우 극혐한 나머지 이를 흉내내기 위한 용 또한 몹시 싫어해서, "이를 만든 놈은 후손이 끊어질 것" 이라 발언한 적이 있다. 유교에서의 최악의 불효 중 하나가 자녀가 없는 것이며, 불효는 불충과 더불어 유교에서 가장 저질러선 안 되는 죄나 다름없음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저주를 퍼부은 셈이다.[2] 이 용(俑)이 스케일이 큰 것이 병마용. 한국의 신라왕릉에서도 하대가 되면 예전처럼 금관 같은 화려한 황금부장품을 잔뜩 넣는 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한 뼛가루를 담은 그릇과 작은 흙인형 정도만 무덤에 넣게 된다.[3] 결초보은 일화도 최종적으로 그걸 결정한 건 세상을 떠난 이의 아들이었다. 사실 당연한 게, 죽은 자는 결정권이 없다.[4] 그리고 반대 측에서 "그럼 부인인 당신은 왜 순장되지 않느냐"라고 반발하자 자신은 어린 아들이 있으니 대신 팔을 잘라 넣겠다며 '''자기 팔을 하나 잘라서''' 같이 묻었다.[5] 이 영상 참조[6] 김해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왕급 무덤은 시기에 따라 순장자가 1~5인, 최전성기인 5세기 초가 되면 왕급이 아닌 중형 무덤에도 2명의 순장자가 묻힌다. 함안 아라가야는 순장곽을 따로 만들지 않고 무덤 주인의 발치에 2~6명을 순장하는 식이었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다곽 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7] 그동안 신라에서는 마립간이 사망하면 살아있는 남녀 각각 5명씩 묻었다고 한다.[8] 이세황제 호해의 형제들이 많이 순장 당했는데, 목적이야 뻔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형제들뿐 아니라 누이들도 많았다.[9] 조조는 기록에서 자신의 첩과 궁녀들에게 따라 죽지 말고 자립하라고 명했고, 해당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속출하면서 조조의 무덤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10] 전국 7웅 위나라(魏)의 먼 시조다.[11] 다만 진시황릉에도 순장자는 존재했는데, 2세 황제의 불안정한 황제 계승에 대한 반발을 우려해 형제자매들을 전부 죽여서 순장시켜버렸기 때문이다.[12] 공자와 안회의 이야기 중에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자기 자식을 팔아야 했던' 사람이 통곡하자, 안회가 울음소리만 듣고 그 내역을 알아맞추는 내용이 나온다.[13] 정확히는 맹자가 공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주장했던 것을 다시 인용한 것. 원문은 맹자 양혜왕 장구 상(梁惠王 章句 上) 4편.[14] 이러한 말이 씨가 됐는지 명나라 황실 직계는 훗날 청나라의 중원 입관 후에 일어난 명나라 주씨 학살로 단절되었다. 그리고 후술할 내용처럼 청나라도 초기에 순장을 했는데, 청나라 황실 직계는 비록 명나라 황실 직계만큼 비참하게 단절된 건 아니지만 동치제가 자녀 없이 요절하면서 마찬가지로 단절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방계 출신 황제인 광서제와 선통제도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과적으로 청나라 황실의 계보는 정통성 측면에서 사실상 단절된 셈이 되었다.[15] 순치제의 후궁인 정비 동고씨가 순장되었다. 그녀는 동악비의 사촌동생이기도 했다.[16] 정확히 말하자면 부여 노비가 된 주인공이 도망을 치다가 산 속에서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한 태자를 만나게 되고 그 태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태자의 여동생인 공주가 주인공에게 시비를 털다가 말에 밟혀 죽게 되자 그 공주를 따르는 대상자로 주인공을 포함해서 노비 11명이 같이 순장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 태자가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기억해냈고 자신의 아버지인 부여 왕에게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충성심을 얻으려면 순장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왕이 따른 것이다. 그리고 태자는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순장자들의 대용으로 썼다. 사실 이것은 부여 왕과 태자가 대단한 건데 그 전까지 부여는 왕가 뿐만 아니라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귀족들이 죽어도 순장을 했다. 근데 하물며 '''자기 가족인 공주'''가 죽었는데 '''그 공주에서부터 순장 제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태자와 왕이 백성들까지도 얼마나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17] 이 내용은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자기가 입던 옷(소년과의 추억이 담긴)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내용을 패러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