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규

 


1. 대구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2. 의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3. 천안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4. 평강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1. 대구광역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성명
최병규(崔丙圭)
이명
최명숙(崔明淑)
생몰
1881년 2월 26일 ~ 1931년 2월 17일
출생지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사망지
경상북도 대구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최병규는 1881년 2월 2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에서 독립군 지원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활동을 폈다. 그 후 조선국권회복단의 동지 박상진·정운일·김재열(金在烈) 등이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통합하여 동년 7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이에 참가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혁명의 구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자금조달을 위해 식민권력에 안주하던 친일부호 처단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최병규는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1916년 음력 6월, 그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지시에 의해 정운일·김진우(金鎭瑀)·최준명(崔俊明) 등과 함께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의 처단을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러한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1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병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의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성명
최병규(崔秉圭)
본관
경주 최씨
생몰
1881년 10월 28일 ~ 1931년 7월 15일
출생지
경상도 의령현 덕암면 이목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1]
사망지
경상남도 의령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병규는 1881년 10월 28일 경상도 의령현 덕암면 이목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이목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당시 용덕면 면서기였던 그는 면장 강제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부탁 받고 동료서기 전용선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의령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1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최병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천안시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성명
최병규(崔秉奎)
이명
양한규(梁漢奎)
생몰
1885년 6월 5일 ~ 1963년 2월 15일
출생지
충청도 목천현 북면 연춘리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
사망지
충청남도 천안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최병규는 1885년 6월 5일 충청도 목천현 북면(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중국 베이징에 유학하여 중국어를 수학했고, 1920년 봉천성 안동현으로 이주하여 정미소를 경영했다. 그러던 중 1922년 10월 대한독립군 총단장을 맡아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연해주 추풍으로 가서 고려혁명군 총사령관 김규식으로부터 장총 400정과 다량의 탄환을 수령하여 무장항일투쟁을 폈다.
1924년 봉천성 신빈현 사전자(砂甸子)에서 정의부(正義府) 제2소대장으로 군자금 모집에 힘썼으며, 이듬해인 1925년에는 정의부 제6부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3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된 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안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3년 2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병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4. 평강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병규


성명
최병규(崔秉圭)

주봉(朱峯)
본관
해주 최씨[2]
생몰
1909년 1월 2일 ~ 2008년 7월 26일
출생지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현 강원도 세포군)
사망지
서울특별시 신촌세브란스병원
상훈
미서훈
최병규(崔秉圭)는 1909년 1월 2일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현 세포군)에서 최승현(崔升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춘천고등보통학교에 1회로 입학하였다. 춘천고보 3학년이던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에게 애도하는 깃발인 상장(喪帳)을 달자고 제안하여 이것이 자주독립운동으로 번졌다.
이후 일경에 검거되고 퇴학을 당한 뒤 재판을 받아 10월 4일부터 3년간 고향인 고삽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하는 처분을 받았다. 3년의 근신이 끝난 뒤 처자식과 함께 만주 해림현(海林縣)[3]으로 건너가 조선인거류민단 대표를 맡기도 하였고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광복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47년 고향을 등지고 월남하였으며, 1984년 평강군민회 군지를 편찬해서 강원도 평강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대한민국 정부에서 표창장 등을 수여하려 하였지만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거부하였다고 전해진다. 2008년 7월 26일 별세한 뒤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선산에 매장되었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그의 후손이다.

[1]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광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서운부정공파 34세.[3]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海林)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