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화

 


성명
최지화(崔志化)
생몰
1884년 ~ 1950년?
출생지
평안도 안주군
(현 평안남도 안주시)
사망지
미상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최지화는 1884년생이며 평안도 안주군(현 평안남도 안주시) 출신이다. 그는 1911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했고 1917년 3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1월 평양노회의 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중퇴했다. 그는 평양 숭덕학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윤원삼, 김선두, 강규찬, 도윈권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10월 31일 상하이에서 박은식, 김구, 도인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 단결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할 것을 호소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12월 중국 안동현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안병찬을 총재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할 때 교육부장을 맡았으며, 1920년 4월 제2회 총회에서 신설된 서무부장을 맡았다.
1920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고려화동유학생연합회를 조직할 때 주요한과 함께 금릉대학 신학과 학생으로서 의사부 의사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7월 난징 금릉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12월 최남선과 함께 평양에서 교육 강연을 하였다. 1924년 6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로 재임하다가 안주노회로 옮겨 12월 제7회 안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안주서교회를 담임했다. 1930년 5월 안주중앙교회를 담임했고, 이후 평양 연화동교회를 담임했다.
1939년 9월 제28회 장로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 평의원을 맡았으며, 그해 12월 평양노회장으로서 임시노회를 소집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의 면직 처분을 결의했다. 1940년 3월 20일 자신이 시무하던 연화동 예배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 평양노회지맹을 결성하고 이사장 겸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에 선임되었고, 1941년 8월 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시체제 실천 성명서'를 결의해 발표할 때 상치위원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임되었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을 겸임했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이 주최하는 지방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2년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을 겸임했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이사장으로서 각 노회 연맹 이사장에게 교회의 종을 바친 상황을 급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6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이사장으로서 '애국기 헌납 기성회' 위원대표 정인과, 백낙준, 이용설, 오문환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 환자용 자동차 3대 기금으로 2만 3221원 28전을 헌납했다.
1942년 9월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기독교의 일본화 급무 간담회'에 감리교 박연서, 이동욱, 장로교 전필순, 정인과, 성결교 이명직 등과 함께 참석해 일본기독교단 통리 도미타로부터 기독교 각파의 통합을 권고받고 교파 통합을 논의했다.
8.15 광복 후 평양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활동하다 1950년 3월 평양신학교가 감리교 계통의 성화신학교와 병합되어 조선기독교신학교로 이름을 바꿨을 때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직후 조선기독교신학교는 폐교되고 개신교 목회자들이 체포되었는데, 그 역시 체포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일시 또는 장소, 경위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지화가 3.1 운동 전후로 안동현임시의사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지에서 활동한 공로를 고려하여 196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