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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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 운동에 참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대항하여 맞섰지만, 장기간의 투옥과 여러 차례의 고문을 겪으며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물.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주기용은 그의 사촌 형이다.'''일사각오(一死覺悟) 주기철'''[3]
2. 유년기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現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웅천군의 아전 출신인 아버지 주현성(朱炫聲)과 어머니 조재선(曺在善)[4]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주씨 집안은 머슴을 두고서 농사를 지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었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주기철(朱基徹)로 바꾸었다.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다. 호는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의미의 '소양(蘇洋)'이다.
유년기 때 교회에 다니게 된 주기철은, 누구보다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다. 웅천 개통학교(현 창원웅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5] 로 유학을 떠난 주기철은, 졸업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조선기독대학 상과에 2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그만두고 낙향하고 만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익두[6]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기로 한다.
3. 청년기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당시 지역별로 찢겨 있던 학교 분위기를 일신하고,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지만,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에는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 가결을 선포한 홍택기가 있었다.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담임한 이후 아내와 사별했고, 오정모와 재혼하고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도 경남성경학교에서 그에게 성경을 배웠다.
그는 강단에서 철저히 복음을 고수했다. ‘민족의 광복’보다 근본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주기철 목사가 조국의 광복에 무관심했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그가 '''3.1운동에 동참해 옥고를 치른 것'''을 봐도 민족의 광복을 간절히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한민족이 새롭게 거듭나야 비로소 조국의 광복이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에 가깝다.[7]
주 목사 평전의 저자는 이에 대해 “산정현교회가 무너져 가는 조선 교회의 마지막 그루터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침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신사참배 거부와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설교는 거기서 나왔다.
4. 장년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그러나...'''자, 오늘 성도들 여러분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소.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오!'''
일본 헌병
1930년대 후반 민족 말살 정책으로 가고 있었던 조선총독부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였고, 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주 목사는 못위로 걸어갔다.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자 다수의 개신교 목사 들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그냥 국가의 의식"이라면서 신사참배를 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외 목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였다.[8] 평양에 있던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당하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도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결국 그 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했지만, 일제는 결사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곧 풀어주었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히고, 풀려났다가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잦아졌다. 점점 구속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제는 주기철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라, 그러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미 결심하였고, 일제의 엄청난 고문이 이어졌다.
아내 오정모 집사의 신앙도 못지 않았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궁핍했지만, 약한 소리와 앓는 소리 대신 감옥에 있는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심지어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키려는 일환으로 남편을 면회 온 자리에서 일본제국 경찰들에게 붙들려 남편과 아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들에게 가했던 고문'''을 당했다고도 한다.[9][10] 후에, 주 목사의 입관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 비장한 얼굴로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7개월만에 석방된 주기철 목사는 다시 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연설하며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를 더욱 더 굳건히 지켰고, 이틀 뒤 일제는 다시 주 목사를 구속하였다. 온갖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기철 목사는 4월 21일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후 5시간 뒤인 밤 9시 병으로 숨을 거둔다.[11]
주기철 목사가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면서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기나긴 수감 생활과 잔혹한 고문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그의 앙상한 육신은, 목을 축이고 속을 덥혀줄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떠오르는 대목이다.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뤄졌고, 그의 유해는 1944년 4월 25일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12] 에 안장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4남 주광조 장로[13] 의 간증.
5. 기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온갖 고문 속에서도 복음으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주기철 목사는,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8년 국립묘지에 묘지가 조성되었으며,[14]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죽으면 죽으리라.'''
조용기 계열인 순복음교회에서 내던 월간 신앙계에서 2000년 20세기 개신교인으로 '한국을 빛낸 위인 20명'을 선정하면서 당연히 주기철 목사가 들어가 있었으나, 그 20명에 악명 높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활란도 넣으면서 주기철 목사에 대한 고인모독을 벌였다는 비판을 실컷 듣은 바 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아들 주광조 장로[15] 의 이야기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은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전문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저자는 유족들의 육성과 다양한 자료들을 섭렵하여 주기철 목사 부자(父子)의 삶을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특히 막내아들로서 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주광조 장로의 삶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 순교 70주년 추모예배가 2014년 4월 13일 후손인 주승중 목사가 시무하는 주안장로교회에서 거행됐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주기철 목사는 피를 흘려 신앙의 절개를 지켰지만,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회는 그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지금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도, 그의 증거자 주광조 장로도 없지만, 한국 교회가 살아있는 한 이들의 이야기는 곧 한국교회사요, 순교사이며 살아있는 믿음의 전승이므로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KBS1 방송에서 밤 10시에 '일사각오 주기철'이란 이름의 다큐를 방영했다. 스미요시 겐이 아버지 에이지 목사가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았던 이유인 '''주기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여정이 주 내용.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위치한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함께 소개되었다. 2016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특집방송으로 재방송되었으며, 추가로 해당 다큐멘터리가 2016년 3월 17일에 영화화되어 개봉되었다.
그의 손자로는 주원 흥국증권 사장이 있다.
[1] 웅천파. 신안 주씨 30세.[2] 신안 주씨 집성촌이다. 주기용 제헌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한번 죽기를 각오한다는 의미이다.[4] 신안주씨대동보 2권 1465쪽의 주현성 항목에는 경주 이씨 이기영(李基榮)의 딸만이 부인으로 기재되어 있다.[5]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 남북 분단 이후 남쪽으로 이주,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다.[6] 이름난 깡패 출신이었고, 교회에서 회개했다고 한다.[7] 이는 도산 안창호의 민족개조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역시 개신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8]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알려진 손양원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세운 한경직 역시 이 축에 있었는데, 얼마 안 가 굴복하고 만다. 비록 전 조선인이 신사참배를 했고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계도 신사참배를 했지만, 먼 훗날 한 목사는 이에 대해 반성하며 사죄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9]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의 증언.[10] 이 충격으로 인해 주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한동안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11] 같이 수감되었던 안이숙 여사의 말로는, 일본제국 경찰이 주사를 놔서 주기철 목사를 살해했다고 한다.[12] 이태석 목사,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이현속 장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교하여 안장된 곳이다.[13] 2011년 6월 29일 소천.[14] 실제 유해가 안장된 것은 아니고, 성경을 포함한 유류품이 안장되어 있다.[15] 다섯 중 막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