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11호

'''112호'''

113호
김제 벽골제
'''아산 이충무공묘'''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image]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12호'''
'''아산 이충무공묘'''
牙山 李忠武公墓
[ 펼치기 · 접기 ]
'''소재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순절지
'''수량/면적'''
9,600㎡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광해군 6년(1614)
'''위치'''



1. 개요


忠武公 李舜臣 將軍墓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조선의 명장이자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안장된 묘소.
사적 제112호 '''아산 이충무공 묘'''(牙山 李忠武公墓)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1598년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투 도중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노량해전의 전장이던 남해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순신 재직 시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해 말(대략 음력으로 12월 즈음)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고향인 아산[1]으로 운구하여 이듬해인 1599년 2월에 인근인 금성산(음봉면 산정리)에 모셔졌다가, 이순신이 선무공신 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된 이후인 1614년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정조 때인 1794년,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어제 신도비를 하사하였고[2], 해방 이후인 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3. 상세


[image]
묘소는 둥근 봉분으로 되어 있으며, 이순신 장군과 부인 성주 방씨와의 합장묘로 되어 있다.
묘비와 상석, 망주석 등이 있는데, 묘비의 경우, 숙종 때 정승을 지낸 이이명이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며, 위에 상술된 정조 어제 신도비가 봉분 우측 앞에 비각 안에 있으며, 묘소 입구 쪽에는 순국 400주년인 1998년 충무공파 후손들이 새로 세운 묘비가 세워져 있다. 1998년에 후손들이 세운 묘비의 글씨는 강영훈국무총리가 쓴 것이다.

4. 여담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면서 영정을 모신 현충사[3]와는 같은 아산에 있으면서도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편[4]이라 만약 묘소를 참배하려면, 이 곳으로 가야한다. 다만, 2020년 현재는 묘소 일대의 종합정비사업으로 인해 관람이 1년 동안 제한된다고 하니, 내년 이후에 관람하길 권한다. 물론, 입구의 신도비는 볼 수 있다.
현충사와 함께,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봄에는 근처에 자리한 위토에 모내기를 해 가을에 수확하는데, 이 위토는 과거 충무공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은행에 저당 잡혀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였으나, 1931년 5월 13일 자 일간지에 '2천 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면서 그 어려움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 다음 날부터 위토를 구하기 위한 성금이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되어 불과 1개월 만에 빚 2,272원 22전을 모두 갚았고, 1년여 동안 모인 총 1만 6,021원 30전의 성금 중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는 현충사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한편 충무공과 동명이인으로 알려진 무의공 이순신의 묘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광명역 인근에 있다.

5. 바깥고리



6. 사적 제112호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무덤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직책을 거쳤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사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노량·당포·한산도 등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을 맞고 숨졌으나, 사실을 숨기고 조카인 완이 대신 지휘하여 왜적은 큰 피해를 입고 도망을 갔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망주석 1쌍·석상 1쌍·문인석 1쌍·광명등·묘비석이 있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와 비각이 있다.

※(이충무공묘 → 아산 이충무공묘)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본래 이순신이 태어난 곳은 잘 아시다시피 서울 한복판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곳으로 안장하려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도성 안과 그 주변(성저십리)에는 왕릉도 조성할 수 없는데...[2] 물론 그 이전에 신도비를 받기는 하였다. 묘소에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비석 두 기 중에 비각이 있는 비로서 1693년에 세워진 것이며, 글씨는 김육이 쓴 것이다. 그 옆의 비는 5대손 이봉상의 신도비이며, 정조가 친히 지은 신도비는 봉분 안쪽 우측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3] 물론 현충사 경내에도 묘소들이 있는데,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과 후손들의 묘 일부가 모셔져 있으며, 삼거리의 이충무공 묘소 옆에도 부모와 형제, 일부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4] 현충사는 염치읍 백암리, 묘소는 음봉면 삼거리에 위치하는데, 두 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대중교통은 없으며, 45번 국도 경유하는 거리가 약 8km에 이른다. 다만, 대중교통도 온양민속박물관 앞에서 환승이 가능하지만, 묘소 앞 까지 다다르는 버스는 아산 버스 503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