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시호)

 


1. 개요
2. 상세
3. 사례
3.1. 한국
3.2. 중국


1. 개요


'''충무(忠武)'''는 충성 충(忠) 자와 호반[1] 무(武) 자로 이루어진 시호이다. 주로 무인으로서 공을 세운 이들이 받았다. 추존된 작위에 따라 충무공(忠武公), 충무후(忠武侯) 등으로 부른다.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아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바로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시호이므로 무인이 받을 수 있는 시호로서는 최고의 선시(善諡). 문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급의 시호는 충문, 문충과 문성공 정도가 있다.


2. 상세


''''''
''''''
'''危身奉上(위신봉상)'''
일신이 위태로운 와중에 임금을 받듦.
'''克定禍亂(극정화란)'''
화란을 능히 평정함.
'''慮國忘家(여국망가)'''
나랏일을 근심하여 집을 잊음.


'''危身利國(위신리국)'''
일신이 위태로운 와중에 나라를 이롭게 함.


'''廉方公正(염방공정)'''
청렴하고 바르고 공정하며 올바름.


'''事君盡節(사군진절)'''
군주를 섬김에 충절을 다함.


'''臨亂不忘國(임난불망국)'''
난리(亂離), 난세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음.


'''推賢盡忠(추현진충)'''
어진 이를 받들고 성심을 다함.


'''殺身報國(살신보국)'''
목숨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함.


'''死衛社稷(사위사직)'''
죽음으로 사직을 지킴.


'''以孝事君(이효사군)'''
효로 임금을 섬김.


'''推能盡忠(추능진충)'''
능력 있는 사람을 받들고 충성을 다함.


'''敎人以善(교인이선)'''
남을 선으로써 가르침.


'''臨患不忘國(임환불망국)'''
환란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음.


'''廉方公平(염방공평)'''
청렴하며 바르고 공정하고 공평함.



3. 사례



3.1. 한국


과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리는 시호인 충무(忠武)를 받은 사람들을 높여 이르는 말. 조선에는 이 시호를 받아 충무공으로 불리는 사람이 총 9명이다. 인지도 순으로 따지면 이순신-김시민-남이-그 외 기타다.
조선에선는 삼망(三望)이라하여 관리를 임명할 때 이조와 병조에서 적임자 3명의 명단을 적어 왕에게 추천하던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시호 제정 등에 중요 안건에도 사용되었다. 이순신을 예로 들면 당시 시호가 내려질 때 선정되었던 세 시호는 각각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이었다. 시법에 따라 세 시호의 뜻을 풀어보면 '일신의 위험을 마다않고 임금을 받들어'(忠), '적의 창끝을 꺾어 나라를 구했으며'(武), '적을 무찔러 전란을 평정하였고'(壯), '덕을 펼쳐 의를 지켰다'(穆)가 된다. 시호를 정할 때는 이렇게 각 글자에 의미를 정해 놓고 이를 조합하여 만들었다.[2] 또한 조선에서는 초기 이후로 작위를 쓰지 않아 시호를 받으면 전부 공(公)으로 통칭하였다.
조일전쟁이라는 불쏘시개에서는 이순신 말고 김시민 역시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장수인데 왜 이순신 한 명만 충무공으로 여기고 김시민은 칭송을 안 해주냐고 썼다. 거기까지였으면 괜찮은데, 문제는 "충무공은 이순신과 김시민 두 명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3] 참고로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매우 많은데, 이순신의 시호는 선조가 아니라 인조 때인 1643년에 붙여진 시호다.
충무공이 여러 명이므로 시호 뒤에는 이름을 붙여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의 관습상 '충무공'이라 하면 가장 유명한 이순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3.2. 중국


시호 자체가 중국에서 유래한 만큼 중국에서도 상시로 쓰였는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촉한의 충무후 제갈량남송의 명장 악비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작위 제도를 유지했기에 받은 작위에 따라 공(公)과 후(侯) 등으로 따로 칭했다. 제갈량을 제갈무후, 혹은 그냥 무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시호에서 비롯한 호칭이다.
[1] 무인(武人), 무반(武班). 어째서 호반이라고 부르는지는 피휘 문서 고려 문단 참조.[2] 앞에 언급된 각 자를 조합하면 충무-충장-장목-무목이 나온다. 충무는 이 문서에 언급되었고, 충장은 권율이 받았으며, 장목은 관우에게 내려졌던 시호이고, 무목은 악비가 받았던 시호다. 하나같이 격이 높은 상시다.[3] 물론 9명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조선 멸망까지 전부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고 임진왜란 시기에 한정짓는다면 맞는 얘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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