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야마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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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무츠오의 사진. 단 범행당시 복장은 실제 사진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후에 복장만 재현해서 찍은 사진이다.
1. 개요
津山事件
1938년,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일어난 대량살인 사건. 츠야마 사건, 혹은 츠야마 30인 살인사건(津山三十人殺し)등으로 불린다. 일본판 우순경 사건의 자세한 경과에 대해서는 참조.
통칭 츠야마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정확하게는 당시에는 츠야마시 외곽의 니시카모 마을이었다. 오늘날에는 츠야마시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다.
2. 결핵과 여자에 대한 증오
츠야마 살인사건의 범인 도이 무츠오(21, 이하 도이)는 요바이 풍습으로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징병신체검사에서 탈락하면서 폐병(폐결핵)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져 요바이를 거부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좌절감이 범행의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도이는 징병신체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그 마을에서 상당히 잘나가던 남자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성적도 괜찮았고,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쓴 동화 같은 걸 읽어주어서 인기가 있었다. 또 근방의 여자들 하고도 이런저런 관계를 가질 만큼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꽤나 있었던 것 같았지만...
1937년 그는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검사결과는 결핵으로 인한 병종(丙種)합격. 말이 합격이지 '입영부적격, 민병소집가능'이라는 실질적으로 불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병역제도로 치면 '면제'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면제처럼 간주되는 제2국민역과 비슷한 개념.[1] 그리고 당시에는 전시체제라는 특수상황이기도 해서 사회적으로 갑종(甲種)합격자[2] 를 추켜세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당시 결핵은 2020년의 코로나처럼 변변한 치료약도 없어서 가족이더라도 환자가 나온다면 전염을 우려해 외면할 정도였다. 그런데 도이의 경우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남자였을 텐데 결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여러 사회적 관계가 파탄난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3]
사건 70주년이 된 2008년에 일본의 한 시사프로의 취재에 의하면, 도이는 본래 마을의 한 여성과 약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었지만, 도이의 폐결핵 때문에 그 여성은 다른 마을의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고, 이것을 사건의 원인으로 짚기도 했다.[4]
어쨌든 자신을 따르던 여성들이 자신을 하나둘 피하자 도이는 여자들에 대한 증오가 싹텄다. 그리고 그 증오는 점점 커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까지 다다랐다. 수렵 면허를 취득한 뒤 수렵용 총기를 사들여 총기 연습을 하여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런 가운데 그의 할머니는 도이가 할머니의 치료를 위해서 미소국에 약을 타는 모습을 보고, "손자가 나를 독살하려 한다"라고 경찰에 알리는 바람에(...) 가택수색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지고 있던 일본도와 총 같은 무기들이 압수되었고, 수렵면허마저 취소된다. 하지만 도이는 지인을 통해 다시 엽총과 탄환을 구입하고, 도검류 수집가에게 일본도를 몰래 사들이는 등 다시 무기를 모으고 범행을 저지를 날을 기다렸다.
3. 끔찍한 범행
결국 1938년 5월 21일, 도이는 일본도와 비수, 도끼, 개조한 9연발 브라우닝 엽총[5] 을 들고 범행을 시작했다. 우선 오전 1시 40분경 다락방에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있는 난로 옆에서 푹 자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 요네(76)의 목을 도끼로 절단하여 살해했으며''', 북쪽 이웃이었던 5인 가족 키시모토 카츠유키네 집을 찾아갔다.[6] 시골이라 문단속을 하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몇차례 요바이 경험으로 집 구조를 모두 알고 있던 도이는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도이는 엽총을 사용하여 살해를 하려 했으나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그는 일본도를 꺼내어 자고 있던 츠키요의 목과 가슴을 찔러 살해한다.[7]
이후 '''살해당한 어머니 옆에서 자고 있던 남동생 요시오(14)와 마모루(11)를 일본도로 베어 살해한다.''' 당시 여동생이었던 미사(19)는 일 때문에 다른 곳에 묵고 있어 당장은 참변을 모면했으나, '''도이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다음, 도이는 니시다 슈지의 집으로 찾아간다. 당시 4명이 곤히 자고 있었는데, 역시나 문을 잠그는 습관은 들여있지 않았다. 쉽게 집으로 들어간 도이는 방에서 자고 있는 토메(43)의 목에 엽총을 대고 쏴 즉사시킨다.[8] 그 옆방에선 3명이 자고 있었다. 장녀 오토모 요시코(22), 주인 슈지(50), 아내의 여동생 치즈코(22)였는데, 요시코는 도이와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나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토메가 감기를 앓아 아파하는 것을 간병해주기 위해 치즈코와 요시코가 와 있었고, '''도이는 그 사실을 알고 그 날을 학살일로 정했다.''' 난로 옆에서 자던 세 사람은 토메가 죽을 때 난 엽총 소리를 듣고 깼는데 얼마 안 가 모두 엽총을 맞고 사망했다.
다음은 키시모토 타카시의 집이었다. 이 역시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4인 가족이었으며, 앞문으로 침입한 도이는 한 이불속에 잠들어 있던 주인 타카시(22), '''임신 6개월이던 아내 니시다 토모에(20)를 엽총으로 사살했다.''' 여담으로, 토모에는 전에 살해당한 토메의 둘째 딸이었다. 이에 잠에서 깬 조카 테라나카 타케오(18)가 달려들었지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고 엽총으로 살해했다. 그 이후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던 모친 타마(70)의 앞에서 "당신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지만 니시다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기 때문에 '''죽일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 후 타마에게 총신을 겨눴다. 타마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결국 도이는 총을 쏘고 다른 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타마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큰 치명상을 입지 않은 덕분인데, ''젊은 사람이 죽고 나 혼자 살았다. 신도 부처도 없단 말인가''라며 슬퍼했다.
다음 희생자네 가족은 6인 가족으로, 테라카와 마사이치(60)의 집이었다. 이미 다른 집에서 울려퍼지는 총성에 가족 모두 깨어 있었으나, 문단속은 하지 않았고, 현관으로 들어온 도이는 무슨 일인가 하며 나온 마사이치를 엽총으로 살해한다. 이어서 놀라서 창문으로 나온 장남 테이이치(19)를 쏴 죽이고, 복도의 덧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려는 토키(15)를 쏴 죽였다. 이어서 하나(12)역시 엽총으로 살해하며, 이어서 발각된 며느리 노기 세츠코(22)는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가 엽총으로 살해했다. 세츠코와 테이이치는 불과 6일 전에 결혼했으나. 이렇게 끔찍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이가 이 집에 온 중요한 목적인 유리코(22)는 살아남아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고, 도이는 그녀를 찾아 나선다. 평소 유리코와 도이는 깊은 사이로, 어느 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도이의 분노를 샀다. 그렇게 분노한 도이는 계속 집으로 찾아가고, 결국 남자와 유리코는 이혼한다. 그 사이를 틈타 도이는 자신과 유리코 간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끝내 유리코는 다른 남자와 재혼한다. 마침 유리코는 3일 전부터 마사이치네 집에 와 있었고, 이 날을 학살날로 정한 것도 이 이유가 굉장히 컸다. 유리코는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와 도주했고, 도이가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유리코는 경상을 입는데 그쳤다.
도이는 유리코가 도망친 것을 눈치채고 바로 뒤쫓았다. 그리고 유리코는 테라카와 모키치(45)의 집으로 뛰어가 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유리코를 들인 후 앞문을 잠갔다. '''그리고 그 선택은 모키치네 가족을 6번째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5인 가족이 살고 있던 그 집에 유리코가 들어간 것을 본 도이는 문을 열라며 고함치며 문을 두드렸다. 별채에 있던 코시로(86)가 덧문을 열자 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엽총으로 쏴 죽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있던 유리코와 주인 모키치, 아내 노부코(41), 차남 신지(17)는 모든 문을 꼭 닫고 안에 숨어 있었다. 도이는 총을 마구 쏘며 문을 두드렸다. 모키치는 이대로는 모두 죽는다고 판단하여 신지를 테라카와 모토카즈의 집으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도록 했다. 신지는 옆문으로 나와 대나무숲으로 뛰어들었으나 '''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도이는 곧바로 그를 쫓았고, 그걸 눈치챈 신지는 몸을 숨겨 도이를 따돌렸고, 신지를 놓진 도이는 다시 문 앞으로 와 신지를 잡은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이 새끼 쏴버리겠어"라고 위협한다. 노부코는 신지가 잡힌 것으로 속고 울며 모키치에게 매달렸다. 유리코도 자기 때문에 아무 죄 없는 가족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며 죄책감으로 울기 시작했다. 모키치는 몰래 뒷문으로 다가가 틈새로 문 뒤의 모습을 봤다. 문 앞에는 도이가 지키고 서 있었으나 신지는 보이지 않았고, 신지가 도망쳤다는 것을 눈치챈 모키치는 안심한다. 그러나 도이는 "문 열지 않으면 쏴 죽이겠어"라고 호통치며 집을 향해 총알 두 발을 발사한다. 이 중에 한 발이 유키코(21)의 대퇴부에 명중하여 경상을 입히고 만다. 이쯤 되자 계속되는 비명소리와 소음, 총성으로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잠에서 깨 수근수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이 참혹한 드라마의 반을 왔을 뿐이다.'''
7번째 희생양의 집은 언덕 위에 있던 테라카와 코지의 집으로, 모친 토요(45)와 아들 코지(21) 2명이 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곳 역시 문을 잠그는 습관이 없어 문은 열려 있었다. 도이는 돈을 주고 토요와 성관계를 가졌지만 그녀가 니시다 요시코, 테라카와 유리코의 중매를 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곤히 잠자고 있던 두 명은 이불을 덮은 채로 엽총에 맞아 사망한다.
자신의 집 남쪽으로 이동한 도이는 테라카와 센키치(85)의 집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가족을 비롯한 6명과 양잠 일을 하던 2명, 총 8명이 지내고 있었는데. 도이는 이 집과 원한이 없었으나 예전에 자신과 정교를 거절한 단게 우이치의 여동생 츠루요(21)와 키시모토 카츠유키의 여동생 미사(19) 가 양잠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둘 다 엽총으로 살해했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다른 한 명인 장남 아사이치(64)의 아내 히라지 토라(65)는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총알 두 발을 맞고 비참하게 살해된다. 양잠실을 뛰쳐나온 도이는 안방 툇마루의 덧문을 열고 들어가 난로 앞에 앉아 있던 센키치와 마추친다. 센키치는 도이의 존재를 알았으나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고, 차분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도이는 "노인이라도 가만 두지 않겠어"라고 말하며 그의 목에 총구를 겨눴으나 이후 다시 생각한 듯 "...아냐. 당신은 내 욕을 하지 않았으니 봐주겠어. 죽으면 내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키키."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도이는 안쪽 창고로 갔다. 이곳에선 아사이치가 이불 속에서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아사이치는 도이와 센키치와의 대화를 다 들었기 때문에 자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는 척을 했다. 도이는 세 개의 전등을 비추며 이불과 배게를 걷어냈다. 아사이치가 놀라 일어나려 하자. 가슴을 총으로 밀며 "이사오 부부는 도망친 모양이군. 움직이면 공격할 거야. 조용히 일어나."라고 말하며 조준한 채 그를 위협했다. 아사이치는 도이를 바라보며 두 손을 싹싹 빌며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도이가 "그렇게 목숨이 아까운가"라고 조롱하자 아사이치는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도이는 이내 "좋아, 살려주지."라며 센키치 집을 나선다. 당시 센키치의 아내 테라카와 치요(80)는 마루 밑에 숨어있었고, 손자 테라카와 이사오(41)와 그의 아내 테라카와 키이(38)은 떨며 2층에 숨어 있었다.
단게 우이치(28)의 집으로 향한 도이는 단게 집의 양잠실으로 향해 보온용 화로의 불을 보고 있던 단게의 어머니 이토(47)에게 "네 딸 츠루요는 이미 죽었고, 이젠 니 차례야"라며 엽총을 쏴 중상을 입히기에 이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토는 살아있었으나 6시간 후 병원에서 사망한다.[9] 우이치는 안방에서 자다가 총성을 듣고 깨어나 재빨리 탈출해 큰 화는 면했다. 우이치는 한때 유리코와 부부 관계였기 때문에 도이의 표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우이치는 재빨리 니시카모의 파출소로 찾아가 순경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파출소에 아무도 없자 카모쵸 파출소로 달려가 숨을 헐떡이며 사건의 발생을 알렸다. 약 3km의 논두렁을 달리다가 자전거를 빌려 20분만에 갔다. 이때가 오전 2시 40분경으로, 그는 순경에게 "순경 아저씨, 큰일 났소, 살인이오!"라고 알렸고, 이에 잠에서 깬 이마다 타케오 순경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경은 우이치에게 "도이 그놈 짓이오?"라고 물었다. 평소 도이의 동정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이마다 순경은 곧바로 전화로 츠야마 경찰서 숙직 키타무라 부경감에게 보고한다. 이웃 히가시카모마을 파출소의 요네자와 순경에게도 연락하고, 만일의 경우 철도 전화를 빌려 더 이상의 사태 발생을 막기 위해 마을의 종을 두들길 것을 아내 등에게 부탁한 후 우이치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한 편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도이는 어느새 10번째 표적을 정한 상태였다. 이케야마 스에오(37)의 집으로, 8인 가족이었으나 수학여행 중이었던 장남 요우(15)를 제외한 7명이 자고 있었다. 도이가 이곳을 습격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는 스에오가 테라카와 미츠코(35)의 오빠였기 때문이었다. 도이는 미츠코와 관계가 있었는데, 도이가 폐결핵에 걸린 걸 알자 변심했다. 스에오는 덧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그와 동시에 도이가 스에오를 발견하고 총을 난사했으나 대나무 숲으로 몸을 숨겨 살 수 있었다. 스에오를 놓친 도이는 집으로 들어가 아내인 미야(34)를 살해했다. 테라카와 마츠코 일가는 위험을 느끼고 3일 전 네 명의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교토로 이사갔다. 이때 아까 죽은 니시다 토메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으나 "날 죽일 만큼 미워하진 않을 거야"라며 거절했고. '''그의 예상은 빗나가 살해당했다.'''
도이는 이어서 아키오'''(5)'''와 모친 츠루(72)를 엽총으로 살해하고 도망치려 하던 부친 가츠이치(74)마저 사살한다. 차남 쇼우(12)와 쇼조(9)는 도이의 눈에 띄지 않아 무사히 살 수 있었다.
11번째 집은 마을 제일의 부자였던 테라카와 쿠라이치(61)의 집이었다. 세 명이 살고 있었으며, 도이가 비탈을 오르던 도중 가슴에 있던 전등이 떨어지자 쿠라이치가 "있냐"라고 고함치며 정문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아내 하마(56)가 무슨 일인가 하며 앞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전등 두 개가 보이는데~"라고 쿠라이치와 장남 스구루(28)를 돌아보며 외치는 순간 도이가 엽총에 불을 붙였다. 하마의 오른손은 엽총에 맞았으나 꾹 참고 덧문을 닫은 후 쿠라이치와 필사적으로 도이의 침입을 막았다. 도이는 닫히는 문을 향해 5발을 연사했고 결국 그 두 사람도 살해당하고 말았다.
4. 결말
1시간 30분에 걸친 범행 뒤, 도이는 뭔가 생각난 게 있었는지 인근 마을의 집에 무작정 들어가서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요구했다. 집주인은 무장을 하고 피범벅이 된 도이를 보고 얼어버려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집주인의 아이가 도이로부터 동화를 들은 적이 있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집주인 대신 아이가 연필과 종이를 도이에게 주었다고 한다. 도이는 이때 만큼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무언가를 종이에 적은 뒤 곧장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아이에게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도이는 마을에서 3.5km 떨어진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유서를 썼다. 유서에는 애당초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가 그와 교제하다가 다른 마을로 시집간 여자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걸 보고 범행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한 것 같지만, 여자는 놓쳤고 애꿎은 가족들만 살해했다. 또한 자신을 괴롭힌 마을 사람을 죽이려 했지만, 이사를 가거나 출타한 탓에 엉뚱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책하는 내용도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선, "살인자의 할머니로 살아가게 할 수 없어서"라고 적었다.
이러한 내용의 유서를 쓴 도이는 엽총을 가슴에 갖다댔고, 방아쇠를 당겨 심장을 쏴 자살했다. 그의 시체는 이튿날 아침에 발견됐다.
5. 후일담
- 사건을 조사한 결과, 도이는 상당히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에서 일이 일어날 경우, 자전거로 이웃마을 카모쵸에 있는 주재소(駐在所)[10] 까지 얼마나 걸리는가를 조사해둘 정도였고, 사건 전날에는 몰래 마을을 정전시켜서 범행을 더 용이하게 만들려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 워낙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일본에서는 중일전쟁 중이었음에도 큰 이슈가 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경찰이 너무 안이하게 위험한 인물을 내버려둔 게 아닌가라고 비판하기도 했고, 혹은 이 사건이 1913년에 독일에서 일어난 바그너 사건과 흡사해서, 도이를 의학적으로 연구했어야 했지 않나라는 아쉬움 비슷한 의견도 있었다.
- 마을 주민들에겐 그야말로 악몽 같은 날이었다. 더군다나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던 마을이었는데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일손들이 크게 줄어서 형편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더욱이 도이의 친척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 이지메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 도이가 자살해버린 탓에 사건에 대해서는 생존자들의 증언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대부분 사망자들의 친척이거나 지인들이었던 탓에, 객관적 증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기는 하다. 특히 도이와 관계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은 극구 그런 사실들을 부인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징병검사에서 불합격한 도이를 마을 주민들이 괴롭히거나 놀린 것이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11]
- 70년 후인 2008년, 주간 아사히에 90대가 된 익명의 생존자의 증언이 소개되었다. 그에 의하면 마을이 정전된 뒤, 도이는 청년들과 함께 자기 집 뒤편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다만 그는 도이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의 부인도 도이와 사귄 듯해보여서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달렸다.
- 스기자와 마을의 전설이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아 생긴 도시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신영명이십팔중구에 이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논픽션 소설로 "오밤중의 마을(丑三つの村)"이 있다. 니시무라 노조미가 1981년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한 소설이다. 1983년에 다나카 노부루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후루오야 마사토가 토이 무츠오 역을 맡았다. 영화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잔인하고 성적 묘사도 있어서 개봉 당시 R-18 등급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에 DVD가 출시되었을 때는 R-15 등급으로 낮아졌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팔묘촌을 집필했다.
시마다 소지의 소설 용와정 살인사건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적당한 상상을 가미해서 당시의 상황을 매우 공들여서 재구성해 놓았다.
사이렌에서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듯한 "xx마을 33인 살인사건"이 등장한다[스포일러] .
그 밖에 이 사건에서 파생된 걸로 보이는 도시전설 스기자와 마을 이야기도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사건을 다뤘는데, 여기서도 결핵으로 인해 외면을 당해 이러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의견으로 방송을 했었다.
만화 골든 카무이에서 이 범인을 모티브로 한 '츠야마'라는 죄수가 언급된다. 33인을 살해했고 제7사단 병사도 3명이나 죽일 정도의 난적이었지만 츠루미 중위에게 죽고 가죽이 벗겨진다.
7. 관련 문서
[1] 의외로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징병기피가 잦았다. 징병대상자가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경찰이나 헌병이 마을로 직접 잡으러 왔는데, 그때마다 주민들이 대상자들을 산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남들은 가기 싫어도 끌려가는 곳을 자신은 가고 싶어도 국가에서 거부당했던 데서 오는 절망감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범행시의 복장이 군복을 흉내낸 듯한 복장을 하고 있다.[2] 대한민국 병역제도로 치면 '현역입대'에 해당[3] 요양원에서는 매년 결핵이 완치된 사람을 추리는 퇴원 심사를 하지만 낫는 사람이 드물었고 이 심사에 떨어지면 절망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4] 도이는 이 여자를 죽이려고 쫓아다녔고, 이 여성이 구원을 청하려고 마을 이집 저집을 다녔던 것이 결과적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는 참극으로 연결되었다고. 그러나 도이는 정작 이 여성은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5] 아마 Auto-5로 추정된다[6] 당시 카츠유키는 군대를 가고 집에 없었고 4명만 있었다.[7] 이 집을 최초 범행구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카츠유키의 모친 츠키요(50)와 성관계를 몇 차례 가졌으나 최근 거절당한데다, 마을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진지라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8] 도이는 이 집에 안주인인 토메와 성관계를 몇 번 했었는데, 토메는 "몇 번이나 그가 덤벼든 것을 내가 거절했다"라고 이웃 주민들에게 말했다고.[9] 이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여동생 츠루요(21)은 센키치의 양잠실에서 이미 사망했다.[10] 외곽에 있어 순사 1인과 그 가족이 거주하며 사무를 맡아보던 경찰의 말단 기관. 현재의 지구대나 파출소와는 다르다.[11] 당시 군국주의가 만연한 일본의 현실에서, 징병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자격이 없는 걸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일본이 1930년대 태평양 전쟁을 터뜨린 이후에는 군에 가지 못한 남자를 비하하는 말로, 비국민(非國民), 즉 넌 황국신민의 자격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비국민을 보는 시각이 부락민과 비슷할 정도. 다만 이건 도시나 그 인접한 지역의 이야기이고, 도시와 먼 지역으로 갈수록 군국주의의 프로파간다가 약해지는데, 메이지 정부 성립 이후 벌어진 각종 강압적인 개혁정책으로, 농촌지역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는데다가, 농부들 입장에서는 마을 전체가 굶지 않기 위해, 농사를 지을 젊은 일손 1명이 절실했지, 징병의 명분에는 공감하지 못했다.[스포일러] 1976년, 시무라 코우이치라는 청년이 그 당시의 카지로 미야코와 눈이 맞아 바다맞이가 시작되기 직전에 그녀와 마을을 탈출하려 했으나 산사태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고, 제사가 실패하여 시인이 된 마을 주민 33명을 죽인 후 자신도 시인이 될 위기에 처하자 관에 들어가 미야코에게 자기 가슴에 말뚝을 박아 자신을 봉인하게 만들었다. 이후 시인화된 시무라 코우이치를 미야타 시로우의 시나리오에서 볼 수 있는데, 영안실에 가 보면 관 속에서 온몸에 비닐을 두른 채 가슴에 말뚝이 박혀 꿈틀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