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정산

 

1. 개요
2. 내용
3. 의의
4. 기타


1. 개요


七政算. 1444년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다.[1]
조선 세종대왕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정인지가 만들었다. 칠요(七曜: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라 하여 칠정산이라 이름하였다.

역법에 더 아쉬움이 없다 하겠다(曆法可謂無遺恨矣) - 세종실록 156권


2.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칠정산내외편 원문
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칠정산내외편 해제
[2]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부터 조선이 들어설 때까지 중국에서 만든 역서를 수입해서 사용하였다.[3][4] 이에 세종대왕이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라고 지시, 국내에서 대간의, 소간의 등 천문기구들을 제작하여 수도 한양백두산강화도 마니산한라산 등 주요지점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각지의 북극고도를 측정하고, 별을 관측하여 일식월식이 일어나는 시간과 오성 운행시간을 알아내는 노력을 기울여 처음으로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이후 명나라 원통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원나라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통궤의 신기술을 적용하여 세종 24년(1442) 정인지정흠지, 정초 등이 칠정산을 만들고 세종 26년(1444)에 칠정산'''내편'''을 편찬했다. 또한 이순지와 김담 등이 (정확한 편찬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라비아의 역법인 회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하여 칠정산'''외편'''을 편찬했다.

3. 의의


한반도에 정확하게 맞춘 역법으로 우리나라 내에서의 일식ㆍ월식 등 천문현상을 실제에 가깝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칠정산으로 구한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는 39.13각(刻)인데, 기존에 사용하던 중국 역법으로 구한 연경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38.14각으로 약 1각이 차이나는데, 당시 역서에서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었으므로, 현대의 시간체계로 비교하면 1각은 약 14분 24초쯤 된다. 한양은 북경보다 위도가 낮으므로 동짓날 낮의 길이가 연경보다 길어야 한다. 2018년 기준으로 동짓날 서울과 베이징의 낮의 길이를 계산하면, 서울은 9시간 20분, 베이징은 9시간 33분으로 거의 14분에 가깝다. 또한 39.13각이란 값도 현대의 계산과 비교하여 겨우 3분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칠정산으로 계산한 값이 한양의 실제 값과 거의 같다.
정묘년교식가령(丁卯年交食假令)에서는 칠정산을 이용해 세종 29년(1447)에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식을 미리 예고했는데 확인 결과 동일한 상황 하에서 인공위성을 통한 현대의 기술로 계산한 값과 1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중국은 아라비아 역법인 회회력 자체는 우리나라보다 일찍 들어왔지만 1444년에 이미 칠정산에 적용해 사용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70년 뒤에야 패림(貝林)이 계산법을 발견하여 겨우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세종은 칠정산을 편찬할 때 기존 회회력에는 없던 태양최고행도와 일중행도표 등을 추가하여 편찬했다. 때문에 근래 중국 천문학자들은 조선의 칠정산외편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중 독축관(讀祝官) 박안기에게 칠정산 계산법을 전수받고 이것을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일본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였다.
칠정산을 통해 계산한 1년은 실제 지구 공전일과의 오차가 '''-1초'''밖에 안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레고리력보다도 오차가 작다!

4. 기타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관측함은 천자만의 특권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임금으로서 정당성을 부여받고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면 외교 문제가 야기 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연합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선조는 독자적으로 칠정산을 사용함이 들킬까 봐 매우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제후국에 두 가지 역서가 있으니 매우 떳떳치 못한 일이다. 대국을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라며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함을 금지했다.[5] 그러나 효종 4년(1653)에 이 금지를 냅다 풀고,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하던 시헌력을 조선 기준에 맞추어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육십갑자의 원년 즉, 갑자년이 칠정산 편찬 년도부터 시작한다.

[1] 사서에 고려시대에 십정력(十精曆), 칠요력(七曜曆), 견행력(見行曆), 둔갑력(遁甲曆), 태일력(太一曆)과 같은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저 이름만 남아있을 뿐 칠정산처럼 체계가 남아있는게 아니라서 실제로 사용되었는지는 여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최초의 역법은 칠정산으로 친다.[2] 다만 무슨 이유인지 알수 없지만 이부분은 국역이 없다.[3] 삼국시대에는 당의 선명력, 고려 충선왕 때 원의 수시력, 조선 초 명의 대통력.[4] 역법을 만들 기술력 부족도 있지만 오직 천자만 하늘을 주관할수 있다는 중화주의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했다.[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명은 조선의 칠정산에 대해서 먼저 외교적 압박을 가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명이 칠정산과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에 대해서 명이 공식적으로 압력을 가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