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가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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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칼가강 전투의 배경
3. 양군의 전력
4. 칼가강 전투 전개
4.1. 전초전
4.2. 전면전
5. 칼가강 전투 결과 및 영향


1. 개요


칼카 강 전투. 1223년 벌어진 몽골 제국 최초의 유럽 땅 침공이자, 이후 러시아 지배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다. 당시 러시아 공국 연합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의 정면타격도 받아내지 못할만큼의 무력함을 드러내며 패배하고 마는데, 덕분에 이후 러시아 공국들은 연합하여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자기 영지에서 자국을 온존할 생각에만 전념하다가 시간이 지나 몽골군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모두 각개격파당했다.
흠좀무한 것은 이때 몽골군은 딱히 러시아 지역을 공격하려던 의도가 없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호라즘 왕국 술탄 추격전을 벌인 다음 카스피해 건너편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쪽으로 빙 돌아 귀환하던 도중에 러시아 공국 연합군이 먼저 선빵을 걸어 일어난 전투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숫자도 러시아군이 훨씬 많았다.

2. 칼가강 전투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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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왕국과 그 주변 지역 지도. 몽골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짚어보자. 물론 러시아군과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더 북쪽이다.)
1219년 칭기스칸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호라즘 왕국의 중심지인 사마르칸트부하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를 공략한 후, 도주하는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를 추격하기 위해 장군 제베수부타이에게 두개 만인대를 맡겨 파견한다. 이들은 술탄이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추격 끝에 1221년 1월 카스피해 서쪽까지 기동했고, 이때 몽골군은 이미 무함마드 2세가 카스피해 안의 섬에서 작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두 장군은 칭기스 칸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물었고,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둘은 이 일대에 주둔하면서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캅카스 일대의 조지아 왕국을 갈아버렸다.(...) 물론 캅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역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지역에서 잘나가던 조지아 왕국이 몽골군과의 대결에서 한방에 반쯤 갈려나가는 걸 목격한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토후국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몽골군에 허겁지겁 재물을 바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개 도시는 몽골군 심기를 건드려 도시째로 갈려나갔다. 이후 몽골군은 목초지를 찾아 카스피해 북쪽으로 이동했고 이 지역에서 킵차크족을 흡수하면서 소모된 전력을 증강했다.
1223년 초 칭기스칸은 이들 둘에게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할 것을 명령했고, 때마침 카프카스인들이 킵차크족과 연합해 몽골군에게 대향하자 제베와 수부타이는 이들을 격파하고, 돌아가는 김에 좀 더 가서 '''크림 반도까지 한 번 찍고 전리품을 들고 귀환하기로''' 정하고, 시행에 옮긴다. 이 과정에서 크림 반도 일대에 형성되어 있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도시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이후 전리품도 충분히 챙겼다고 여긴 몽골군이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을때 사단이 발생한다. 몽골군에게 두들겨맞고 서쪽으로 피난갔던 킵차크족들이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에게 '우리 털린거 봤지? 다음 차례는 너넬껄' 하면서 몽골군을 공격하라고 꼬신 것. 이에 고민하던 러시아 공국 사람들은 당시 러시아권의 수장격이었던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하기에 이르고 러시아 공국군은 한참 돌아갈 채비를 하던 몽골군에게 접근하게 된다.

3. 양군의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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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의 전력은 기록상 확인되는 바로는 2개 만인대(투만)이다. 보통 1개 만인대는 정원이 1만에 달하나, 실제로 이런 정원을 다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7~8천 내외였다고 한다. 여기에 장기간의 추격전으로 입은 전력 손실도 있으나, 카스피해 북부 스텝초원에서 한해를 나면서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전력을 충원했기 때문에 전체 전력 규모는 1만 5천~2만 명 사이로 여겨진다.
이에 반해 러시아군은 약 8만 명의 대군이었다. 전력 구성은 갈라치아의 대공 므스티슬라프 흐라브리, 볼리니아의 대공, 쿠르스크의 대공, 키예프와 체르니고프 대공, 수즈달의 대공, 로스토프의 대공이 연합하였다.

4. 칼가강 전투 전개



4.1. 전초전


러시아군은 전투 직전 몽골군에게 페이크를 하나 걸었다. 몽골군이 군대를 모은 러시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우린 그저 반란을 일으킨 쿠딘족을 토벌하기 위해 온거지 님들과 싸우려하는 게 아님' 이라는 거짓 사신을 보낸 것. 때마침 동쪽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수부타이제베는 이 말을 믿고 약 천여명의 병사들만 남긴채 동쪽으로 출발했는데,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낸 러시아군은 강가에 있던 이들 천여명의 몽골군을 포위해 전멸시키고, 돌아가는 몽골군을 마저 추격해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이건 '''호랑이의 꼬리를 밟은 격'''이였다. 특히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던 몽골군은 러시아의 선빵에 빡쳐 방향을 바꿔 이들을 족치기로 결심한다.

4.2. 전면전


기습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침착하게 진영을 갖추고 궁술과 기마술을 운용해 러시아군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넘겼다. 여기에 선봉에 나섰던 킵차크족 전사들이 철수할 수 있게 열어놓은 러시아 진영 틈을 몽골군이 철수하는 킵차크족 뒤에 바싹 붙어서 난입해 들어오자 러시아군은 그야말로 충공깽하며 붕괴. 이후 몽골군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양익을 길게 펼쳐 퇴로를 막고 러시아군을 섬멸했다.
키예프 대공은 이때 자기 캠프에서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며 기다렸다가 이후 달려온 몽골군에게 포위당했다. 1만여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했지만 이걸로는 몽골군을 막아내는 데만 급급했으며, 사흘간의 공격 후 몽골군이 항복하면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회유하자 잔존 러시아군은 항복한다. 그러나 몽골군은 먼저 뒤통수를 친 러시아군을 딱히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고, 포로로 잡은 고위 귀족들 외 나머지 러시아군은 학살당했다.

5. 칼가강 전투 결과 및 영향


이 패배로 러시아군의 야전 능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최소 2/3 이상의 러시아군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포로로 잡힌 귀족들은 몽골군에 의해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 모두 살해당했다.[1] 간신히 살아남은 러시아군 수뇌부는 강가의 모든 배를 파괴해 몽골군이 강을 건널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전투 이후 몽골군은 무리하게 러시아 지역으로 공격해갈 생각은 없었고, 이제까지 획득한 전리품을 가지고 칭기스 칸에게 합류하기 위해 출발한다. 다만 이 사태의 원흉이랄 수 있는 킵차크족은 가만 놔둘 수 없었는지, 돌아가기 전에 별동대를 조직해 후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킵차크족의 칸을 추적, 제거'''해버렸다. 임무를 달성한 몽골군은 시르 다리아 강으로 돌아가 칭기스 칸과 합류했다.
귀환 도중 병에 걸린 제베는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수부타이는 이 일대의 지형과 부족들에 대한 정보를 체득했고, 10여년 뒤 몽골군이 서방 원정을 나설 때 수부타이는 이 정보를 손에 쥐고 원정에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 우월주의자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그야말로 굴욕의 역사이기에,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엔 반지배 상태이던 몽골에서 이 전투는 은폐되면서 가려졌으나, 공산 정부가 사라진 이후부턴 몽골에서도 널리 배우고 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은 이 전투를 굴욕의 역사라며 한탄하는 시도 지은 적이 있다. 하긴 이 양반은 몽골의 지배를 싸움 밖에 없던 것이라고 까던 사람이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몽골, 쿠만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칭기즈 칸 캠페인에서는 호라즘 왕조 정벌이 메인이고 킵차크+러시아는 옆에 있다가 곁다리로 함께 쓸려나가는 걸로 묘사되는데 반해 코티얀 칸 캠페인에서는 몽골+타타르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포위, 추격해오고 쿠만 패잔병은 간신히 도망가는 걸로 묘사되었다.
조조전 모드 칭기스칸에서는 전투 조금 전부터 병에 걸린 제베가 헥헥거리는데, 전투를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있다. 역사대로 이 전투를 하면 제베와 무카리가 죽고, 이 전투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두 사람이 산다. 엔딩 분기와 관련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둘 다 해볼 것을 추천.
[1] 무라키마 히루키의 장편 '태엽 감는 새'에 그때의 피를 보지 않는 처형 방법이 언급되는데 그 방법이란 러시아 귀족들을 바닥에 눕혀놓고 그 위에 몽골군이 올라가 집단 군무를 추는 거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압사.(...) 참고로 몽골군의 명예(?)를 위해 첨언하자면 그들의 풍습상 피를 보지 않는 죽음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에 귀족들이랍시고 나름 대접(?)해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