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딜락 시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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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의 플랫폼 공유를 통해 생산된 컴팩트 전륜구동 차량 망작 Season.1[1]
1. 개요
2. 역사
2.1. 배경
2.2. 출시 및 생산
3. 여담
4. 둘러보기

'''Cadillac Cimarron'''

1. 개요


'''"새로운 종류의 캐딜락"''' - 1982년 당시 지면광고(링크)

미국자동차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캐딜락을 통해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생산한 준중형차이다. 고유가 시대에 점점 주목을 받기 기작한, BMW 3시리즈메르세데스-벤츠 190[2], 사브 900 등이 활약하는 소형 고급차 시장을 노리고 개발되었으나, 제대로 된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전형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의 폐해만 보여 주고 "세계적인 고급차"로 불리던 캐딜락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참고 자료 1/2)

2. 역사



2.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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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2년식 캐딜락 시마론. 당시 시마론의 후미등은 쉐보레 캐벌리어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시마론의 바탕이 되는 J-바디 플랫폼은 앞엔진 앞바퀴굴림 설계의 경제형 차 플랫폼으로, 당시 제너럴 모터스(GM)의 모든 디비전을 통해 돌려 쓸 의도로 1976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두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토션빔 서스펜션을 각각 앞바퀴와 뒷바퀴에 장착하고, 4기통 엔진을 기본으로 적용하며 같은 휠베이스에 가로배치 엔진 및 변속기 설계를 도입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미국 의회에서의 에너지 절약 법률 통과로 인한 깐깐해진 연비 규정으로 인해 대형차 및 고급차의 판매량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대형차가 주류였던 GM은 일본유럽 업체들에게 실적을 뺏기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시마론의 경우는 캐딜락 세빌에 이어 대형 고급차 중심의 브랜드였던 캐딜락에 소형화된 라인업을 공급하기 위한 조치였다. 처음에는 훨씬 캐딜락답게 플랫폼의 전체적인 세팅을 바꿔 재설계할 계획이라 지금보다 훨씬 후에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소형 고급차 때문에 판매량을 뺏기고 있다는 이유로 대리점이 재촉을 하자 개발이 급하게 진행되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나면, 당시 GM의 회장이었던 피트 에스테스(Pete Estes)[3]조차 당시 캐딜락의 지배인인 에드 케너드(Ed Kennard)에게 "J-카 준중형차를 캐딜락으로 만들 시간은 없다"고 경고할 정도였고, 결과물에 대해서도 "캐딜락보단 쉐보레같다"고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모델명은 J2000[4]과 카르멜(Carmel), 카스케이드(Cascade), 캐빌(Caville), 엔보이(Envoy)[5], 시리즈 62[6] 등을 비롯한 후보명 중 하나가 선정되었는데, 선호도 조사에서 캐빌이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데 비해, 시마론이 가종 높은 점수를 받아 지금의 이름이 확정되었다. 시마론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미국 뉴멕시코오클라호마를 거처 흐르는 강인 시머론 강이다.

2.2. 출시 및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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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식 캐딜락 시마론 D’Oro.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디자인이 이전보다 좀 더 차별화되었다.
1981년 5월 21에 출시된 시마론은 "Cimarron, by Cadillac"이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2배럴 로체스터(Rochester) 카뷰레터가 장착된 1.8리터 88마력 직렬 4기통 엔진[7]과 4단 수동변속기[8], 3단 터보 하이드라매틱(Turbo-Hydramatic) 자동변속기 옵션이 적용되었다. 캐딜락이라는 이름에 맞추기 위해 고급 직물이나 가죽으로 마감된 인테리어, 에어컨, 파워스티어링, 알로이휠, 스트라이프 데칼, 잠금식 연료 주입구 뚜껑, 파워 백미러, 실내등, 간헐식 와이퍼, 열선이 내장된 뒷창문, AM/FM 스테레오 라디오, 타코미터, 유압 댐퍼가 장착된 서스펜션, 안티롤바가 적용되었다. 가격 역시 동시대의 J-바디 준중형차들의 2배 수준인 12131달러[9]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 뷰익 스카이호크올즈모빌 피렌자, 폰티악 선버드, 심지어는 쉐보레 캐벌리어와 사실상 같은 차를 비싸게 팔아먹다보니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랭했고, 매년 7만 5천대가 팔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겨우 25968대만 판매될 정도였다. 게다가 기본 엔진인 1.8리터 엔진은 다른 차들과 돌려쓰는 엔진인 건 둘째치더라도 캐딜락 차에서 기대할 만큼의 출력과 정숙성을 내지 못했으며, 차량 세팅 역시 "승차감이 스포티하거나, 고급스럽거나 중의 어느 하나도 아니다", "변속기도 변속비가 짧은 것 빼곤 별볼 일이 없다"는 등의 평을 들었다. 결국 시마론은 캐딜락의 4-6-8기통 변환 엔진과 더불어 코미디 소재로 등장하면서 캐딜락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이후 캐딜락과 GM에서는 1983년부터 1.8리터 엔진을 연료분사식 2리터 86마력 엔진으로 교체했고, 1985년부터 125마력짜리 2.8리터 V6 엔진을 선택 사양으로 추가했으며 1987년부터 기본 엔진으로 장착했다. 심지어 페이스리프트까지 중간에 한 차례 진행해 상품성을 개선해 나갔으나, 고객들의 발길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10] 1988년에 6465대를 생산한 뒤, 1988년 6월 3일에 시마론을 단종시켰다. 단종 때까지 미국 위스콘신의 제인스빌(Janesville)에 위치한 제인스빌 조립 공정과 캘리포니아 사우스 게이트(South Gate)의 사우스게이트 조립공정을 통해 132499대가 생산되었다.

3. 여담


차 자체는 "캐딜락으로서는 최악, 쉐보레 카발리에로서는 최고였다" 라고 회고되고 있다. 따라서 캐딜락 브랜드의 가치에 먹칠을 했다는 평가가 주류이며, 1980~1990년대 캐딜락 브랜드의 몰락 과정을 보여 주는 사례로 종종 소개되고 있다.
  • 가령 2007년에 "타임" 지에다 "역사상 최악의 차 50선(Worst Cars of all Time)" 리스트를 기고한 자동차 저널리스트인 댄 닐(Dan Neil)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부패했고, 게을렀고, 헛소리만 하는 당시 GM이 캐딜락의 호의적인 명성과 고객들에게 명백한 모욕을 저질렀다. 시마론이 캐딜락을 거의 죽일 뻔했고, 가장 큰 수치로 남았다"고 평가했다.
  • 또한 2010년에 "포브스(Forbes)" 지에서는 저조한 실적과 부족한 성능, 고급 브랜드로 도저히 먹힐 수 없는 구성을 이유로 "Legendary Car Flops" 10선에 시마론을 올렸다.
  • "카버즈(CarBuzz)"에서는 시마론에 대해 "자동차 회사에서 경제형 차를 고급차로 뱃지놀이를 하려고 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소개했다.
  • 작가인 헤나 엘리어트(Hannah Elliott)는 "힘 넘치는 V8엔진과 미국식 고급스러움을 원하는 전통적인 고객들과 유럽식 고급 브랜드를 원하는 고객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시마론은 모든 방면에서 유럽 고급차들과 비교될 수 없었다"고 시마론에 대해 평가했다.
  • CNN Money에서는 "모든 중요한 방면에서 쉐보레 캐벌리에였으며, 훨씬 비싼 가격표가 더해졌다. 좋은 캐딜락은 커녕 좋은 가치를 지니지도 못했다. 지금의 GM 경영진들은 시마론이 좋지 못한 발상이었다고 인정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 "카앤드라이버(Car and Driver)" 지에서는 캐딜락의 제품 감독인 존 하웰(John Howell)이 시마론의 사진을 벽에 걸어 두고 "잊지 말자"는 글씨까지 써 붙였다고 밝혔다.

4. 둘러보기




[1] 시즌 2는 사브 9-3를 뱃지 엔지니어링한 캐딜락 BLS, 시즌 3는 캐딜락 ELR...[2]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의 선조격 되는 차량이다.[3] 1982~1985년 사이에 나올 고급차와 대형차를 모두 앞바퀴굴림으로 전환하자는 결정을 밀어붙인 인물이었다. 물론 이 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드러났고 회장 본인조차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했다.[4] 폰티악 선버드의 초기 명칭으로 쓰임.[5] 이후 GMC의 차량 이름으로 쓰임.[6] 전성기 시절인 1950년대 캐딜락의 대형차 명칭과 같은 이름이다.[7] 1914년 이후 캐딜락 최초의 4기통 엔진이자 1908년 이후 캐딜락 최초의 2리터 미만급 엔진이다.[8] 1953년 이후 캐딜락 최초이다. 이후에는 5단도 적용되었다.[9] 현 기준으로 31575달러이며, 동시대의 쉐보레 캐벌리어 CS 트림은 8천 달러를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10] 심지어 GM 내부에서도 시마론을 단종시킬지에 대한 여부를 볼 때, 당시 임원 10명 중 9명이 단종시키는 데 동의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