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사와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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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부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오사카부립 야오 중학교 시절 고시엔에 봄, 여름대회를 합쳐 5회 출장했고, 칸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에이스이던 '''니시무라 유키오'''[1] 와 더불어 학교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933년 칸사이대의 하와이 원정 멤버에 포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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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긴코군 시절의 쿠로사와
1936년 프로야구 발족과 함께 창단한 '''나고야 긴코군'''에 대학을 중퇴하고 입단, 바로 팀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인 1937년 춘계, 추계리그 모두 0.295, 0.279의 타율과 총 3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맹 활약을 보였다. 1940년 시즌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쿠로사와는 1년 만인 1941년 긴코군과 츠바사군의 합병 구단 '''다이요군'''으로 복귀했고, 또다시 징병되어 1년 간 군복무를 마친 후 1943년 구단 운영권이 니시닛폰 철도로 넘어간 '''니시테츠군'''[2] 으로 돌아온 쿠로사와는 그 해 0.190의 낮은 타율 이었지만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리그 3위인 32타점을 기록했다.
니시테츠군이 자금난으로 인하여 1944년 해체된 후 쿠로사와는 '''곤도 사다오''' 등과 함께 도쿄 교진군으로 이적하여 팀의 1번 타자로 활약하며 타율 0.348(리그 2위), 17타점(5위)으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주요 선수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전력이 많이 떨어진 교진군의 주축 타자로 힘을 보탰다. 그 해 5월 20일 대 긴키닛폰군 경기 때 '''1경기 2홈스틸'''이란 진기록을 남겼으며 통산 홈스틸 10개로 역대 2위[3] 를 마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쿠로사와는 1946년 교진군에 복귀하여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돌아오기 전 까지 팀의 4번 타자를 맡았고, 카와카미가 돌아오자 5번을 치며 타율 0.308, 60타점으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이 해 11월 열린 '''프로야구 동서대항전'''에 동군 선수로 출장한 쿠로사와는 2점을 뒤지던 5차전 연장 12회말 무사 만루 찬스에서 주자를 모두 쓸어담는 끝내기 3루타를 날리며 클러치 히터 다운 모습을 뽐냈다.
1947년 6월, 장티푸스에 감염된 쿠로사와는 몸이 안 좋은 상황임에도 미하라 오사무 감독에게 이를 숨기고 출장을 강행하다 결국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지만 회생하지 못하면서 6월 23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33세.
쿠로사와의 장례식은 교진군 사상 최초의 구단장으로 치루어졌고, 치바 시게루 등 교진군 주력 선수들의 제안에 따라 쿠로사와의 생전 등번호이던 '''4번'''은 사와무라 에이지의 14번과 함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쿠로사와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교진군의 유니폼을 입혀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쿠로사와의 유해는 교진군 유니폼을 입고 관 속에 들어갔다.
1. 프로필
오사카부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2. 선수 시절
오사카부립 야오 중학교 시절 고시엔에 봄, 여름대회를 합쳐 5회 출장했고, 칸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에이스이던 '''니시무라 유키오'''[1] 와 더불어 학교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933년 칸사이대의 하와이 원정 멤버에 포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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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긴코군 시절의 쿠로사와
1936년 프로야구 발족과 함께 창단한 '''나고야 긴코군'''에 대학을 중퇴하고 입단, 바로 팀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인 1937년 춘계, 추계리그 모두 0.295, 0.279의 타율과 총 3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맹 활약을 보였다. 1940년 시즌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쿠로사와는 1년 만인 1941년 긴코군과 츠바사군의 합병 구단 '''다이요군'''으로 복귀했고, 또다시 징병되어 1년 간 군복무를 마친 후 1943년 구단 운영권이 니시닛폰 철도로 넘어간 '''니시테츠군'''[2] 으로 돌아온 쿠로사와는 그 해 0.190의 낮은 타율 이었지만 찬스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리그 3위인 32타점을 기록했다.
니시테츠군이 자금난으로 인하여 1944년 해체된 후 쿠로사와는 '''곤도 사다오''' 등과 함께 도쿄 교진군으로 이적하여 팀의 1번 타자로 활약하며 타율 0.348(리그 2위), 17타점(5위)으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주요 선수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전력이 많이 떨어진 교진군의 주축 타자로 힘을 보탰다. 그 해 5월 20일 대 긴키닛폰군 경기 때 '''1경기 2홈스틸'''이란 진기록을 남겼으며 통산 홈스틸 10개로 역대 2위[3] 를 마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쿠로사와는 1946년 교진군에 복귀하여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돌아오기 전 까지 팀의 4번 타자를 맡았고, 카와카미가 돌아오자 5번을 치며 타율 0.308, 60타점으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이 해 11월 열린 '''프로야구 동서대항전'''에 동군 선수로 출장한 쿠로사와는 2점을 뒤지던 5차전 연장 12회말 무사 만루 찬스에서 주자를 모두 쓸어담는 끝내기 3루타를 날리며 클러치 히터 다운 모습을 뽐냈다.
3. 사망
1947년 6월, 장티푸스에 감염된 쿠로사와는 몸이 안 좋은 상황임에도 미하라 오사무 감독에게 이를 숨기고 출장을 강행하다 결국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지만 회생하지 못하면서 6월 23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년 33세.
쿠로사와의 장례식은 교진군 사상 최초의 구단장으로 치루어졌고, 치바 시게루 등 교진군 주력 선수들의 제안에 따라 쿠로사와의 생전 등번호이던 '''4번'''은 사와무라 에이지의 14번과 함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쿠로사와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교진군의 유니폼을 입혀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에 따라 쿠로사와의 유해는 교진군 유니폼을 입고 관 속에 들어갔다.
[1] 西村幸生(1910~1945). 대학 졸업 후 1937년 오사카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제법 활약을 보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인해 불과 3시즌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일본군에 소집되어 1945년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했다. 평소 술을 굉장히 좋아하여 '''주선(酒仙) 투수'''라는 별명으로도 통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주선(酒仙)의 일본어 발음이 주전(主戰)과 같은 '''슈센(しゅせん)'''이라는 점. 즉 주선 투수와 주전 투수를 오가는 말장난이 가능했다는 것이다(...).[2] 이 팀은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와 모기업만 같을 뿐 서로 관련은 없는 별개의 구단이다.[3] 1위는 요나미네 카나메의 1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