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무라 에이지

 

[imag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4 '''
'''이름'''
사와무라 에이지(澤村 榮治)
'''생몰년도'''
1917년 2월 1일 ~ 1944년 12월 2일
'''출신지'''
일본 미에현 우지야마다 시(現 이세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
'''소속팀'''
'''대일본도쿄야구클럽-도쿄 교진군 (1934~1944)'''
'''1937년 일본프로야구 춘계 MVP'''
리그 출범

'''사와무라 에이지
(도쿄 교진군)'''

버키 해리스
(고라쿠엔 이글스)

1. 소개
2. 일본 야구계의 신성
3. 과대평가 된 투수?
4. 관련 문서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
일본인들한테는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투수로 남아있으며, 미국의 사이 영 상에 비견되는 사와무라상을 만들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선발 투수에게 시상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사와무라상 항목 참조.

2. 일본 야구계의 신성


아직 고교생이었던 1934년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와의 친선경기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을 연속삼진으로 돌려세우고 1실점 패전을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36년 일본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당시 도쿄교진군)에 입단하여 프로야구 사상 첫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였으며, 1937년 24승을 거둬 MVP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선에 참여하였으나 이 때 수류탄을 던지느라 입은 어깨부상과 왼쪽 손에 총알을 맞아 다치는 바람에 1940년 복귀 후 오버스로로 전향하여 컨트롤 위주의 피칭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 컨트롤마저 1942년 두 번째 징집 후 완전히 잃어버려 1944년 3패 평균자책점 10.64를 기록하며 결국 소속팀에서 방출당했다.
그 후 세 번째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가하다가 1944년 12월 그가 탄 수송선이 미국 잠수함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1947년 그의 명예를 기리고자 사와무라상을 제정하게 된다.[1]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였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전성기는 극히 짧았고, 세 차례의 전쟁참가로 인해 일찍 삶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투수였다.

3. 과대평가 된 투수?


사와무라의 평가는 과대평가 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면 거인군의 창단멤버이며 전쟁에 징집되어 죽었다는 드라마틱함[2] 때문에 미화된 선수라는 것.
우선 당시의 메이저리그 선발팀이 제대로 플레이했는가부터 의문점이 남는다.[3] 저 1실점 패전도 있지만 10점 이상 두들겨 맞은 시합도 있고,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18전 전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의 책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에서 인용된 구보타 지로의 '손안에는 언제나 풀하우스'의 내용을 보면 당시 10번째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냥 적당히 봐주다가 루 게릭이 홈런 한방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사와무라의 구속이 정말로 빨랐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모 방송프로그램에서는 남아있는 비디오를 가지고 계산했을 때 159.4km/h라고 밝혔지만, 당시의 필름은 초당 16프레임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에게 가기까지 0.44초가 걸린다는걸 생각하면 측정하는데 쓰인 필름은 절반인 8장정도라 볼 수 있는데 이 중 던지는 순간과 받는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오차는 최대 20km/에 달한다. 실제로 당시의 잡지에는 133km/h라는 기록도 있다. 다만 직구가 150km, 커브가 120km대였다는 기록도 있어, 저 133km/h는 커브의 구속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고, 이 추측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편. 직구 130km대의 평범한 공으로 저렇게 압도적인 시즌성적을 내는 것은 그냥 150km 던지는 것보다 더 힘들기 때문이다.
당시 시즌 기록을 보면 일본의 모든 투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튀어나와 있다고 해도 될 만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MVP였던 37년 춘계시즌(만 20세) 30경기 24선발 24완투 7완봉 24승4패 244이닝 196K ERA 0.81 WHIP 0.84 노히터 2회로, 당시 춘추시즌제 각 56게임제로 저게 56경기만에 쓴 기록이다. 무려 이틀에 한번씩 완투해서 244이닝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것. 비록 활약한 기간은 짧지만 확실히 당대 일본 최고의 투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게 곧 메이저리거급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대 미국과 일본의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실력차를 감안하면, 아무리 메이저리거 선발팀이 설렁설렁 플레이했다고 할지언정, 프로야구도 없는 나라의 고교생이 1실점 완투패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당장 한국의 고교생이 단 한 경기라도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로 1실점 완투패를 했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 언론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다. 실제로 21세기 현재 아시안 게임을 보면 프로야구나 실업야구 선수가 출전하는 일본, 한국, 대만과 그렇지 못한 필리핀, 태국, 파키스탄 등의 나라들의 실력차는 어마어마해서 10점차는 기본으로 나오고 20점차 이상도 심심찮게 나온다. 사와무라가 완투패를 했을 때는 일본은 프로야구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과 미국 외의 야구실력의 차이가 더욱 크던 시절이었기에, 실제로 과대평가 논란이 여러번 있었고 기록을 통한 재평가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사와무라의 평가는 크게 변하지 않고, 일본 구계의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결론은 전쟁과 이른 죽음으로 인한 드라마성이 가미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걸 빼고 생각하더라도 사와무라는 당대의 탈일본급의 투수였으며, 메이저리그 올스타를 상대로 단 한 게임이라도 시합다운 시합을 펼쳐보일 수 있는 유일한 투수였다. 그것도 고교생 신분으로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투수였네 하는 평가는 과장된 것이 맞지만, 그런 감상적인 평가나 과장을 제쳐두고 야구 내의 기록과 업적만으로 따져보아도 전설적인 투수가 맞기 때문에 오늘날 사와무라 에이지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메이저리그사이영 상은 9년 후인 1956년에 제정되었다. 다시 말해 사와무라상사이 영 상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 제정된 것이다.[2] 군국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영향이 크다. 전범 합사문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사와무라의 위패가 '전몰자' 신분으로 안치되어있을 정도.[3] 당시는 해외여행이 지금보다 훨씬 힘든 시기여서 장거리 원정을 오는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가 지금보다 매우 힘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1930년대 월드컵 경기도 유럽에서 할 때에는 남미팀들이 부진했고 남미에서 할 때에는 유럽팀들이 부진했(거나 아예 참가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