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미네 카나메
1. 개요
与那嶺 要(1925.6.24~2011.2.28)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미국 하와이 태생의 일본계 미국인 2세[1] 로, 본명은 '''월리스 카나메 요나미네(Wallace Kaname Yonamine)''' 이며 애칭은 '''월리(Wally)'''. 원래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1947년 NFL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입단, 동양인 최초의 NFL 선수로 플레이 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1950년 야구선수로 전향, 마이너리그 트리플 A 팀에서 활동하였다.
2. 현역 시절
1951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첫해엔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3할 타율을 마크했고 이후 1952~1960년까지 요미우리의 1번 타자로 맹활약 했다. 치바 시게루와 당대 최고의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하며 요미우리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며 타격왕 3회, MVP 1회를 수상했다.
1961년 자유계약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했고, 2년간 선수로 뛴 후 196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12년 간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11, 82홈런, 482타점, 163도루.
[image]
현역 시절 세이프티 번트에 상당히 능숙하여 일본 야구에 세이프티 번트를 처음으로 도입한 선구자 격 인물이며, 미국 스타일의 거친 슬라이딩과 태클, 수비수들의 얼을 빼는 주루플레이[2] 를 선보이며 당시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 같은 야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일본 야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3. 지도자 시절
[image]
주니치 감독 시절
은퇴 이후 풍부한 경험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30년 가까이 프로팀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그 경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주니치 감독 당시 오랜 기간 활약한 호시노 센이치를 구원투수로 전향시켜 1974년 세이브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두 사람 모두 타도 거인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활약한 결과였다.
4. 만년
1988년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고향인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중 2006년 마스터즈 리그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2009년 7월 16일 오릭스 버팔로즈와 치바 롯데 마린즈의 경기 때 오릭스의 초대로 시구자로 나오는 등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11년 2월 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5. 에피소드
- 거인과 입단 계약을 맺을 때, 자택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지극히 드물었던 시대였는지라 구단 관계자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 한때 도쿄 롯폰기에서 아내와 진주 가게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롯폰기 땅값을 생각하면 요나미네가 야구선수로 얼마나 크게 성공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
-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일생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적대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특히 1960년 미즈하라 시게루의 후임으로 거인 감독에 취임한 카와카미가 요나미네를 전력에서 제외하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는 단초를 제공했고 이 때문에 요나미네는 카와카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주니치 감독에 취임한 1974년, 요나미네는 타도 거인, 타도 카와카미를 표방하며 시즌에 임했고 그 해 거인의 10년 연속 센트럴 리그 제패를 저지하면서 "현역 시절 우승보다 지금 주니치를 우승시킨 것이 더욱 기쁘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1978년 코치로 거인에 복귀했지만, 1980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직을 내려놓자 자신도 거인에서 퇴단했는데 당시 나가시마의 퇴진에 카와카미가 영향을 발휘한 것으로 생각하여 심하게 반발하고 사표를 던졌다 한다. 그 이후로도 요나미네는 카와카미가 연관된 거인 OB회 행사엔 절대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카와카미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였다.[6]
- 왕정치 특유의 친절한 팬 서비스는 요나미네의 호의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왕정치는 야구장에서 지저분한 고무공을 내밀며 거인 선수들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다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요나미네 혼자만 웃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고, 이를 계기로 큰 감동을 받은 왕정치는 일본 최고의 타자로 성장한 후 팬 서비스에 정성을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대선수로 성공한 후, 요나미네는 왕정치의 그 추억에 대해 "고무공 내밀던 눈 동그란 꼬맹이? 기억난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요나미네가 2011년 타계하자 왕정치는 "내 인생 최초의 사인을 해준 선수이다. 그 분 덕분에 야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며 그를 팬 서비스의 스승으로 회고하였다.
- 일본어는 일상 회화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읽고 쓰기는 거의 못하고,[7] 섬세한 표현에 서툰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일본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1] 아버지는 오키나와 현, 어머니는 히로시마 현 출신 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성인 요나미네는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키나와 계 성씨이다.[2] 세이프티 번트로 출루한 후 다음 타자 타석 초구에 2루 도루, 2구에 3루 도루, 3구에 홈스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등,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던 수비수들의 허를 찌르는 주루의 대가였다.[3] 1969년 롯데 오리온즈로 팀명 변경.[4] 교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지도했다.[5] 1974년 친정팀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하고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일본시리즈에선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이끌던 롯데 오리온즈에게 패퇴하였다.[6] 반면 카와카미와 전혀 관계없는 야구 행사엔 거인 유니폼을 입고 참석했다고.[7] 주니치의 그 유명한 응원가 타올라라 드래곤즈의 최초 버전이었던 1974년도판 앨범 커버는 당시 주니치 선수단들의 사인이 쓰여져 있는 형태였는데, 요나미네는 카타카나를 쓰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혼자서 영어 사인을 적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