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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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4년생으로 영국령 홍콩 제28대 총독이자 마지막 총독. 그는 예외적으로 홍콩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영국 정치인이었으며 총독을 역임한 많은 영국인들 중 유일한 정치인 출신이었다.
2. 생애
2.1. 영국의 정치인
원래는 영국 보수당의 유력 정치인 중 한 명으로, 80년대 마거릿 대처 내각과 존 메이저 내각에서 해외개발부 장관(Minister for Overseas Development), 환경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Environment) 등을 지냈다.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와 재집권을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지역구에서 낙마했다.[1]
당시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이에 대한 보상의 일환으로 패튼에게 홍콩 총독 자리를 제안했으며, 패튼은 이를 수락해 1992년 7월에 데이비드 윌슨의 후임으로 부임했다.[2]
2.2. 홍콩 총독
이미 중영공동선언으로 그의 부임 5년 뒤인 1997년에 홍콩반환이 확정되었기에 중간에 사망하거나 사임하는 것이 아닌 이상 패튼이 임기를 마치는 순간이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본인도 처음부터 홍콩 총독직을 희망했던게 아니라 선거 실패 보상 차원에서 넘겨받은 상황이라 사람들은 그가 현상유지만 하다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는 정 반대로, 그는 자신의 임기 후에도 홍콩의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줄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패튼은 홍콩에 부임한 뒤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94년에 있었던 선거 개혁이었다. 당시 홍콩인들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2차대전 후 총독을 현지인들이 선출하거나 영국에서 임명하더라도 실권은 현지인 총리가 갖도록 했던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홍콩은 반환되는 날까지 영국에서 임명된 총독이 여전히 전권을 휘둘렀다. 선거제도도 1982년에서야 도입되었고, 그마저도 국회 격인 입법국 의원들은 간선제로 선출했으며, 직선제인 구의회 의원도 1/3 가량을 총독이 임명했다. 1991년에 입법국 의원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제한된 선거권자만이 선출하는 직능대표의원들이 많았다.
1993년에 패튼은 겸임하던 입법국 의장직을 존 조셉 스웨인 의원에게 넘겨줬고, 1994년에 선거개혁을 실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소선거구제 도입
- 투표연령을 만 18세로 하향
- 임명직 구의원 폐지
- 직능대표의원 선거권자 범위 확대
패튼의 개혁보다 퇴보한 중국의 행보에 실망한 홍콩인들은 이후 반중감정을 키웠으며, 우산혁명,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 2010년대 이후 계속 터져나오고 있는 홍콩 민주화 시위 및 홍콩-중국 갈등의 먼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3. 현재
영국령 홍콩 총독직을 이임한 이후로는 남작 작위를 받아 영국 상원의원으로 재직중이며, 2011년에서 2014년까지 BBC Trust 이사장, 2016년 현재 종신직인 옥스퍼드 대학의 총장[5] 으로 10년 넘게 재직중이다.
2014년 홍콩 우산 시위와 관련해서 패튼 경(Lord)의 행적이 재조명되고있다. 그가 총독으로 재직할 당시에 그의 임무는 중국에 반환되어도 홍콩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안전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총독직을 마친 이후에도 그는 주기적으로 홍콩을 방문했고(가장 최근은 2016년) 그때마다 많은 홍콩인들이 그를 반가워했는데 유튜브를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최근에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와 관련하여 해당 시위를 촉발한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고 해당 법안을 철회하는데 국제사회가 협력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가디언지 기사 홍콩 국가안전법에 대해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대 중국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홍콩 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홍콩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현실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홍콩에서의 민주화 요구에 관한 대내외의 지지를 약화, 분산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옥스포드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유색인종 학생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 동상의 철거 요구에 반대하고 있어 비판, 논란을 빚고 있다.
중국이 홍콩 보안법을 도입하면서 홍콩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으로 망명한 네이선 로 전 데모시스토당 주석과 만남을 가졌다.
3. 선거 이력
4. 매체 출연(?)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라 홍콩 97에 사진으로 출연하는 영광 을 누리기도 했다. 역할은 홍콩이 중국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살짝 스쳐가는 역할.
[1] 영국은 의원내각제로 장관의 기본요건이 국회의원이다. 현직 총리도 지역구에서 낙선하면 그냥 민간인이 된다. 존 메이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당선되었으면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에 임명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총리, 내무장관(Home Secretary), 외무장관과 더불어 영국 정부 최고의 요직(Great Offices of State)으로 손꼽히는 자리다.[2] 당시 데이비드 윌슨이 친중 성향이 강한 것도 한 몫 했다.[3] 중영공동선언에서는 '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관리권, 입법권, 독립된 사법권 및 최종심판권을 향유한다. 현행 법률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라는 부칙 조항이 있는데 영국은 '현행'을 반환시점인 1997년, 중국은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국은 공동선언 체결 이후 반환 직전까지 패튼의 선거제 개혁과 같은 홍콩 민주 개혁을 집중적으로 해놓았고, 중국은 이에 반발했다.[4] 이를 맡았던 사람이 후일 신민당 대표를 지낸 레기나 입. 이 과정에서 저항하던 민주파 우치와이 의원 등은 체포당했다.[5] 총장은 명예직이며 주로 명망이 높고 초당적인 명사들이 선임된다. 실제 권한은 선출직인 부총장(임기제)에게 있다.[6] 1974년 2월 28일의 총선. 1974년에는 총선이 2번 있었고 10월 10일에 47회 총선이 다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