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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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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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섬에 상륙하는 터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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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전쟁에서의 승전보를 전하는 당시 터키의 휘리예트 신문 참고로 헤드라인에는 "Türkler ezilirken susanlar, şimdi bol bol konuşuyor" (튀르크인들이 억압받을 적엔 침묵했던 자들이, 이제는 요란하게 말한다.), "Savaş bitti, oyun başladı" (싸움은 끝났다, 이제 놀이가 시작되었다.) 라고 쓰여 있다.)
1. 개요
2. 전개 과정
3. 만약 그리스가 이겼다면?


1. 개요


1974년 터키가 키프로스 문제에 개입하면서 터키와 키프로스, 그리스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2. 전개 과정


터키그리스는 서로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지만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달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민족 구성 부터가 터키는 튀르크인, 그리스는 헬라인으로 달랐고 터키는 이슬람교를 믿고 그리스는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는 등 종교도 달랐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양국은 앙숙 그 자체였는데, 동로마 제국을 멸망 시킨 후 그리스인들을 400여년동안 지배한것이 바로 튀르크족의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었고, 근대 그리스 역사의 시작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왕국이 건국된 것부터였다. 독립 이후에도 양국은 제1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러 차례 충돌을 빚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 시절 고토를 회복한다는 미명 하에 터키와 소위 터키 독립전쟁을 벌이는 등 적대적 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들어서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동유럽과 발칸 반도를 적화시키는데 성공한 소련은 그리스와 터키도 적화시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오랜 앙숙으로 대립하던 터키와 그리스는 소련과 이웃의 공산권 국가들에 맞서고자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반공 동맹국이 되었고, 194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이후 두 나라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을 견제하게 됐다. 하지만 그리스와 터키는 냉전이 한창인 1950년대와 60년대에도 양국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냉전 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대립하던 터키와 그리스 관계는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본래 키프로스 섬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식민 정착을 하면서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영역이었으나, 16세기 쉴레이만 1세 시절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터키인들이 이주를 와 정착하면서 독립무렵에는 터키인 인구가 15%, 그리스인 85%정도를 차지하였다. 식민지 시절에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은 독립이 아닌 '''그리스로의 편입'''을 원했지만, 터키계의 반발도 적지않아 결국 '''독립'''이 되면서[1]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고, 다수를 구성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사실상 소수민족인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을 억누르면서 분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에 민족 분쟁은 그리스가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고 터키가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을 지원하면서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키프로스 문제는 1967년에 벌어진 키프로스 내 터키계와 그리스계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지면서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전면전 가능성까지 고조되면서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1974년 7월 키프로스 국내의 그리스계 키프로스 군 장교들이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터키계와 그리스계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려던 마카리오스 3세(Γ' Μακαριος) 대통령을 몰아내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들 반란군은 친그리스 성향의 니코스 삼프손(Νίκος Σαμψών)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였다.
결국 이러한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는 인접한 터키를 자극했다. 결국 파흐리 코루튀르크(Fahri Korutürk) 당시 터키 대통령은 키프로스 내 터키계 주민들의 보호를 명목으로 키프로스 제압을 명령하면서 터키군 병력이 곧바로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터키는 터키계 보호라는 명분으로 7월 20일 파병을 시작했다. 한편 터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그리스계 키프로스 반란군 세력들도 터키군의 침공에 맞서 저항하였다. 그리스 역시 그리스계 키프로스 반란군 세력들을 지원하고자 공군과 해군을 파견하면서 키프로스는 터키와 그리스, 키프로스 간 전쟁터로 돌변하였다. 한편 터키계 주민들은 자체적 민병대를 조직해 침공 터키군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계를 공격하였고 이에 그리스계 주민들도 민병대를 만들어 터키계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복잡해졌다.
그리스에 상륙한 터키군 50연대는 M47 전차와 M113 장갑차로 이루어진 기계화부대였고 이보다 구세대의 장비를 운용하는 키프로스 반란군의 T-34/85BTR-152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키프로스군은 그리스의 안전보장을 굳게 믿었고 장비를 현대화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키프로스 반란군은 소련제 3M6 쉬멜(AT-1) 대전차 미사일로 터키군 전차를 공격했지만 터키군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터키 공군이 키프로스의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그나마 구식 장비로 한줌의 기계화부대를 운용하던 키프로스군은 폭격에 장비들이 망가지는 큰 피해를 입는다.
전쟁 시작 이틀 째가 되자 터키군의 39보병사단이 상륙했고 이제 '''터키군은 양과 질 모두에서 키프로스 반란군을 앞서게 되었다.''' 터키군은 키프로스 북부 전역과 니코시아 일부 지역을 장악하였고 그리스계 키프로스 반란군은 패퇴에 패퇴를 거듭하여 남부로 후퇴하였다. 키프로스 반란군이 아군으로서 도우려던 '''그리스군 특공대가 탑승한 수송기를 오발로 격추시켜 33명의 그리스군 특공대원이 산화한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키프로스 측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한편 터키도 오발 사고가 빈번했는데 상륙 과정에서 터키군이 바주가포로 오인사격하는 바람에 '''50연대장이 사망하는 일이 벌여졌다던가''' 키프로스 인근에서 상륙 지원 및 차단 임무를 수행중이던 터키 해군의 기어링급 구축함 TCG Kocatepe를 두고 '''그리스측에서 그리스 군함이라고 거짓 무선 신호를 보내버리는 바람에'''[2] 터키 공군 F-104가 오인 폭격해버렸고 그 결과 5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해당 군함은 침몰하는 사고도 벌여졌다. 그럼에도 터키군은 그리스-키프로스 연합군을 앞도했고 터키는 영국군이 파병한 아야 나파 지역을 제외한 곳을 재빠르게 장악했다. 이 와중에 3600명에 달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약 6백명 정도가 사망 및 행방불명되었다.
이전에 터키군의 침공을 두고 그리스나 키프로스 측은 터키군 따위는 자발적인 시민군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헛소리였다. 그 시민군은 터키군의 초반 폭격으로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생기자 당황하여 달아나는데 급급했다. 무장과 병력 수, 모든 것에서 불리한 일개 시민군이 터키군을 막을 순 없었다. 부랴부랴 미국과 유럽이 중재하여 터키군이 일부 물러났으나 터키군이 침공한 지 한 달도 채 되지않은 1974년 8월 18일, 터키군은 키레니아 구 전역과 영국군이 파병한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파마구스타 구 전역, 니코시아 구 북부(키프로스 전 국토의 약 36.2%)를 장악했다. 키프로스는 키프로스 정부와 그리스군, 그리스계 민병대가 장악한 남부와 터키군 및 터키계 민병대가 장악한 북부로 완전히 동강났으며 더욱이 막강한 터키군의 공세에 키프로스 그리스계 반란군 세력 지원에 나섰던 그리스군도 그리스 본국 기지키스 군사 정권의 명령을 거부하고[3] 키프로스에서 병력을 철수하면서 키프로스 전쟁은 터키군의 완전한 승리로 종료되었다.
결국 이 전쟁은 그리스와 터키 모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스는 이 전쟁에서의 군사적 패배로 키프로스 분쟁에 개입하였던 요안니디스 군사 정권이 붕괴되어 민주화 달성의 주요 계기가 되었다. 반대로 터키는 키프로스 전쟁 개입의 성공으로 군부 세력들의 힘이 차츰 강해져 6년뒤인 1980년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군사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국제사회는 터키를 두고 맹비난했으며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에 대한 제재 조치는 물론이고 미국은 터키에 대해 1975년 부터 1978년 까지 무기금수조치를 단행했다. 터키군이 운용하던 대다수의 군사장비가 미국제였던 상황에서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터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조치였다. 비록 이란 혁명으로 친미 정권이 몰락하면서 다시금 터키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미국의 금수제재는 해제되긴 했지만 터키에게 자극을 주긴 충분했던 조치였고 이 때 이후로 터키는 방산산업을 육성하게 된다.
한편 분단된 키프로스의 북부에는 터키와 소련, 동독 등 동유럽 공산권의 지원으로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Kuzey Kıbrıs Türk Cumhuriyeti)이 들어섰고, 결국 다시 복권된 마카리오스 3세가 다시금 양측간의 중재를 위해 노력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결국 현재까지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로 남아있다. 2004년에 남북통일 투표를 한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리스계가 반대해서 결국 좌절되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남북키프로스의 주민들은 상호 왕래가 가능하며 남키프로스에서 일하는 북키프로스 주민도 많다.

3. 만약 그리스가 이겼다면?


그리스가 이겼다면 당연히 북키프로스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고 크레타와 마찬가지의 절차를 거쳐 그리스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키프로스의 터키계 인들은 추방될 수도 있다. 또한 전쟁의 승리로 요안니디스 군사정권이 연장되어 그리스의 민주화가 더 늦게 이루어지거나 독재가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다. 쟤수 옴붙었으면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이 그리스와 키프로스를 점령했을 가능성도 있어서 유럽판 베트남 전쟁이 되었을수도 있었다.

[1] 독립 당시 식민지종주국인 영국과 터키, 그리스 3국은 런던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키프로스를 그리스와 터키 양국이 후원하며, 만약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질 경우 그리스와 터키가 중재하는 것을 약속했다. 실제 전쟁당시 양국의 개입명분이 바로 런던 조약이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양측 민족주의자들간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2] 당시 그리스군도 친미국가라 터키와 마찬가지로 기어링급 구축함을 운용했기 때문에 오인하기 쉬웠다.[3] 애당초 전쟁에서 질 게 뻔하니까. 물론 터키가 그리스로 직접 쳐들어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결사 항전했겠지만 이 시점의 터키는 키프로스 장악 이상으로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