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죠 타츠히코
1. 개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외야 수비 겸 주루 코치. 재일교포 3세 출신이며 한국명은 김용언. 아버지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투수 출신인 킨죠 아키요[5] 이다.
본래는 이중 국적을 가졌었지만 2000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6]
2. 프로 입단 전
킨키 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투수이자 1번타자로 활약하며 2학년이 되던 해에 팀을 지역 예선 결승까지 이끌었다. 이때 만난 학교는 다름아닌 오사카의 야구 명문 고등학교였던 PL학원고등학교. 한창 마츠이 카즈오와 후쿠도메 코스케가 뛰고 있기도 했는데 결승에서 PL 학원을 꺾으며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팀은 탈락.
1994년엔 한국에서 열린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아라이 타카히로와 함께 재일교포 팀으로 방한했다. 그러나 대회 기간 한국에 있는동안 재일이란 이유로 한국사람 취급을 해 주지 않는다는것에 꽤나 억울해했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일본의 사회인야구팀인 스미토모 금속[7] 에 입단. 고교시절과 마찬가지로 투타를 겸업하며 팀을 일본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더불어 1997년엔 우수 선수로 뽑히는 영예까지 인았다.
1998년 드래프트에 참가해 5순위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투수로 입단했다.
3. 선수시절
데뷔 첫 시즌부터 곧바로 타자로 전향했으며 이 시기에 스위치 히터로 동시에 전향했다. 이 해 10월 3일에 데뷔 첫 출장을 했다. 출장 기록이 많지 않았기에 신인왕 자격은 유지한채로 시즌 종료.
2000년. 당시 요코하마 타선(일명 '''머신건 타선''')의 중추였던 주전 3루수 신도 타츠야의 부상과 2번 타자 겸 중견수 하루 토시오의 부진[8][9] 으로 인해 주로 대타로 나오다가 2번타자 겸 3루수로 주전자리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주전으로 도약한 이후 엄청난 타격 페이스를 선보이며 4할을 넘나드는 맹타를 휘둘렀다. 8월 18일 한신전에서 타율 .384로 규정타석에 도달했고 이후 페이스가 떨어지며 타율은 .346[10] 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타율 1위를 지키며 데뷔 2년만에 수위타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고 신인왕까지 수상했다. 이 신인왕은 구단 역사상 1977년의 사이토 아키오 이후 23년만에, 그것도 구단명이 베이스타즈로 바뀐 이래 처음일 뿐만이 아니라 1978년 요코하마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래 처음으로 나온 신인왕이었다.
2001년부터는 불안했던 3루수비를 보고 찝찝했던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뜻에 따라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전향. 풀타임 주전 외야수로 정착했다. 타율은 .271로 떨어졌으나 구단 최다 기록인 43희생타를 기록했다.
2002년엔 급작스럽게 체중감소 현상이 나타나며 타율이 1할대로 급락했고 주전에서 밀려나버렸다.
절치부심한 2003년엔 3할 복귀와 데뷔 첫 두 자릿수 홈런포를 기록하며 준수한 외야수로 활약했다. 이후 2005시즌까지 3년 연속 3할을 유지했고,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은 2007년까지 이어졌다.
2008년을 기준으로 성적이 요동을 치기 시작. 2009년엔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으며, 2010년은 2002시즌 이후 또다시 1할대를 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생길만큼 실망스러운 타격을 보였지만 간신히 1할은 피했다. 하지만 결국 2008년 이후로는 붙박이 주전 자리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2011시즌. 체중을 타격왕하던 시절 수준으로 불리며 시즌을 맞이해 타율이 .272로 다시 올랐다. 이후 2013시즌까지 300타석 가량을 들어서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2014시즌엔 구단 타이 기록인 8개의 끝내기 안타를 쳤지만 2013년에 비해 출전 기회는 크게 줄어들었고, 시즌이 끝난 뒤 구단에서 은퇴와 동시에 코치로 전임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FA를 행사해 요미우리에 입단한다. 등번호는 요코하마에서 달던 1번 대신 33번을 달았다.(당연하지만 요미우리의 1번은 그분의 영구결번이니..)
요미우리에서 맞이한 2015시즌의 출발은 괜찮았다. 4월 15일 친정팀 요코하마를 상대로 3점 홈런을 쳐내며 비수를 꽂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타격 페이스가 크게 떨어졌고 고작 36경기 출전에 그치며 시즌을 마감.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4. 기타
사실 킨죠의 응원가는 본래 전신인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1980년대 후반 주전 포수이자 심판, 관중, 상대방을 절묘하게 속이는 트릭 플레이로 유명했던 이치카와 카즈마사의 응원가였지만, 정작 이치카와 본인이 이 응원가를 써먹어 보지도 못한채[11] 은퇴하면서 주인이 없어졌다가 킨죠가 입단하면서 이 응원가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 킨죠의 응원가로 쓸 계획이었으나 킨죠의 응원가가 위의 응원가로 채택되면서 미사용된 CD용으로만 남은 응원가가 있다. 다만 2군 경기에서는 위의 응원가와 CD판 응원가를 교대로 불렀다고 한다.
원래 유튜브에 영상도 있었으나 삭제된 관계로 일단 가사만 올린다.
아베 신노스케가 현역 시절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웠던 타자 2위로 킨죠를 선택했는데[12] , 그 이유는 공 배합 같은것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동물적인 감각[13] 만으로 타격에 임하다보니 타격자세도 일정하지 않고 무슨 공을 노리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1] 과거 한국명은 김용언(金龍彦)[2] 드래프트 지명 당시에는 투수였으나 프로 데뷔 이후 타자로 전향했다.[3] 1993~2012년까지의 구단명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4] '''見せてくれ 見せてやれ 超スーパープレイを ハマの風に乗った 男の意地を''' (보여줘 보여줘 울트라 슈퍼 플레이를 하마의 바람을 탄 남자의 의지를)[5] 1966년 드래프트 번외로 킨테츠에 입단했지만 1군 출장 기록은 외야수 대수비로 1경기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2년만인 1968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6]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다.[7] 한때 신일본석유(현 JX-ENEOS), 토시바 다음으로 전국대회 타이틀이 9개 이상인 팀 중 하나였고 일본선수권 최다 우승 기록(7회)을 보유할 만큼 상당히 뼈대있는 야구부였지만 1999년 해체했다.[8] 결국 이 둘은 신도는 2000년 시즌 종료 후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하루는 2001년 시즌 도중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며 요코하마를 떠났고, 이와 더불어 머신건 타선의 클린업 트리오였던 로버트 로즈와 코마다 노리히로가 2000년 은퇴, 주전 포수였던 타니시게 모토노부가 2001년 FA로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면서 요코하마 역대 최고의 타선이자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교타선으로 불리던 '''머신건 타선'''은 종말을 고했다.[9] 나머지 머신건 타선 멤버였던 이시이 타쿠로와 스즈키 타카노리, 사에키 타카히로, 나카네 히토시는 팀에 남았지만 나카네는 출장기회가 줄어들면서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스즈키는 2000년을 기점으로 점차 기량이 떨어져 벤치로 밀려나면서 2008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시이와 사에키는 그나마 오랫동안 기량을 유지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두 사람도 각각 2008년과 2010년 시즌 종료 후 구단의 은퇴 권고를 거절하고 히로시마와 주니치로 떠나게 되면서 머신건 타선을 이끌던 주역들은 2010년을 끝으로 모두 팀을 떠나게 되었다.[10] 이 타율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일본 내 스위치히터 역대 최고 타율이기도 하다.[11] 이 응원가가 처음으로 나온 해가 구단명이 베이스타즈로 바뀐 1993년이었는데, 정작 이치카와는 그 해에 1군 출장 없이 2군에만 머무르다가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방출되어 은퇴했다.[12] 3위는 타이론 우즈, 1위는 이마오카 마코토를 선택했다.[13] 이런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야생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