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타카히로

 

'''아라이 타카히로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2016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2015년
야마다 테츠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7년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05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2004년
터피 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45홈런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43홈런'''

2006년
타이론 우즈
(주니치 드래곤즈)
47홈런
'''2011년 센트럴리그 최다 타점'''
2010년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29타점

'''아라이 타카히로'''
'''(한신 타이거스)'''
'''93타점'''

2012년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자이언츠)
104타점



'''아라이 다카히로
(新井 貴浩 / Takahiro Arai) ''' [1]
'''생년월일'''
1977년 1월 30일
'''국적'''
일본
'''출신지'''
히로시마히로시마나카[2]
'''포지션'''
1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 - 코마자와 대학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6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9~2007)'''
한신 타이거스 (2008~2014)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5~2018)'''
1. 개요
2. 선수 생활
2.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2.2. 한신 타이거스 시절
2.3. 히로시마 복귀
3. 기타
4. 연도별 기록


1. 개요


[image]
[3]
'''히로시마 도요 카프돌아온 탕아'''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자. 현역시절 등번호는 25번[4](히로시마 1기 ~ 한신) → 28번(히로시마 2기)→25번(2016~). 포지션은 기본적으로는 3루수였지만, 팀 사정상 1루수우익수로 뛴 적도 있다. 말년에는 주로 1루수로 출장했었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1994년 봉황대기 대회에 재일동포 팀으로 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5]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고,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도 몇 차례 선발되었다. 한국 이름은 박귀홍(朴貴弘).[6]
데뷔 초반부터 미래 카프의 4번타자 감으로 기대를 모았고 장타력도 뛰어나 타격은 괜찮았지만 불안한 수비로 감독 및 동료들, 심지어 팬들한테 까지 좋은소리를 못들었으나 점차 강도높은 훈련으로 마침내 완성형 타자로 기량이 성장하여 2005시즌에는 홈런왕과 베스트나인을 차지했고 2007년 시즌 종료후에는 처음으로 일본 국가대표에도 뽑혔고 FA자격을 취득하여 한신으로 팀을 옮겼다. 하지만 FA 이적 과정에서 말실수 논란 등으로 여러 곡절을 겪었고[7], FA이적한 한신에선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먹튀 취급을 받으며 평가가 다소 하락했으나 2014년 시즌 종료 후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연봉을 존나게 후려쳐가면서 복귀한 친정팀에서 다시 부활에 성공하며 팬들의 지지를 되찾고 팀의 암흑기 청산과 함께 3년 연속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여 리그 MVP도 차지하는 등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2. 선수 생활



2.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대학 시절까지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학 선배인 히로시마 카프의 레전드 노무라 켄지로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본인의 스윙을 보여주며 호감을 산 덕인지 하위 지명이지만 무사히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마 입단 2년차에 16개, 3년차에 18개, 4년차에 28개의 홈런을 치는 등 거포로서 착실히 성장해 나갔으며, 카네모토 토모아키FA한신 타이거스에 이적한 후에는 히로시마의 4번을 물려받았고, 05년에 3할의 타율, 43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 타이틀과 더불어 1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획득했다. 또한 이 해에 6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리는 등 여러 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8][9] 이후 2006년에는 25홈런 100타점, 2007년에는 28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카프의 주포로 맹활약했다. 2007시즌 후 아라이는 FA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평소에 팀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기도 했고, 2005년에는 '한 팀에서 선수 생활을 끝내는 게 이상적이다', 'FA? (나는) 그럴 선수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기에 카프 팬들은 그가 당연히 잔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라이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FA 선언을 해버리면서 히로시마를 떠나게 된다. 행선지는 히로시마 시절부터 따랐던 선배인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있는 한신 타이거즈.[10] FA 선언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FA 같은 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 '카프가 좋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이게 무슨 개소리야(...) 특히나 카프 팬들 입장에서는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라(...) 무지하게 욕을 먹었다.[11] 위에서 언급한 말 중 괴롭다는 말을 한 덕에 辛い(쯔라이)라는 별명도 생겨버렸다. 게다가 이후 자신을 욕하는 히로시마 카프 팬들에 대해 자신을 욕하는 팬들보다도 자신이 더 카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바람에 더더욱... 이에 몇몇 히로시마 카프 팬들에게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팬들이 J.D. 드류스캇 롤렌을 철전지 원수로 생각하는 것과 동급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된다. 그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과거 카프의 옛 홈구장이었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에 다른 선수들의 사인과 함께 그의 사인이 남아있었는데, 분노한 팬들에 의해 지워졌다.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철거를 앞두고 이 사실을 지역 방송사에서 보도하면서 한 시민을 인터뷰했는데, 그는 아라이의 이름을 끝내 언급하지 않고 '''"25번이었던 선수"'''로 부르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2.2. 한신 타이거스 시절



한신으로 옮긴 08년에는 초반에는 통산 1000안타를 기록[12]하고 고타율을 마크하는 등 호조를 보였지만, 후반기 접어들면서 요통을 호소하며 성적이 저하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해 아라이의 부상과 함께 한신의 역사적인 DTD도 함께 시작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한신은 한때 13경기 차까지 벌어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리그 1위를 내주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3위 주니치 드래곤즈에게마저 밀려버린다.(...) 타어강 항목 참조.
같은 해 호시노 센이치가 이끄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의 4번 1루수로 선발되어서 모든 시합에 선발 출장했지만, 역시 요통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였다고 하기 힘들다. 그러나 대한민국과의 예선전에서 2점 홈런을 쳐 대한민국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13]
한신에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계륵인데, 카네모토의 뒤를 이을 4번 타자 후보감으로 기대하고 데려왔음에도 신통치 않은 성적을 기록하는 바람에 한신 팬들 사이에서는 아라이의 보상선수로 나간 아카마츠 마사토를 아까워하는 의견도 꽤 많았다.[14] 한신 이적 후 08년에는 8개, 09년에는 15개의 홈런을 쳤는데, 홈런 숫자를 보면 나아지는 것 같을지 몰라도 20개의 병살타로 리그 병살타왕도 획득. 헌데 10년에는 카네모토의 부상 공백을 틈타 4번 자리에 안착, 112타점을 올리며 타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더니, 11년에는 93타점을 올리며 센트럴리그 타점왕에 등극했다. 하지만 12년에는 .250 9홈런 52타점으로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13년 6월 8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시합에서 역전 투런포를 날리며 통산 1000타점을 기록하였다. 그 해 올스타전에도 출장해 한신 선수로서는 7년만에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지만, 후반기에는 삽질을 거듭하다가 .267 15홈런 70타점으로 여전히 이름값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4년은 마우로 고메즈맷 머튼의 존재로 인해 대타요원으로 위상이 격하됐고, .244 3홈런 31타점으로 사실상 프로 입단 이후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시즌 후 연봉 1억 엔 삭감을 제시받더니, 결국 시즌 후 퇴단을 하게 되었다.#
한신 시절을 요약하면 짤없는 먹튀. 이미 히로시마에서는 금지어 취급을 받게 된데다, 한신에서도 타격이나 수비나 만족할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쉴드를 쳐주는 팬들도 적어서 일본 웹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야구선수로 등극해 버렸다. 심지어 고시엔 경기 때 타석에 들어서면 3구정도까지 팬들이 응원가를 안 불러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니폼 마킹은 많이 보였던 것으로 봐선 애정어린 까임이었던 것 같다. 워낙 기대치가 높았다 보니... 그러던 도중, 그의 기믹(?)이 되는 한 야구팬의 명언이 발굴되는데…

2.2.1. 아라이가 잘못했네, 아라이가!


정확한 유래는, 2012년 4월 11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의 한신카프의 경기. 카프의 선발이었던 후쿠이 유우야는 한신의 타자 크레이그 브라젤에게 깊은 몸쪽 공을 던진다. 다행히 공을 피해 몸에 맞지는 않았지만, 브라젤은 화를 내며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는데, 이 때 한 관객이 '''"아라이가 잘못했네, 아라이가! (新井が悪いよ、新井が!)"'''라며 야유를 외친다.
당시 아라이는 이미 2안타 4타점을 올렸으므로 한신팬이 야유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아마 아라이에 대한 원망이 식지 않은 카프팬이 외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어지는 "아라이가 잘못했데이 (新井が悪いで)"는 덤.[15] 약 11분간 경기가 중단된 끝에 브라젤의 퇴장으로 벤치클리어링은 마무리되었다.
아라이는 벤치 클리어링에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엉뚱하게도 욕을 먹었고, 당시 기대에 못 미치던 활약에 실망하던 한신팬들이 이 명언을 놓칠 리가 없다(…).
그 이후로, 한신팬들 사이에서는 한신이 에러를 내거나 난투극에 휘말리거나 하면 '아라이가 잘못했네(新井が悪い)'라는 코멘트를 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오죽하면 옛날 한국 웹에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농담조로 썼던 것처럼, 가끔은 한신과는 관련 없는 불상사가 일어나도 '아라이가 잘못했네'라는 댓글이 심심찮게 달렸을 정도.

2.3. 히로시마 복귀


2014시즌 종료 후 친정팀 히로시마로 복귀했다. 등번호는 28번으로 변경.
사실 처음에 히로시마와 계약할 거라는 소식이 있었을 때는 2000안타 기록을 위한 광고탑 비스무리한 계약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고 2천안타 달성을 할 때까지 묻지마 기용을 할 것 같다는 예상이 많아서 까였으나[16], 대폭 삭감되긴 했어도 7천만엔을 제시했던 한신의 오퍼를 거절하고 히로시마와 고작 '''2천만엔'''[17]에 계약했다는 발표가 되면서 여론이 반전, "연봉도 적으니 삽질하더라도 팀에 큰 피해는 없을 테고 만에 하나 부활해서 유종의 미를 거둬준다면 더 좋지" 라는 의견으로 바뀌었다. 입을 잘못 놀려서 그렇지 확실히 카프에는 상당한 애정이 있다고 봐야 할 듯. 10여년 만에 암흑기 시절 투타의 기둥을 함께 이뤘던 쿠로다 히로키와 카프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에 들어선 2015년 초반에는 예상을 뒤엎고 3할을 넘는 타율과 9할에 육박하는 OPS를 기록하면서 맹활약, 4번 타자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6월 4일에는 자신의 통산 1900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275 7홈런 57타점 OPS .733. 통산 1971안타로 시즌을 마감하며 2000안타까지 불과 29안타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친정팀에 복귀해 2천안타를 달성하고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길은 확보해놓게 되었다. 팀 내 타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 역할을 해준 것은 덤. 시즌이 끝난 뒤 원래 등번호였던 25번을 되찾았다.
2016년 4월 26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2000안타를 달성해 명구회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4월 28일 현재 타율 .320, 출루율 .383, 장타율 .392(OPS .775)의 괜찮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주전 1루수로 꾸준히 출장중이다. 노쇠화로 인해 장타력이 많이 떨어지면서 예전처럼 시원시원한 장타는 많이 안 나오고 장타율도 4할을 못 넘기고 있지만 득점권 타율은 4할을 상회하는 등 적절한 클러치 히팅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6월 이후로 주로 5번타자 1루수로 출전하고 있다. 브래드 엘드레드가 부상으로 이탈한 4번 타자 자리를 교타자 헥터 루나가 채우면서 '''테이블 세터가 4명'''이 되어버린 히로시마 타선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후반기 첫 1, 2차전에서 모두 밀어서 홈런을 터뜨리며 아직 장타력이 죽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있다. 7월 19일 기점으로 홈런도 1개만 더 치면 통산 300홈런이 된다. 그리고 8월 2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원정경기에서 2회 초 풀카운트 때 2점 홈런을 터뜨리면서 선제타를 기록함과 동시에 드디어 통산 300홈런을 기록했다. 그 뒤 팀이 2점홈런 2개를 포함해 17안타나 터뜨리면서 16-4로 대승했다.
9월 10일 현재 '''타점 부문에서 센트럴리그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말년을 불태우는 노장.
[image]
경기 종료 후 헹가래를 받는 아라이.
9월 10일, 팀이 25년만에 센트럴리그를 우승함으로써 선수 생활 첫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18] 2016시즌 최종 성적은 .300 19홈런 101타점 OPS .857. 한 때 선두를 달렸던 타점 부문에서는 츠츠고 요시토모야마다 테츠토에게 밀리면서 3위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베테랑으로서 더할나위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2016년 카프 돌풍의 구심점으로 맹활약하며 39세의 나이로 2016년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했다. 이는 센트럴리그 역대 최고령 MVP 기록이다.[19] '''2000안타, 300홈런, 리그 우승, MVP'''의 굵직굵직한 마일스톤을 쓸어담으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MVP를 수상하며 올시즌 센트럴리그 최고의 타자들인 44홈런-110타점 2관왕 츠츠고 요시토모, NPB 최초의 2년 연속 트리플 쓰리를 기록한 야마다 테츠토 등을 모두 제쳤다는 점은 논란거리로 남았다. 물론 일본프로야구 정규시즌 MVP는 리그 신기록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 리그 우승팀에서 배출하는게 관례지만[20][21] 같은 팀 내에도 1.0의 OPS 와 29홈런-95타점을 기록한 스즈키 세이야나 사와무라상 수상자 크리스 존슨 등이 있었다. 베테랑 예우 차원에서 기자들의 득표가 몰렸다는 것이 중론.[22]
2017 시즌에도 팀의 최고참으로서 한때 소속했던 한신 타이거스와의 개막전에 무려 4번타자로 출전했으나, 개막 3연전에서 첫날 추격의 솔로홈런과 마지막날 2루타친거 외엔 찬스마다 국밥을 쳐말아 드시고있어 카프팬들의 혈압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한신과의 3연전 이후 타격감이 귀신같이 살아나며 타점을 쓸어담고 있다. 백미는 4월 12일 요미우리와의 2차전에서 터뜨린 연타석 홈런.
실력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노장 선수로서 체력의 한계가 있고, 1루수 포지션에 브래드 엘드레드[23]나 왼손 강타자 마츠야마 류헤이[24], 신예 육성형 외국인인 하비에르 바티스타 등 타격력을 갖춘 경쟁자들이 대두하면서 후반기부터는 대타 기용이 많아지고 선발 출장 기회가 줄었다. 그래도 .292/.389/.491 OPS .850의 작년과 다를 것 없는 준수한 비율스탯에 9홈런 48타점을 기록하면서 쏠쏠한 활약을 이어나갔으나...
2018년 9월 4일,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우연의 일치로, 7연승을 하던 카프가 하필 은퇴 선언 이후 6연패를 당하면서 아니나다를까 '''"아라이가 잘못했네"'''라며 애정 어린 까임을 받기도. 그래도 그 이전에 이미 난장판 순위경쟁을 벌인 센트럴리그에서 홀로 승패마진을 벌어둘 대로 벌어진지라 가뿐히 구단 사상 첫 리그 3연패를 달성했지만, 2018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이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투타 엇박으로 2010년대 최강팀의 홈에서 영혼까지 털리면서 결국 2년 전 은퇴한 선배 쿠로다 히로키와 마찬가지로 일본시리즈 우승은 이루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3. 기타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2:1 상황에서 9회 대타로 나와 한신 시절 팀 동료로 만나게 될 오승환과 맞붙었다.
  •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일본프로야구 선수회 7대 회장을 지냈다.
  • 아내는 전직 아이돌로 "혹시 아들이 태어난다면 야구를 시키겠다"고 할 정도의 야구광이라고 한다.
  • 3루수였을 때에는 실책왕의 기록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수비가 조잡하다(粗い:아라이)'는 평을 들어서 '아라이'라는 성과 엮여서 곧잘 놀림을 받았다. 아예 감독한테 "아라이는 수비가 성하고 똑같이 '아라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 1루로 옮긴 지금은 무난한 평을 받고 있다.
  • 여러모로 한국의 홍성흔과 닮은 점이 많다. 둘다 76년생 용띠로 1994년 봉황대기에도 같이 출전했고 대졸신인으로 1999년에 프로에 입단했으며, 2006년 WBC에서도 각각 한국, 일본대표로 같이 출전했고, FA선언으로 친정팀을 떠나보기도 했고 다시 돌아온 거랑, 둘 다 리그 내에서 수준급으로 알려진 빠던 실력도 가지고 있다. 거기다 경솔한 말실수로 팬들에게 까인 것까지! 그러나 말년에 기량저하가 눈에 확 띄었고, 부전드 발언 등의 말실수로 팬들에게 까인 것도 모자라 두산 복귀후 팀 분위기를 망치고 있던 장본인이었다는 게 드러나[25] 팬들에게 이제까지의 호감을 잃고 온갖 욕을 처먹으며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은퇴하게 된 홍성흔과 달리, 이 쪽은 비록 말실수를 하고 한신 시절 기대에 썩 미치지 못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후에 한신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한신 시절보다 극히 적은 연봉으로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왔고, 복귀 후 부활에 성공해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리그 MVP를 탈 정도의 좋은 말년을 보내며 히로시마 팬들에게도 지금까지의 앙금을 털고 다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무지막지한 병살타 갯수. 아라이가 2016년까지 231개, 홍성흔이 230개로 갯수도 비슷하다.
  • 친동생인 아라이 료타(한국명 : 박양태)도 야구 선수로, 2011시즌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한신으로 이적하게 되어 형제가 같은 팀에서 뛰는 드문 케이스[26]가 되었다. 2012년에는 동생쪽이 포텐폭발(이라기 보단 주전중 거포들이 다 시망이라 밀려 올라간 감이 있지만)하는 바람에 동생에게 4번타자 자리를 내주는 훈훈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만 동생의 주전 기회는 한 해 반짝으로 끝났고, 대타와 2군을 전전하던 끝에 결국 료타가 2017년을 마지막으로 형보다 먼저 은퇴했다.
  • 한신 시절 료타의 등록명은 新井良(좋을 량)였는데, 위의 "아라이가 잘못했네"와 엮여서 타카히로의 등록명은 新井悪(나쁠 악)이 되어야하는 것 아니냐는(…) 개드립이 있었다. 당연히 당시 등록명은 新井貴.
  • 케모노 프렌즈가 유명해지자 이 선수와 관련해서 카프 의 위기인것이다!라는 드립이 나오고 있다. '파크의 위기' 드립을 치는 캐릭터인 아라이상과 아라이 타카히로가 이름이 똑같기도 하고, 아라이상 캐릭터가 조연임에도 인기 캐릭터이며 히로시마 카프도 성적이 좋아지며 인기가 늘자 관련 네타가 늘어났다. FA로 한신에 이적하며 한 '츠라이' 드립도 아라이상 관련 네타로 수입될 정도,
  • 정신수련의 일환으로 2005년부터 매년 새해마다 밀교 사찰에 가서 '호마'(護摩)란 의식을 치룬다.[27] 2004년의 부진을 안타까워한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권유한 것이라고.
  • 인터넷 상에서는 개그 캐릭터 취급을 당하는 일이 많은데, 본인도 개그 욕심이 있는 것 같다. 2018년 리그 우승 축승회에서 "2차는 구로다네 집에서 합시다, 물어보니까 300명 정도 들어간댑니다"[28]라며 농담했는데, 다음 날 시합 전 인터뷰에서는 "270명 정도 모였네요. 구로다도 좋아해줬습니다."[29]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에 구로다는 "기다렸는데 안 왔다"며 받아쳤다고.
  • 2018년 12월 TBS테레비와 전속 해설위원 계약을 맺고 2019년부터 해설자로 데뷔한다.
  • 야쿠르트 소속의 아라키 타카히로와 이름이 매우 비슷하다.

4. 연도별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99
히로시마
53
105
21
2
1
7
14
14
1
8
31
.221
.288
.484
.773
0.2
2000
92
233
51
6
0
16
26
35
3
18
54
.245
.318
.505
.822
0.5
2001
124
354
89
12
0
18
38
56
2
36
86
.284
.363
.495
.858
1.3
2002
'''140'''
559
147
28
2
28
63
75
1
38
124
.287
.342
.514
.855
2.2
2003
137
537
115
20
2
19
58
62
2
39
120
.236
.299
.402
.700
-0.1
2004
103
294
69
10
1
10
36
36
3
29
55
.263
.340
.424
.764
0.4
2005
142
587
165
30
1
'''43'''
91
94
3
37
126
.305
.353
.603
.956
4.7
2006
'''146'''
611
169
23
2
25
78
100
1
32
117
.299
.336
.479
.814
2.9
2007
'''144'''
619
161
22
0
28
84
102
1
55
136
.290
.351
.480
.831
3.2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8
한신
94
410
112
22
4
8
54
59
2
35
83
.306
.371
.454
.824
2.5
2009
'''144'''
599
145
32
1
15
68
82
4
28
82
.260
.299
.401
.700
1.4
2010
'''144'''
641
177
42
0
19
96
112
7
52
89
.311
.374
.484
.859
3.3
2011
'''144'''
602
148
25
3
17
68
'''93'''
5
41
106
.269
.321
.418
.739
3.2
2012
122
493
115
25
0
9
46
52
1
30
85
.250
.296
.363
.659
-0.1
2013
140
548
127
20
0
15
60
70
2
60
110
.267
.350
.403
.754
1.8
2014
94
194
43
6
0
3
13
31
0
15
33
.244
.309
.330
.639
-0.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15
히로시마
125
480
117
22
2
7
52
57
3
48
73
.275
.348
.385
.733
1.5
2016
132
513
136
23
2
19
66
101
0
54
101
.300
.372
.485
.857
3.6
2017
100
288
71
14
0
9
36
48
2
40
56
.292
.389
.461
.850
2
2018
63
132
25
3
1
4
7
24
0
14
26
.219
.295
.368
.664
-0.4
'''NPB 통산
(20시즌)'''
2383
8799
2203
387
22
319
1054
1303
43
709
1693
.278
.339
.453
.792
33.4

[1] 한국명은 '박귀홍'이다.[2] 참고로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있었던 곳이다.[3] 히로시마 복귀 첫 해인 2015년도의 사진이다.[4] 前 주인이 현재 히로시마 1군수비주루코치인 야마다 가즈토시. 본래는 고향팀 주니치에서 데뷔했으나 아들출산직후 히로시마로 트레이드 되어서 95년에 홈런12개를 치면서 커하를 찍었다가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다. 주니치 입단동기생이 본인보다 무려 20년 더 선수생활한 야마모토 마사이다. 아들이 해적전대 고카이쟈에서 고카이 블루를 맡은 야마다 유우키. 아들인 유우키도 본래는 아버지 모교에서 선수생활 했을만큼 야구선수를 지망했으나 부상을 입어서 그런지 일찍 접고 말았다. 박귀홍이 은퇴한 현재 히로시마의 25번은 임시결번상태다.[5] EBS 다큐 '불멸의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출처. 이대회 출전자들 중에 레전드급이 흘러넘치는데 이승엽, 임창용, 홍성흔, 박정진, 박진만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중에 박정진만 빼고 WBC나 일본리그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6] 박동희가 재일한인 야구계의 거목인 한재우 옹을 취재했을 때 언급됐던 아라이 타카히로의 한국이름이다. 이 기사가 게재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 한국이름이 박귀호로 알려졌다. 여담으로 '귀홍'도 훈독을 하면 '타카히로'로 읽는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이적한 직후 히로시마와의 첫경기때 박귀홍이 출루하고 한국어로 대화한적이 있었다. 아마 봉황대기 대회에 이승엽도 출전한적 있어서 그런듯하다. 둘은 사실상 동갑내기인데 박귀홍이 빠른 77년생이다. 이승엽도 1년뒤 25번을 달면서 2007 시즌때 4번타자로 맞대결을 2년연속으로 하게 된다. 한신가서도 25번 달았는데 이승엽의 팀직속후배인 오승환의 동료가 되었다. 참고로 박귀홍으로 쳐도 리다이렉트된다.[7] 처음에는 잔류할것처럼 말하다가 나중에 후회할거같다고 발언해 결국 FA를 선언하고 한신 이적후 처음으로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방문했는데 자신의 히로시마 시절 유니폼이 불태워진채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후로 히로시마 팬들에게 "우리 핑계대지말고 입좀 그만털어라" 라는 식으로 모욕까지 당해 금지어취급까지 받았었다[8] 일본 기록은 랜디 바스, 오 사다하루의 7경기 연속 홈런이 최다다.[9] 하지만 당시 홈구장이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작은 크기 때문에 홈구장 버프의 거품이란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에서는 히로시마 시민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시절 제작진들이 히로시마 선수들의 홈런수에 비해서 장타력을 제법 너프시키는 경향이 있었다.(2009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로 이후엔 그런 건 없다.) 아라이는 한신 이적 후 40+홈런은 커녕 20개를 넘기기도 버겁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요통으로 인한 타격폼 변경과 나이로 인한 노쇠화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히로시마 시민구장보다 넓은 한신 고시엔 구장을 홈으로 쓰게 된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상승기류 때문에 구조적으로 타구가 뻗어나가는 도쿄돔의 홈런을 돔런이라고 부르듯이,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홈런을 탁런이라고 부르는 국내팬들도 있다.[10] FA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선언했으면 무조건 한신 간다 라는 걸 다른 팀들도 다 알아서 제대로 접촉도 하지 않았을 정도다.[11] 이 발언들에 대해선 팀의 대선배인 오가타 고이치가 나가는 선수가 그런 발언을 하는것은 맞지 않다고 깠다. 오가타는 이전 FA상황에서 요미우리를 비롯한 여러 팀에게 열렬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가족과 팀 동료를 위해 카프에 남아 더더욱 비교되는 상황.[12] 같은 날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13] 공교롭게도 1994년 봉황대기 동기생인 이승엽도 삽질을 오지게 하다가 준결승전에서 좌완킬러인 이와세 히토키를 분쇄하는 역전결승투런을 치면서 류현진1000억에 가까운 잭팟을 터뜨리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14] 덤으로 아라이의 백업으로 3루를 보다 오릭스 버팔로즈로 간 외국인 타자 아롬 발디리스도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며 이쪽도 아까워한 팬들이 있었다.[15] 영상의 1분 52초에는 등번호가 겹쳐셔 순간적으로 334로 보인다던가, 4분 44초에는 "후쿠이! 맞춰버려! (福井!当てたれぇ!)", 5분 44초에는 별 상관도 없는 "베이스타즈! 베이스타…", 7분 50초에는 "아라이, 니가 꺼져라 인마 (新井、お前が帰れやおらぁ)"도 들리는 등 명대사가 가득하다(...)[16] 사실 아래에 적혀 있듯이 홍성흔과 비교하는 것은 아라이에게 엄청난 실례인데, 아라이는 말실수가 생각보다 강해서 문제였지 '부전드 사건'을 일으킨 홍성흔처럼 "내가 히로시마에선 욕먹지 오사카에선 레전드잖아" 같은 발언을 하진 않았고, 홍성흔처럼 꼰대짓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참고로 홍성흔과는 1994년 봉황대기에 같이 출전한적이 있다. 다만 상대팀으로 말이다.[17] 이 정도면 1군 최저연봉에 가깝다. 일본 프로야구 1군 최저연봉이 1500만엔이다.[18] 2014년 일본시리즈를 경험하긴 했으나 시즌 순위는 일단 2위.[19] 이전 센트럴리그 기록은 38세의 나이로 세리그 MVP를 차지한 2011년 주니치 드래곤즈와다 가즈히로. 일본 기록은 1988년 퍼시픽리그 MVP 카도타 히로미츠의 40세이다.[20] 극단적인 사례가 1994년의 센트럴리그. 당시 리그 1위의 요미우리 구와타 마스미가 ERA 2.52, 207⅓1이닝, 14승11패, 175탈삼진의 A클래스팀 에이스 수준의 성적임에도 리그 2위 주니치 소속으로 '''홈런-타점 2관왕'''(38-107)에 .310 타율의 타이호 야스아키, ERA3.48, 214이닝, 19승 8패에 '''사와무라상'''의 야마모토 마사를 모두 제치며 MVP를 수상했다.[21]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리그 꼴찌팀 출신으로 MVP를 수상했는데, 그 해 발렌틴은 '''60홈런을 쳐서 일본야구의 성역과도 같던 오 사다하루의 한 시즌 55홈런 기록을 깬 위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리그 우승팀 이외의 팀에서 MVP를 배출한 것이 '''39년만'''. 그 39년 전의 비우승팀 MVP도 트리플 크라운에 NPB 단일시즌 최고 OPS를 기록한 오 사다하루였다. 이 정도 업적은 있어야 NPB에서 리그 우승팀 이외의 팀 선수가 MVP를 받을 수 있다.[22] 실제 1987년 센트럴리그에서도 우승팀에는 3할 30홈런 100타점 OPS 10할에 육박하는 누가봐도 MVP 스탯을 찍은 하라 타츠노리가 있었지만 은퇴를 앞두고 .273 22홈런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주전 포수 야마쿠라 가즈히로에게 MVP가 수여된 적 있다. 1997년에도 보다 쟁쟁한 성적을 거둔 타자나 투수들을 제끼고 우승팀 야쿠르트의 팀 리더 후루타 아츠야가 MVP를 딴 사례가 있다. 이쪽은 아예 쇼리키 마쓰타로상까지 노무라 카츠야 감독을 제치고 받았을 정도이니...[23] 이쪽도 만 37세의 적지 않은 나이인데다 키 2m, 몸무게 120kg에 육박하는 거구에 부상 전력까지 많아 계속 좌익수로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24] 좌상바 배드볼히터지만 정교함과 파워를 갖추었다. 하지만 외야수비가 좋지 않다.[25] 대학 시절 오재원을 구타한 걸 미담이라고 인터뷰했으며, 억지로 주장 자리에 앉힌 것, 유희관의 점퍼를 훔쳐(!!) 친한 기자에게 줘 버린 것과, 결정적으로 위의 부전드 발언 등.[26] 2012년 기준으로 주니치의 도노우에 타케히로-나오미치 형제, 롯데의 오오미네 유타-쇼타 형제, 야쿠르트의 사토 요시노리-타카노리(육성선수). 히로시마의 나가카와 카츠히로-미츠히로(육성선수)가 형제 선수로 같은 팀에서 뛰고 있었다. 현재는 모두 해체.[27] 원래는 힌두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당 가운데에 불을 지펴놓고 불경을 외우는 의식이다.[28] 二次会は黒田博樹さんの家でやりますので。聞いたら300人以上入れて大丈夫らしいし。[29] (集まったのは)270人くらいですかね。黒田さんも喜んでくれ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