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호시 노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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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카호시 노리히로(赤星 憲広)
생년월일
1976년 4월 10일
국적
일본
출신지
아이치 현 카리야 시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학력
아이치 현립 오오부 고등학교 - 아지아대학
프로입단
2000년 드래프트 4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2001~2009)
'''2001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신인'''
2000년
킨죠 타츠히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타이거스)'''

2002년
이시카와 마사노리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1~2005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2000년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44도루

'''아카호시 노리히로'''
'''(한신 타이거스)'''
'''39도루(2001년)
26도루(2002년)
61도루(2003년)
64도루(2004년)
60도루(2005년)'''

2006년
아오키 노리치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41도루
1. 개요
2. 선수 시절
3. 플레이 스타일
4. 기타


1. 개요


일본의 前 야구 선수. 한신 타이거즈중견수테이블 세터였으며, 한신 팬들 사이에서 대단히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선수였다.
성인 아카호시(赤星)는 한자로 '붉은 별'이라는 의미라, 레드 스타라는 별명이 있으며, 팬 이미지에서는 '빨간색', '3배 빠르다'와 엮어서 샤아 아즈나블로 그려지거나 한다.[1]
선수시절 사용했던 등번호가 53번으로, 이대형과 같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빠른 발을 주무기로 삼아 리드오프로 활약하며 도루왕을 여러 번 수상한 것, 주 포지션이 중견수라는 것까지 놀랍도록 일치한다!

2. 선수 시절


아지아대학 출신. 원래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사회인으로 참가[2]했으나 좋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에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한신 감독이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발 빠른 놈이 부족하니, 하나 건져보자'''는 의미로 4순위에서 뽑은 선수. 실제로 '9회말 동점 만루 상황에서 대주자로 쓸란다'는 코멘트도 했었다고 한다.[3]
마침 한신의 주전 중견수였던 신조 츠요시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메츠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던 때 입단했으며, 입단 기자회견에서 '신조 선배의 빈 자리는 내가 채우겠다!'고 발언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신조 선배의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하려다가 잘못 말한 거라고 한다.
그리고 '''입단 1년차에 도루왕, 신인왕, 골든글러브를 수상''', 자신의 발언대로 신조의 빈 자리를 훌륭히 채웠다. 이후 '''5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며 일약 한신의 1번 중견수 자리에 자리잡았다.[4] 팀배팅을 중시한 타격과 미칠 듯이 빠른 다리를 살린 수비주루로 03년, 05년 팀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03년에는 수비율 10할을 달성하기도 했을 정도.
2003년부터는, 그 해에 자신이 기록한 도루 수만큼의 휠체어를 병원이나 양로원에 기증해왔다. 간호사였던 누나에게 '병원에 휠체어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일, 그리고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이었던 프로야구선수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꿈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자신의 희망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5]
그러나 작은 체구와 허슬 플레이 때문에 은근히 유리몸 기질을 보이며 부상에 시달렸으며 결국 09년은 시즌 도중에 전선에서 이탈했다.[6]정밀 조사 결과 목과 척추에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다(중심성척추손상). 또 같은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간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상황이라 구단측에서는 은퇴를 권고했으며, 결국 동년 12월 9일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한신 외야수비의 중핵이었던 아카호시가 갑자기 은퇴함에 따라 불어닥친 후폭풍이 꽤 거셌는데 은퇴 후 몇 년간 한신의 외야 수비라인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노쇠화로 인해 수비가 나쁜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10년에 입은 어깨부상으로 그야말로 소녀어깨가 되어 버렸지만 연속출장기록 및 센트럴리그지명타자 제도가 없다는 점 때문에 꾸준히 좌익수로 기용되던 상황. 연속출장 기록이 중단된 이후에도 수비를 나설 경우 좌익수로 기용되었다. 게다가 역시 수비가 좋지 않아 좌익수에 적합한 맷 머튼우익수를 보고 중견수는 신인급 선수들이 돌아가며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 덕에 현재 한신팬들이 가장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통산 1127경기 출장 타율 .295 1276 안타 117 2루타 36 3루타 381 도루[7].

3.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올드스쿨 리드오프. 키 170의 단신으로 호리호리하다 못해 깡말라보이는 외모를 지녔으며 이미지대로 '''발 하나는 미치게 빠르다(...)'''.
3할 타율을 5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컨택 능력이 괜찮았지만, 타격은 갖다 맞춘 뒤 발로 뛰어나가는 전형적인 슬랩히터라 은퇴할 때까지 9년동안 근 5천타석 섰음에도 불구하고 '''홈런이 고작 3개(...)에 단 한 시즌도 장타율 4할을 넘겨본 적이 없다.''' 연속 타석 무홈런 일본 기록도 갖고 있다. 대신에 발로 만든 3루타는 제법 많으며, 사사구도 적지 않게 얻어냈기에 출루율도 높아서[8] 리드오프를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노쇠화한 카네모토 토모아키, 히야마 신지로, 이후의 사쿠라이 코다이 등 전반적으로 수비범위가 넓지 않은 선수들이 주로 포진한 한신 외야에서, 중견수로서 빠른 발을 살려 호수비를 많이 선보였다. 미칠 듯한 질주에서 이어지는 러닝 캐치는 속이 다 후련해질 정도. 다만 다이빙 캐치나 슬라이딩같은 허슬 플레이를 즐겨하다 보니 잔부상에 시달리다 결국 선수생명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척추 손상을 입으며 전성기에 강제 은퇴를 하게 된 비운의 선수.[9]
아카호시의 통산기록

4. 기타


현재는 야구평론가이자 야구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한신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휠체어 기부 등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 인품도 좋은 선수였지만, 의외로 불 같은 면이 있는지 방송 카메라 앞에서 관객을 향해 대놓고 분노를 표출하는 사건을 저지른 적도 있다. 2008년 5월 25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9회 역전 2타점 적시타를 치면서 경기 MVP로 선정된 아카호시가 히어로 인터뷰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원정팀 선수가 히어로 인터뷰를 할 때에는 장내 마이크를 켜지 않기 때문에 관중석에서는 인터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 이 때문에 어느 관중이 '하나도 안 들린다!'며 농담성 야유를 던지자 이에 아카호시가 '''"(마이크가) 안 들어가 있다고, 이 자식아!(入ってねんだよこの野郎!)"'''라고 일갈한 것.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질문 전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 없는 거친 말을 방송 마이크에 잘 들릴 정도로 지르는 모습이 정말 뜬금없게 보인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기자는 마이크를 뺄 수도 없었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18기 이차원의 저격수에서는 성우로 나왔다.
야구선수였지만 엄청난 축빠로 알려져있다. 은퇴 후에는 평론가의 지위를 이용해서 J리그 취재나 월드컵 특집등에 나와서 코멘트를 하는 등 축빠기질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축구선수들과 인맥이 야구선수보다 두텁다는 반쯤 진담이 돌아다닐 정도.

[1] 실제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마이라이프 모드에서 종종 정말로 '''레드 스타'''로 등록명을 바꾸는 경우가 있었다(...)[2] 당시 소속팀은 JR 히가시니혼 야구부. 그래서인지 JR 히가시니혼 열차 차장 자격도 땄다고 한다.[3] 이후 노무라 감독은 아카호시 외에도 후지모토 아츠시, 오키하라 요시노리 등 팀 내의 발빠른 유망주 7명을 묶어 'F1 세븐'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했다. 80년대 다이요 훼일즈에서 활약한 타카기 유타카-카토 히로카즈-야시키 카나메의 '슈퍼카 트리오'의 활약에 빗댄 표현이자 상위호환을 목표로 한 표현.[4] 2003년까지는 중장거리형 타자였던 2루수 이마오카 마코토가 1번 타자였고 아카호시는 2번에 주로 배치되었다. 본격적으로 리드오프맨이 된 것은 이마오카가 클린업 트리오로 이동한 2004년부터였다.[5]한화 이글스 소속 이용규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꿈의 높이는 자로 잴 수 없다. [6] 특히 9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무리해서 잡으려다가 다친 것이 결정타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vzgqWNHR9U [7] 일본프로야구에서 헤이세이 시대에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아카호시였다. 타국 리그 성적까지 합치면 500도루를 넘긴 스즈키 이치로라는 넘사벽이 있지만.[8] 통산 출루율이 .365로 타율보다 7푼이 높고 출루율 커리어 하이는 2008년의 .398. 이 해엔 심지어 홈런을 하나도 치지 못했다! 슬래시라인은 .317/.398/.347 OPS .745로 무홈런 타자 주제에 웬만한 두자릿수 홈런 타자 수준의 OPS를 기록했다.[9] 발빠른 외야수로 오랜 선수생활을 한 후쿠모토 유타카가 해설자로 아카호시의 플레이를 보며 자주 지적했던 부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우려가 그대로 실현된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