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노스케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포수이자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슬러거 포수 였으며,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이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후보인 요미우리 순혈 슈퍼스타.[2] 다만 한국에서는 국대 경기때마다 털리는 호구 이미지가 왠지 강한 편(…). 그래도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던 2006~7시즌을 비롯 요미우리 소속 선수 시절 내내 요미우리의 주전 포수였고 주로 이승엽의 다음 타석인 5~6번 타자로 많이 출전했기 때문에 당시 국내에 꾸준히 생중계 되었던 이승엽 출전 경기를 종종 보았던 팬들은 잘 알고 있는 선수이다.
2. 아마시절
주오대학 시절부터 도토 대학야구리그에서 타격으로 주목받았다. 대학시절에 이미 1998 방콕 아시안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 등 프로-아마 통합으로 구성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될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결국 2000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1순위로 지명됐다.
3. 프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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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시절의 야구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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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선수는 마쓰이 히데키.
데뷔시즌인 2001년, 야마쿠라 카즈히로 이후 요미우리 구단 사상 2번째로 신인 포수로서 개막전 마스크를 쓰는 위업을 달성한다. 데뷔 첫해부터 10년 동안 주전포수로 활약한 무라타 신이치를 벤치 멤버로 보내버렸고, 무라타는 시즌 후 바로 은퇴해버렸다...[3] 데뷔시즌인 2001시즌 성적은 0.225, 13홈런 44타점으로 뭔가 2%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2년차인 2002시즌에는 0.298 18홈런 73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수비력도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아베의 활약에 힘입은 요미우리는 센트럴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에서도 세이부 라이온즈를 4:0으로 떡실신시켜버렸다.
2003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93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이듬해인 2004년에는 33경기만에 시즌 20홈런을 기록[4] 하는 등 타격에 완전히 눈을 뜬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후반기에 페이스가 급격히 저하되며 최종 성적은 0.301, 33홈런 78타점에 그쳤(?)지만 요미우리 역대 포수 중 최초로 30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된다. 2005시즌에도 26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공격을 주도했지만, 2006시즌에는 10홈런에 그치며 데뷔시즌 이후 가장 저조한 타격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팀의 주장을 맡은 2007시즌에 33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부활했고, 2008시즌에는 24홈런, 2009시즌에는 32홈런을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2009시즌에는 팀이 7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본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2010년에는 무려 '''44홈런'''을 때려내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노무라 카츠야, 타부치 코이치에 이어 단일시즌 40홈런을 기록한 역대 세 번째 포수가 된다.
2011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시즌을 다소 늦게 시작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0.292, 20홈런, 61타점의 성적을 기록한다. 공인구의 변경으로 인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훌륭한 성적이었고, 5년 연속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2 시즌에는 '''타율 0.340 출루율 .428 장타율 .565 OPS .993 27홈런 104타점'''이라는, 저반발 공인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적[5] 을 기록하며 데뷔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타격왕, 타점왕)을 거머쥐었고,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득표로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하고 일본 야구계 최고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도 받으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13 WBC에서 일본 대표팀의 '주장, 4번타자, 주전 포수'로 낙점받았으나, 중압감 때문인지, 시즌 초라 아직 몸이 덜 풀렸던 탓인지, WBC 기간 동안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시즌 들어가서는 135경기 0.296, 32홈런, 91타점으로 팀내 홈런 1위, 타점 1위를 차지하며 여전한 강타자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서는 22타수 2안타 타율 0.091로 부진하며 라쿠텐에게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시즌 이후 구단측에서 마쓰이 히데키의 6억 1천만엔을 넘는 연봉 6억 2천만엔을 제안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부진했다는 이유로 고사했다고 한다. 이후 6억엔에 합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4년 들어서 부진하면서 신인 포수 고바야시 세이지에게 밀리고 8월부터 1루수 출전을 시작하게 됐다. 1루수로 출전하면서 성적이 조금씩 반등하는 중. 사실 이동안에도 줄곧 4번 타순에 들어섰는데 2014년도 요미우리 타자진 상황이 영 좋지 않기 때문이다.[6]
결국 2014 시즌이 끝나고 하라 감독과 면담을 한 이후 1루수로 완전히 전향을 선언했다.
2015년 4월 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 경기에서 오래간만에 포수 포지션으로서 경기에 출전했다. 이유는 올해 FA로 영입한 대형 포수 아이카와 료지[7] 가 지난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다리 근육 부상을 입어 주전 포수 자리가 부재중인 상태라는 비상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날 경기가 중요했던 것이 팀의 3연패라는 좋지 못한 흐름을 끊어야 되는 경기라는 부분도 있지만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요미우리의 최고 라이벌 팀 한신을 상대로 상대전적 1000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경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승리를 잡아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결국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베에게 포수 역할을 부탁한 것. 그리고 아베는 감독의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땐 1회 말 니시오카 츠요시의 도루를 저지해냈고 타격 쪽에선 4타수 2안타(그 중 하나는 2루타)라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팀은 패해 버렸다. "연패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팀이 져버려서 아쉬웠다"라는 것이 경기 후 코멘트. 여담으로 아베는 혹시 몰라 포수 장비를 집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날 경기에서 예전 포수 장비를 갖추고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1루수보다는 포수로 출전한 빈도가 훨씬 높았고, 이를 두고 네이버에 일본야구 칼럼 리포트 쓰는 키무라가 칼럼 한 편을 통째로 써서 까기도 했었다. 그러나 교류전 도중 목 부상이 재발,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2015년 시즌의 성적(타율 .242 15홈런 47타점)이 썩 좋지 못했는지 연봉이 무려 '''36%'''나 까였다. 이는 NPB 사상 4번째 최대 감소폭.
2016 시즌에도 잦은 부상으로 부침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다시 연봉삭감을 피할 수 없었다. 기존 연봉에서 6600만엔이 삭감된 약 2억 6000만엔에 2017시즌 연봉이 책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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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에서 열린 히로시마와의 원정경기에서 마무리투수 이마무라 타케루를 상대로 4대 1로 뒤진 상황에서 9회 우전안타로 마침내 NPB 사상 49번째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였다'''. 교진군에서만 뛴 프랜차이즈로서는 1980년의 시바타 이사오 이후 무려 37년 만에 나온 2000안타 달성자이자 역대 포수 4번째 겸 교진군 포수 최초의 2000안타 달성자이다. 요미우리, 히로시마 팬들이 아베의 2000안타가 나올 때 우레와 같은 박수와 성원을 보냈으며 먼저 2000안타를 달성한 아라이 타카히로가 2000안타 달성 꽃다발을 선물했다.
선수 본인이 TV 도쿄에서 2017년 2월 밝힌 바에 따르면, 요미우리 입단시부터 "2000안타 기록 달성은 전혀 생각치 못했다" 라고 한다. 여담으로 한때 팀메이트였던 오다 코헤이가 2017년 아베의 생일에 2000피스 퍼즐을 선물했는데 2000안타까지 38안타가 남아서 이 38조각을 뺀 상태로 선물했다고.
2000안타 달성 이후 니혼TV 스포츠뉴스 프로그램 <Going>에 출연했는데, 13년 전 스프링캠프에서 자신에게 사인을 받고 운 팬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영상
2017년 11월 27일 도쿄 구단사무소에서 가진 연봉협상에서 올시즌보다 5000만엔 삭감된 2억1000만엔에 2018시즌 연봉계약을 체결했다. 올 시즌에도 주전 1루수로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프로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지만, 최종성적은 129게임을 뛰며 지난해보다 약간 나은 타율 .262 15홈런 76타점에 그치고 만다. 천하의 아베에게도 현역생활의 끝이 점점 다가오는 모양.
2018년 시범경기에서 젊은 우타거포 1루수 유망주 오카모토 카즈마가 두각을 나타내며 개막전부터 요미우리의 1루수 자리를 차지했고, 아베는 1루수에서도 백업 역할로 물러났다. 95게임 출전에 그쳤으나 구단 신기록인 입단 첫 시즌부터 18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2019년 시즌에 포수 재도전을 선언했으며 레귤러 포수인 고바야시 세이지, 세이부에서 영입한 베테랑 포수 스미타니 긴지로와 주전 마스크를 놓고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즌 개막 후엔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타 등 백업 멤버로 나오는 중이지만 출장 기회가 작년보다 더 줄었다. 거기다 개막 후 5월 때까지 무홈런에 머무르는 등 장타력이 더욱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6월 1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첫 홈런을 신고함과 동시에 '''통산 400홈런'''을 달성했다. 통산 400홈런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19번째 기록이자 포수로서는 노무라 카츠야와 타부치 코이치 이래 3번째 기록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에서는 V9 당시의 레전드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이래 구단 사상 3번째의 쾌거이다. 그 뒤 이전보다 장타력이 오르는 모습을 보이며 6월 9일, 13일에 치바 롯데 마린즈,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상대로 2, 3호 홈런을 날리면서 230명의 투수에게서 홈런을 빼앗아 '''홈런을 빼앗아 낸 투수의 수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9월 13일 기준 타율 .303으로 3할 타율을 웃돌고 있다. 장타력은 감소했지만 감도있는 타격은 여전한 듯. 그리고 9월 24일 이번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2020년부터 지도자로 전향한다고 한다. 9월 27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이자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1580일만에[8] 선발 포수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이날 4번타자로 출전하여 4회에 시즌 7호 홈런(통산 406호)을 기록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또한 아직 포스트시즌이 남아있으므로, 아베의 모습을 조금은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아직 은퇴하기는 아까운 활약을 연이어 펼치는 중. 한신과의 파이널 스테이지 1, 3, 4차전에서 5번 1루수로 선발출장, 1차전에선 고의사구를 얻어냈으며 3차전에서는 승리를 굳히는 1타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이어지는 일본시리즈에서는 1차전 5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장, 센가 코다이를 상대로 2회 선제 솔로홈런을 뽑아냈다. 하지만 팀은 0-4로 패배. 그리고 4차전이 끝나고 시상식을 마친 후 양 팀 선수들이 나와 마지막 경기를 치른 아베를 헹가레쳤다.
사실 타 팀으로 옮기거나 교진에 남더라도 연봉을 대타요원에 맞게 삭감한다면 충분히 백업~대타요원으로서 현역생활을 몇년 더 연장할 수 있는 기량이지만 슈퍼스타에게 연봉은 자존심 문제라 함부로 많이 깎을 수도 없을 뿐더러 교진이 현재 마땅한 감독감이 없어서 하라 다쓰노리를 다시 불러온 상황인지라...다카하시 요시노부가 그랬듯이 지도자 수업을 거쳐 아베를 추후 감독으로 앉히기 위한 은퇴인지라 기량에 비해 좀 이른 감이 있는 은퇴. 지명타자제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센트럴리그의 팬들 중에서도 지명타자 제도만 있었으면 2~3년은 충분히 더 현역으로 뛰었을 수 있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2019시즌 종료 뒤 모두의 예상대로 2군 감독 으로 선임되어 지도자로 첫발을 내딛었다.
4. 은퇴 이후
2020 시즌부터 요미우리의 2군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서 구세대적 야구관을 드러내고 있어 논란이 되었다. 잘못하면 한신의 가네모토 도모아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실책→펑고 300개, 볼넷→30분 질책, “진짜 악마인가” 아베 감독의 지옥 훈련
2020년 3월 23일 와세다대학 야구부와의 교류전에서 투수진이 9볼넷을 허용하며 패배했다고 한다. 그 후 선수들에게 쓴소리도 했다고 한다.관련기사 그 경기 패배 후 체벌로 달리기를 지시했다고 한다.대학팀에 패배한 日 프로 감독, 선수단 전원 '벌주' 지시
2020년 4월 25일 아베 2군 감독, 주장 사카모토 하야토, 마루 요시히로, 스가노 도모유키 하라 다쓰노리1군감독 등 5명이 1000만엔씩 총 5000만엔(약 5억7000만원)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관련기사
2020년 9월 16일 도쿄돔에서 진행된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군 수석코치 대행으로 1군 덕아웃에 들어왔다. 원래 수석코치인 모토키 다이스케가 급성맹장염 때문에 응급실로 실려갔기 때문. 모토키 코치가 회복된 이후에는 다시 2군 감독으로 복귀했다. 참고로 모토키는 그 오다 코헤이 이지메 주동자 맞다.
비록 올드스쿨에 입각한 지도방식을 가졌다고는 하나 언론에서 말한대로 강압적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고[9] 육성실적이 아예 전무한 것도 아니기에 아직까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다만 무리한 체벌로 인해 선수단의 부상위험이 커지는 점과 이러한 강압적이고 구시대적인 지도방식은 멘탈이 약한 선수들에게 심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고쳐나가야 할 점이다.
여튼 현 2군 감독으로서, 현임 하라 감독 이후 차기 감독 후보로 가장 유력한 인사 중 하나. 경쟁자로는 전전임 감독이자 현재 해설을 하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와세다에서 야구행정 공부를 하다가 코치로서 현장에 복귀한 구와타 마스미가 있는데, 현재로서는 세 명 다 고만고만한 상황이다.
2021년 2월 21일 스프링캠프에서 투수의 공을 받아주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5. 플레이 스타일
공수를 겸비한 2000년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포수. 후루타 아츠야가 늙고 조지마 겐지가 메이저로 떠난 뒤 201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공격형 포수 자리를 꾸준히 지켜왔고, 현재도 이 계보를 이을 강타자 포수의 등장은 다소 요원한 상황이다.[10]
매 시즌 20~30홈런은 꾸준히 기록할 수 있는 파워를 지녔으며, 타율은 3할대 몇 차례와 3할에 가까이할 기록했을 정도로 정교함도 갖추었다. 그 덕분에 현재 일본 최고의 공격형 포수 1순위로 꼽히고 있으며, 그 진가는 2009년 일본시리즈나 2009 한일 클럽 챔피언십 등에서 제대로 보여줬다. 2016 시즌 종료 기준으로 통산 373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는데, 은퇴 시점에서 통산 400홈런~450홈런을 기대할 수도 있는 수치다.[11] 특히나 2011~12년의 통일구 사태로 대표되는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를 정면으로 관통하면서 최고의 성적을 냈다는 점과, 동시대 공격형 포수 라이벌이라 할 만한 선수가 전무했다는 포지션 보정이 합쳐져서 일부 세이버메트릭스적 지표상으로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포수,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투수 리드, 도루 저지율 등 수비력은 다소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방망이에 가려져있어서 그렇지 수비력이 바닥인 선수는 아니고 2002시즌과 2008시즌에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이후로 1루수로 전향할 예정이라 위의 이야기는 사실상 사어가 되나.... 했지만 요미우리 포수진 상황이 워낙 좋지 못하여 결국 잠시동안은 포수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만 코바야시 세이지의 활약[12] 으로 2016년부터는 1루수를 전담으로 맡게 되었다. 단 노쇠화된 몸으로 익숙치 않은 포지션을 소화하다보니 1루 수비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듣고 있다.2018년 11월 6일 드디어 4년만에 포수로 복귀했다.
6. 기타
- 2012년 10월 28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일본시리즈 2차전 시합중 투수인 사와무라 히로카즈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투수가 첫타자에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한 후 포수의 견제 사인을 놓치는 등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이 해프닝 이후 각성하여 8이닝 무실점 호투하였고 시합도 승리하게 된다.
- 2013년 센트럴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히로시마와 경기중 도쿄돔에서 희대의 코미디가 나왔는데 요미우리의 우츠미가 던진 121km/h의 투구를 히로시마의 히로세 준이 파울을 쳤는데 파울 타구가 아베의 영 좋지 않은 곳을 강타했다.
하라 감독은 덕아웃에서 웃고있고 도쿄돔에서 그 장면이 전광판으로 리플레이되는 와중에 아베만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영 좋지 않은 곳을 부여잡고 있었다. 보통 보호대를 착용하지만 보호대를 착용해도 저 정도의 고통이 나온다.
- 국내에는 이승엽의 절친으로도 유명하다. 이승엽과 아베는 서로 히어로 인터뷰에 나가게 되면 각각 서로의 언어로 말하기로 했는데, 둘 다 약속을 지켰다. 실제로 이승엽과 친해지기 위해 직접 한국어 공부를 하고 한국어 편지도 이승엽에게 썼을 정도의 절친이었다. 이승엽 항목 상단에 보면 아베가 쓴 편지가 적혀 있다. 이승엽의 은퇴식에 나온 영상편지에도 영상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한일통산 400호 홈런당시 같은팀 선발포수였다.
- 이승엽 외에도 대학 시절이던 1998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포수로 앉아쏴를 시전하던 젊은 조인성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2017년 12월에는 조인성의 은퇴를 축하하러 아베가 한국을 찾기도 했다. 엠스플뉴스 기사와 일본 방송분.
-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과의 경기에서 수많은 찬스 무산, 도루 저지 실책 등으로 한국에 많은 도움을 줘, 역시 승짱의 친구!라는 각인을 남겼다. 이용철 해설위원[13] 은 이를 '고마워요 아베' 라고 표현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시드니 올림픽과 베이징 올림픽 당시 4차례의 한일전에서 1경기(베이징 올림픽 예선전)를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경기를 마무리짓는 타자였다(...). 참고로 이 3경기 모두 대타로 나왔으며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두번 모두 내야땅볼(예선전때는 병살타, 3-4위전때는 2루땅볼로 1루주자 아웃되며 경기 종료), 베이징 올림픽 4강전에서는 우익수 플라이를 치며 경기 종료.[14]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 박스스코어(일본어)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박스스코어(일본어)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박스스코어(일본어)
위 3개의 링크에서 9회 打 阿部를 찾으면 된다(...).[15]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박스스코어(일본어)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박스스코어(일본어)
위 3개의 링크에서 9회 打 阿部를 찾으면 된다(...).[15]
- 만화 크게 휘두르며의 주역인 고등학교 포수 아베 타카야는 본래 작품 구상단계에선 '아베 신노스케'라는 이름이었으나, 이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아베 신노스케가 시드니 올림픽 국대로 뽑히는 등 대활약하자 혹여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베 타카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참고로 아베 신노스케와 아베 타카야는 실력있는 포수 + 타격능력도 좋다는 공통점이 있다.
- 일본시리즈 게스트해설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201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아사히 방송에서 한신 고시엔 구장 경기 중계[16] 를 맡았으며 2016년에서는 TBS라디오, 닛폰 방송에서 히로시마 대 닛폰햄 경기 중계를 맡았다. 그리고 2016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는 "4차전을 잡는 팀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라고 했는데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 타카하시 요시노부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물러날시 차기 감독 1순위로 꼽히고 있다. 그러다 요미우리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우에하라 고지가 다시 복귀했고 해외팀 진출 정도는 요미우리 구단측이 순혈로 인정만 해준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예상치못한 성적 부진으로 다카하시 감독이 3년만에 사퇴를 해버려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컴백했다. 아베가 제왕학을 완벽히 배울 때까지 몸빵역할을 맡을듯.
- 대부분의 프로선수들이 그렇듯이 학생시절 프로 초기에는 상당히 호리호리한 몸매를 하고 있었으나 이승엽이 거인에 오기 일년전 정도부터 몸매가 둥글둥글 해지더니 이승엽이 오릭스로 이적할때 쯤에는 상당히 배가 나오게 됐고 자신이 은퇴할 2년전 정도에는 상당한 뚱보가 돼 버렸다.
7. 연도별 기록
8. 역대 등번호
[1] 원래는 오른손잡이지만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인 카케후 마사유키를 동경해 타격할 땐 왼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카케후도 아베와 마찬가지로 치바현 출신.[2] 다카하시가 감독직을 수행하는 기간 동안 아베는 선수생활 말년 → 은퇴 → 해설자 → 코치로 복귀해서 감독수업의 일정이 거의 들어맞는다. 현재 요미우리의 현역 내지는 코칭 스탭 중에 아베와 견줄만한 위상을 가진 인물이 없기 때문에 큰 변수가 있지 않는 한 미래에 감독이 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3] 다만 무라타는 순혈주의때문에 빠른 은퇴를 선택했다고 보는쪽이 맞다. 은퇴 이후 커리어가 딱 그렇다. 문제는 그동안 요미우리가 굴곡이 심해서 하라가 2번이나 그만뒀다 다시 돌아오는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감독이 될 시기를 놓쳤고, 아베와 다카하시 요시노부라는 40대 스타들로 빨리 물갈이 돼버린 것.[4] 이는 시즌 20홈런 최단경기 세계기록이다(!).[5] WAR이 9.3이다. 포수로서는 NPB 역대급 시즌.[6] 3할, 50타점을 넘긴 선수가 '''단 한명도 없다.''' 그래서 그나마 예전에 해준게 있는 아베가 4번 타자로 나서는것.[7] 남동생은 배우 주리[8] 2015년 5월 31일 라쿠텐 이글스전[9] 선수들을 지도할 때 질책을 하지 않고 소통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충분한 피드백을 하는 모습이 2군 영상에서 잡혔다. 그리고 2군 경기를 보러간 요미우리 팬들 사이에서도 아베가 그렇게까지 강압적인 모습은 아니었다는 목격담도 있다.[10] 그나마 옆 리그에는 세이부의 모리 토모야, 닛폰햄의 콘도 켄스케 등 타격 재능이 뛰어난 포수 유망주들이 있지만 수비력의 성장이 더디다는 이유로 포수로서 출장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고, 세리그에서는 아이자와 츠바사가 나타나긴 했지만, 경기수가 너무 적다. 국대경기에서도 2000년대의 아베-조지마 겐지-사토자키 토모야-아이카와 료지 이후에는 수비형 포수인 시마 모토히로나 스미타니 긴지로 등이 주전 마스크를 썼다. 결국 모리 토모야가 2018년부터 주전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고 콘도가 외야로 정착하며 당분간은 모리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공격형 포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11]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포수 통산 홈런 1위는 노무라 카츠야의 657개다. 수비형 포수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에서 저 정도의 누적스탯은 대단하다. 워낙에 먼치킨스런 성적이니 논외로 하자.[12] 2016시즌 양 리그 포수 중 유일하게 규정타석 진입[13] 아베가 포일을 한 풀리그 한일전 당시는 KBS에서 중계했다.[14] 시드니 올림픽의 예선전 형식이었던 1999년 아시아 야구대회 결승전에서도 대타로 나와 마지막 타자로 삼진을 기록했다(...). 1999년 아시아 야구대회 결승전 박스스코어(일본어)[15] 단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은 연장 10회[16] 이 때 같이 배석한 인물들이 라이벌팀 한신의 레전드 요시다 요시오, 히야마 신지로여서 일본 웹에서 웃프다는 반응이 나왔다. 반대로 한신의 노우미 아츠시는 2013년 일본시리즈, 2016년 요미우리와 DeNA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게스트해설로 등장하여 웃픈 모습을 보여주기도..[17]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