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 샤커/생애

 


1. 데뷔 전
2. 데뷔 앨범 2Pacalypse Now
3. 두번째 앨범 Strictly 4 My N.I.G.G.A.Z...
4. 첫번째 총격사건
4.1. 주요사건인물
4.2. 사건개요
5. 세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
6. Death Row와의 계약
7. 네번째 앨범 All Eyez On Me 그리고 마지막 레코딩
8. 두번째 총격 사건 그리고..사망
9. 사후 밝혀진 사실들
9.1. 슈그 나이트가 계획했다?
9.2. 그의 죽음에 조력했던 내부의 적 레지 라이트 주니어(Reggie Wright Jr.)
9.3. 스눕 독과의 불화


1. 데뷔 전


투팍의 어머니는 흑표당의 멤버였고, 재판 과정 중 그를 임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이 끝나고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그녀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 그들은 투팍이 12살이 되기까지 부랑자 수용소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3년부터 투팍 어머니의 옛 남자 친구가 그들과 같이 살게 되면서 어느 정도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투팍을 할렘의 연기 전문학교에 입학시키고, 투팍은 '분노의 포도'에서 첫 역할을 맡는다. 15세 때 메릴랜드로 이사하면서 볼티모어 예술고[1] 에 입학하고, MC 뉴욕이란 이름으로 투팍은 랩을 시작하는데, 1988년 양아버지가 강도 혐의로 감옥에 간 후 돈을 벌기 위해 고등학교와 랩을 그만두고 길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일을 했다.
이후 투팍은 캘리포니아의 사우스 로스엔젤레스(사우스 센트럴)에서 마약상으로 일하다가, 여러 번 그의 노래 속에서 밝힌 것처럼 '누군가의 충고를 따라' 랩계에 뛰어들게 된다.[2] 199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친 후에 투팍은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백댄서 겸 로드매니저, 객원 래퍼로서 디지의 순회공연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디지는 인기 있는 그룹이었으며 특히 라이브에 강하다는 평을 받았고, 투팍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하며 착실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그는 노토리어스 B.I.G.를 만나게 되는데 투팍은 그를 마치 친동생처럼 여겨 비기에게 몇 분 안되던 그의 공연 시간마저 나누어주며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

2. 데뷔 앨범 2Pacalyps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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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Pacalypse Now로 앨범 데뷔를 했을 때 투팍은 아직 19살 밖에 되지 않은 상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폭넓고 깊게 다루는 천재 래퍼로서 순식간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앨범에서 싱글 "Trapped"와 "Brenda's Got A Baby."가 성공을 거두고, 또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서 부른 노래 "Same Song"이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는 등 매우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역대 힙합 관련 영화들 중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Juice'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배우로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당시에 일어난 큰 사건은, 텍사스에서 경찰을 쏜 어떤 소년이 투팍을 기소한 것이었다. 그는 투팍의 앨범이 그에게 '경찰을 쏘게 할 동기를 주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건은 점점 확대되기 시작하여, 부통령인 댄 퀘일이 지상파 방송을 통해 투팍을 비난하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부통령이 갓 데뷔한 신예 래퍼를 방송을 통해 대놓고 공격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이 남았다. MTV를 위시한 다른 미디어들은 투팍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길 바랐고, 앨범 소속사도 이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이용했으며, 대중들은 모두 만들어진 이미지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몇 어린 세대들은 그를 과격함의 화신으로 존경하고, 기성 세대들은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동료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건드려선 안될 무서운 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성공적인 데뷔와 동시에 큰 사건들을 통해서 순식간에 힙합씬의 거물이 되어버린 이 즈음 투팍은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두번째 앨범 Strictly 4 My N.I.G.G.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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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앨범 Strictly 4 My N.I.G.G.A.Z...는 이런 사정들로 인해 전작과 비교해 훨씬 더 폭력적인 이미지로 완성되었고, 싱글 "Keep Ya Head Up"이나 "I Get Around"가 히트하게 된다. 아이스 큐브, 아이스-T, Naughty by Nature의 Treach, 스눕 독 등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자넷 잭슨과 출연한 영화 Poetic Justice도 흥행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투팍은 영화계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나, 후술된 여러 사건들로 인한 이미지 악화 때문에 거대 메이저 영화사들이 그를 더 이상 고용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투팍이 출연했던 Juice의 감독은 압력 때문에 신작에서 투팍을 빼야만 했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영화들 또한 취소되었으며, 한 동안 영화를 쉬게 되는 동기가 된다.
예술적인 면을 제외하고 가장 큰 사건은, 애틀랜타에서 비번이었던 두 명의 경찰을 총으로 쏜 것인데, 투팍은 당시 그들이 다른 흑인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주장해, 이 사건은 기소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가게 되지만, 결과적으론 전국의 모든 경찰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강간 미수 사건으로, 22살의 여자가 투팍을 상대로 고소한 것인데, 다음 해 까지 판결은 유보된다.
1994년은 투팍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Thug Life란 그룹을 발족시키고, 이와 동시에 이제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Thug Life' 문신을 배에 새겨 넣는다. 이건 여태까지 보다 더 강경히 과격한 갱스터의 입장을 지키겠다는 뜻이고, 또 투팍이 어떠한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찾았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멤버들은 비록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앞으로도 투팍과 같이 하게 되고, 후에 여러 멤버들이 Outlawz로 바뀌면서도 투팍의 곁에 남아서 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94년 초 그는 영화 'Above the Rim'에 마약상인 'Lucky'로서 출연하게 되고, 그와 Thug Life가 함께 부른 "Pour Out a Little Liquor"도 OST에 실려 2백만 장 넘게 팔리게 된다. 이것은 안 좋아진 이미지 때문에 'Higher Learning'이나, 'Menace II Society'에 출연하지 못한 그에게 다시 배우로서 유명세를 얻게 해 주고, OST의 유례없는 성공으로 투팍은 다시 큰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1994년 여름 두 명의 소년이 또 경찰관을 죽이고 투팍의 노래 "Souljah's Story" 가 그들을 부추겼다고 말해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11월 30일에는 총격 사건에 휘말려 총을 복부에 세 방, 머리에 두 방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간 투팍은 수술 후 단지 세 시간만에 퇴원을 한다. 투팍은 이 날 사건에 관련된 노래만도 10여 곡을 넘게 썼으며, 마카벨리 앨범의 마지막 곡 'Against All Odds'에선 많은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투팍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를 지목했으나, 그들은 이를 부인했다.
게다가 총격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에는 위에서 언급된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4. '''첫번째 총격사건'''


'''"Fuck Mobb Deep, Fuck Biggie, Fuck Bad Boy as a staff record label and as a motherfuckin' crew And if you wanna be down with Bad Boy Then fuck you too!'''"

'''좆까 맙 딥, 좆까 비기, 배드보이의 스태프 레코드 레이블 크루 전부 다 좆까, 개새끼들아. 그리고 네가 배드보이 새끼들이랑 같이 하려는 새끼라면 너도 좆까라!'''

''' - Hit 'Em Up[3]

'''


4.1. 주요사건인물


  • 지미 헨치맨 (a.k.a. Booker) - 헨치맨 프로덕션의 사장. 릴 숀을 시켜 2Pac을 불러냄.
  • 잭커스 애그넌트 a.k.a. Hatian Jack - 이 사람은 나중에 총격에 자신이 관련되어 있음을 사복 경관에게 말하는 실수를 범한다. 위의 두 이름 말고도 나이젤이라는 가명도 썼다.
  • 월터 '킹 텃' 존슨 a.k.a. Trevor - 잭커스의 친구. 13번의 체포 경력이 있으며, 배드보이 레코드에 돈을 출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릴 숀 - 헨치 멘 프로덕션 소속의 래퍼. 헨치맨의 명령을 받고 투팍을 직접 불러냈다.
  • 릴 시저 - 비기 스몰즈의 친한 친구이며 래퍼.

4.2. 사건개요


11월 29일 - 이틀 뒤로 예정된 선거공판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도착한 투팍은, 자신의 옛 친구인 스트레치 및 Live Squad의 멤버, 여동생의 남자친구 등과 만나 같이 시간을 보낸다.
11월 29일 저녁 - 역시 친구인 DJ Ron G와 레코딩 작업을 하는 도중, 헨치맨에게 전화를 받았다. 헨치맨은 릴 숀의 앨범에 쓰기 위해 투팍의 리듬을 사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투팍은 이에 승낙한다. 곧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하나, 다른 일들 때문에 투팍은 스튜디오에 늦게 가게 된다. 그 사이 헨치맨과 릴 숀이 계속 전화를 걸어 오라고 재촉을 했다.
11월 30일, 00:20 - 투팍과 그의 옛 친구 스트레치를 포함한 네 명은 타임스퀘어 빌딩에 들어선다. 입구를 지날 때, 경비원 의자 근처의 세 명이 그들을 따라오고, 투팍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릴 시저가 멀리서 그들을 부르자, 투팍은 그곳에 비기가 온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보디가드려니 하며 그냥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투팍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뒤돌아선 순간, 따라오던 셋이 권총을 빼들며 모두 엎드리고 몸에 차고 있는 보석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그에 따라 다른 이들은 모두 엎드리지만, 투팍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듯 경고를 무시하고 총을 꺼내다 머리에 두 방을 포함해 총 다섯 방의 총을 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투팍의 보석들을 빼앗아 달아나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쫓아가자 투팍은 부상을 입은 와중에 엘리베이터에 탄 후, 스튜디오로 올라간다. 스튜디오엔 비기와 퍼프 대디를 포함한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나중에 투팍은 이 순간이 얼마나 이상했었는지 인터뷰에서 밝힌다.
11월 30일, 04:45 -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투팍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게 되고, 약 세 시간에 걸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후, 그의 목숨을 아직도 노리는 자가 있어 병원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곧 퇴원하게 된다.
12월 1일 - 총에 맞은 뒤 약 30여 시간뒤에 투팍은 자신의 재판이 진행되던 법정에 출두한다. 휠체어를 탄 그의 곁엔 미키 루크와 보디가드들이 있었고, 그 날 투팍은 유죄 판결을 받고 4년 2개월 형을 선고받지만, 부상을 입은 관계로 보석금을 내고 회복될 때 까지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투팍은 비기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투팍이 수감되기 전에 녹음한 앨범 'Me Against the World'엔 비기나 배드보이를 비난하는 내용이 없다. 1995년 2월, 투팍은 부상이 나은것으로 간주되어 수감되게 되는데, 감옥안에서의 얘기는 많이 밝혀진 게 없지만 후에 인터뷰에서 감옥에서 그를 쏜것이 다름아닌 비기의 친구들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즉 수감된 시점 이후부터 악감정이 생긴것이다. 거기다 총격 사건 뒤 발매된 Biggie 의 앨범엔 투팍이 총격당하는 것을 사사하는 듯한 뉘앙스의 'Who Shot Ya' 라는 곡이 들어있었다.[4]
약 8개월 간의 복역 후 투팍은 데스 로우의 사장 슈그 나잇이 제안한 딜을 받아들이고 형무소에서 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리고 LA로 돌아오자마자 가진 MTV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배드 보이 레코드가 자신을 죽이는 걸 도왔다" 라고 주장했다.

5. 세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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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14일, 투팍은 성폭행 사건 혐의가 인정되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뉴욕에 있는 라이커 교도소에 가게 된다. 이로서 그가 이전 커리어들을 통해 쌓은 좋은 이미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나중에 젊은 흑인남성으로서 성공의 길을 걸을 때의 많은 유혹들을 견뎌내지 못한 것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서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들과는 관계없이 그의 음악은 성공을 거듭한다.

아직 투팍이 감옥에 있던 4월 1일, 투팍의 세번째 솔로앨범인 Me Against the World가 옥중 발매되고, 싱글 'Dear Mama'등의 히트에 힘입어 앨범은 곧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앨범이 발매될 때와 맞추어 투팍은 Vibe지와 옥중 인터뷰를 가졌는데, 투팍은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이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지배받고 있었으며, 마약과 술에서 벗어난 감옥안에서의 날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총을 다섯 방 맞은 뒤에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의 삶은 그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신이 내려준 기회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같은 해 8월,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 등의 배드 보이 레코드 관계자들은 같은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투팍이 총을 맞은 일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주장한다.

6. Death Row와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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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수록된 전성기의 데스 로우.[5]
1995년 10월, 슈그 나잇은 140만 달러를 보석금으로 지불하고 투팍을 교도소에서 빼내, 자신의 데스 로우 레코드에 소속시킨다. 계약조건은 보석금으로 지불된 돈을 계약금 삼아, 투팍이 세 장의 앨범을 데스 로우에서 발매한다는 조건이었다. 사후 발매가 되었던 앨범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구상된 것이다. 대략 150여곡정도.[6]

7. 네번째 앨범 '''All Eyez On Me''' 그리고 마지막 레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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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Eyez On Me'''가 1995년 10월에 레코딩되어 1996년 2월에 발매된다. 두 장으로 이뤄진 이 앨범은 발매 후 두 달만인 1996년 4월에 5번의 플래티넘을 달성하고 1998년까지 무려 9번의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싱글로 발매된 "How Do U Want It" 과 "California Love"가 빌보드 1위를 달성한다. 참고로 8월에 발매된 "How Do U Want It" 싱글에 배그보이 레코즈를 디스한 Hit 'Em Up이 처음 공개되었다.
All Eyez On Me는 솔로 래퍼가 발매한 역사상 첫 두장짜리 음반이었으며, Me Against The World에 이어 두번째로 빌보드 200 및 Top R&B/Hip-Hop Albums 차트 정상에 올라간다. 발매 첫 주만에 566,000장 전량이 매진되었으며 1996년 말엔 5백만 장이 팔려나갔다. 이는 그의 생전 커리어에 있어서 최정점의 상업적 성공이었다.

8. 두번째 총격 사건 그리고..사망


1996년 9월 7일 밤, 투팍은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보러가기 위해 슈그 나잇과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MGM 호텔로 향한다. 경기 후 호텔 로비에서 투팍 일행은 크립스 갱단 멤버인 올랜도 앤더슨을 발견한다. 올랜도 앤더슨은 연초에 데스 로우가 투자한 신발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전과가 있었다. 이에 그를 발견한 투팍이 먼저 그를 공격했고 뒤이어 일행 전체가 그를 집중구타했다. 이 상황은 당시 호텔 CCTV에 촬영되었고, 이 영상은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당시 투팍과 슈그는 가석방 상태 중이었기 때문에 총격사건에 연루된 이상 투팍은 만약 죽지 않었어도 슈그처럼 중형선고를 피할 순 없었을 것이다. 총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슈그 나잇은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에서야 출소했다. 폭행사건 후 호텔을 나온 투팍 일행은 검은색 BMW 7시리즈를 타고 자신들의 클럽인 662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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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7일 밤, 팬에 의해 촬영된 총격 직전의 모습의 사진. 생전 투팍의 모습이 생생히 담긴 마지막 사진이다.
오후 11:00 ~ 11:05, 그들은 자동차 내에서 볼륨을 너무 크게 틀었다는 이유로 라스베이거스 교통경찰에게 단속되었다가 풀려난다.
오후 11:10, 맥심 호텔 앞에 위치한 코발 레인과 플라밍고 로드 사이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를 보고 차를 정지한다. 이때 여자 두 명이 탄 차량이 왼편에 정차한 채로 슈그와 투팍에서 말을 건네 시선을 빼앗는다. 투팍은 차량의 선루프 위로 몸을 일으켜서 여자들에게 클럽 662로 오라고 초대한다.
오후 11:15, 여자들이 말을 걸어 시선이 쏠린 사이 우측으로 흰색 캐딜락이 조용히 다가와 차량의 창문을 열고 투팍이 타고있던 BMW 7시리즈의 오른편에 정차해 이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한다. 발사된 11발 중 9발이 투팍에게 집중되어 겨눠졌고 한 발은 운전 중인 슈그 나잇의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투팍은 그 중 4발을 신체에 맞았으며 두 발은 가슴에, 한 발은 팔에, 그리고 나머지 한 발은 대퇴부에 명중된다. 가슴에 맞은 두 발 중 한 발은 그의 오른쪽 폐에 꽂혀 치명적인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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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당시 투팍이 탑승했던 BMW 7시리즈 차량사진
총격 사건 후, 경찰은 슈그 나잇과 투팍을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한다. 그는 6일 동안 혼수상태로 호흡기에 의지하게 된다. 데스 로우의 아티스트이자 투팍과 절친했던 대니 보이는 당시 투팍이 있던 병실에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살해 위협에 대해 증언했다.[7]
1996년 9월 13일 오후 4:03, 투팍은 결국 향년 25세로 숨지고 말았다. 투팍의 시신은 다음날 화장되었다.
두 달 뒤 그의 5번째 앨범 The Don Killuminati : The 7 Day Theory가 사후 발매되었다.

9. 사후 밝혀진 사실들



9.1. 슈그 나이트가 계획했다?


범인의 발사한 총알 중 대다수가 투팍에게 겨눠져 있었고 슈그가 멀쩡했다는 이유와 사고 후 멘붕상태의 행동[8]으로 인해 투팍 사후 공범이라는 루머가 생겨났다. 그러나 후에 이하 내용들을 통해 이는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 사후 다큐멘터리에서 투팍의 보디가드는 Before i wake에서 투팍 사고 후 슈그가 데스로우 레코드 내에서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소회한다.
2) "The killing of Tupac Shakur"의 저자 저널리스트 케이티 스캇도 슈그 공범설에 대해 부정하였다.
3) 1996년 당시 사건을 담당하고 조사했던 라스베가스 경찰 소속 브렌트 베커도 슈그의 공범 가능성은 없음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슈그는 투팍을 죽일 타당한 이유가 없다.''' 저작권료 때문에 투팍을 죽였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차피 투팍의 사후 저작권료는 그의 어머니였던 아페니 샤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고 실제로 어머니가 전액 수령했다. 게다가 슈그는 가중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가석방 상태에 있었으므로 살해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투팍은 데스로우와의 계약이 남은 상태였다. 즉슈그 본인에게 큰 돈을 벌어다 주었고 앞으로도 활약할 인기아티스트를 어떤 명분도 없이 본인 목숨까지 걸어가며 헤친다는 것부터 말이 안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슈그 공범설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주장이다.
또한 유력한 용의자였던 올랜더 앤더슨 역시 투팍 사망 후 2년 뒤 동네 주유소에서 강도들과 시비가 붙어 살해당하고만다. 그는 슈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 대형 로펌변호사를 선임해 본인과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살해 직전까지 고향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범행에 동조한 데스 로우의 사설 보안업체 사장 레지 화이트 주니어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부패혐의로 쫓겨난 전 LA 경찰로 당시 지역사회에 엄청나누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거기에 데스 로우의 보안을 담당하는 업체의 사장이었으니 당연히 지저분한 돈 에도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크립스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더욱 의심을 받았으나 직접적으로 연루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로 처벌을 받진 않았다.

9.2. 그의 죽음에 조력했던 내부의 적 레지 라이트 주니어(Reggie Wright Jr.)


생전 2pac에게 가장 가까운 사이이자 그의 보디가드로 고용되어 있던 프랭크 알렉산더(Frank alexander)는 2Pac이 가족처럼 대해줬던 몇 안되는 이였고 Pac이 죽기 전 그가 겪었던 당시 Death Row내의 어수선한 분위기와[9] 사망 당시 느꼈던 이상한 상황들로 인해 그의 총격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Death Row 관련자들의 목격담으로 Pac의 죽음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프랭크는 Pac과 거의 매순간 동행하면서 Death Row내의 속사정을 아주 잘 알고있는 주요 목격자 중 한 명이었고 Pac이 총격을 받을 당시 프랭크는 Outlawz 멤버들과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
사건 현장의 주요 목격자였던 그는 2Pac 사망 사건 배후에 누군가 조력자 역할을 한 것 같은 내부의 적이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는 이에 근거해 자서전 "Got You Back"을 발간한다. 그리고 이를 기본으로 한 "Before I Wake"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이후 2002년 LA Times 사고 전문 리포터 Chuck Philips에 의해 "Who Killed Tupac Shakur?"라는 두 편짜리 방송이 방영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2Pac의 사건 케이스가 재조명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리처드 본드(Richard Bond)가 프랭크의 증언과 더불어 사건 당시 주요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와 Death Row 내의 비리, LAPD와 갱들간의 유착 관계 등을 토대로 해서 2Pac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과 여러 증거들을 모은 숨겨진 진실이 담겨진 2pac: Assassination이 만들어지면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assassination은 저작권 문제로 찾기가 힘들며 그 다큐의 내용을 재가공한 공개용 다큐멘터리가 https://youtu.be/z5v600SyCu4 여기에 공개되어있다 거의 내용은 같다)))
2010년 12월 12일에 미국 다큐멘터리 케이블 전문 방송 VH1의 Famous Crime Scene에서도 해당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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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Pac: Assassination의 한 장면.'''
맨앞엔 리드카 (보통은 suge가 운전하였으나 사건 당일엔 이례적으로 suge가 운전하지않고 2pac을 태우고 리드카를 따라갔다 단한번도 그런적이 없었기에 이것또한 의심을 사게되는 이유가된다), 왼쪽 옆에는 Travon Lane[10], 가운데는 Suge와 2Pac이, 뒤로는 프랭크 및 Outlawz 멤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한 프로파일러는 차로 둘러싸인 Sitting Duck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한 마디로 퇴로가 전부 막힌 형태.

그리고 레지 라이트 주니어는 프랭크에게 죽음을 종용하며 협박을 일삼는 등 비열한 짓을 한 주제에, 최근 방영된 Facing 시즌3 Suge Knight 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 3자 코스프레를 하며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뻔뻔함을 보여줬다.

9.3. 스눕 독과의 불화


알다시피 스눕 독은 생전 투팍과 불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온 사건이 1996년 5월 4일에 방영된 Saturday Night Special[11] 방송이었다.
이 방송 이후로 투팍은 스눕 독과 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12] 이 날 이후로 둘의 관계는 악화되고 악화되어간다.
방송 PD가 말하길 스눕은 투팍과 함께 2 of Amerikaz Most Wanted을 열창하기로 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둘은 함께하지 않았다. 투팍은 리허설에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스눕은 어디에도 없었다. 투팍은 이 날 방송에 나타나지 않은 스눕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으며 스눕은 그 동안 투팍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는 데스 로우와 Suge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13]
이 방송 이후로 투팍과 스눕은 9월 3일에 있었던 MTV와의 인터뷰 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인터뷰도 투팍만이 인터뷰를 주도할 뿐 스눕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인다.[14] 스눕과 함께한 이 인터뷰에서 투팍은 East vs West와의 전쟁은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뿐 비기와 나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사태를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인터뷰를 할때 쯤, 그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동부 레이블 래퍼들과의 합작품인 One Nation이라는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다. 둘의 불화는 Danny Boy 및 그의 보디가드였던 프랭크 알렉산더 등 다양한 당시 주변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15] 이외에도 유튜브에 Snoop 2Pac Beef라고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하지만 2012년 스눕독과 함께 The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에서 사후앨범 The 7 Day Theory 수록곡 "Hail Mary"와 4집의 "2 of Amerikaz Most Wanted"를 홀로그램으로 부활[16]해 불렀다. #[17][18] 이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고갔으나 공연 반응은 괜찮은 듯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투팍 사후 스눕 독은 그에 대한 앙금이 모두 사라졌다봐도 될 듯하다. 오히려 투팍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행사나 기념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를 앞장서서 기리는 역할을 많이 할 정도. 2020년에는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데 Deepfake로 투팍을 출연시키려고 하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LA의 인디 제작사 Corridor Digital에 deepfake 부분을 제작의뢰했다.


[1] 이 학교에서 자다 핑켓(매트릭스 시리즈의 니오베 역으로 유명, 현재 윌 스미스의 아내)과 평생친구가 되었다. 생전 자신이 쓴 시집에 담긴 헌정시와 그의 사후에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둘의 우애를 확인할 수 있다.[2] 동기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아마 샷건을 맞아 죽을 뻔한 일이 있은 뒤부터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총알들은 투팍의 머리 위 5cm 정도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3] 밑에 자세하게 나와있듯이 오해가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가사다.[4] 당시 프로덕션 과정을 생각하면 이미 앨범 수록곡이 다 만들어진 뒤에 나온것이므로 시기를 보면 맞지 않지만, 뺄수 있는데 안뺐다는 점에서 투팍의 의심을 부추겼다.[5] 왼쪽부터 투팍, 데스 로우의 CEO인 슈그 나잇, 스눕 독[6] 사후앨범들은 저작권때문에 대부분 비트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형편없다. 2Pac이 직접 부른 버전은 유튜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7] http://blog.naver.com/aintnotbut/220518432221[8] 슈그는 총격을 받자마자 멘붕이 와서 차를 유턴해 2km 떨어진 E.하몬 애비뉴까지 도망쳤다, 이로 인해 현장보존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 차량 안에서 출동한 경찰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며 경찰과 대치하는 바람에 또 시간을 소요했다. 그동안 조수석의 투팍은 서서히 뇌사하고 있었다.[9] Outlawz를 비롯한 다수의 Death Row의 아티스트들의 증언에 의하면 Pac은 Deathrow를 떠나 Makaveli 레이블을 세우려했었고 이로 인해 Suge의 트러블을 가지고 있었다.[10] Suge와 같은 blood 갱멤버이자 Suge의 어린 시절 친구.[11] https://www.youtube.com/watch?v=WLSTRLDcwB0[12] 스눕 독은 당시 The Notorious B.I.G로 대변되는 East Side 'Badboyz"레이블과 투팍으로 대변되는 Deathrow Records 레이블의 다툼인 East vs West 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한 라디오방송에서 이러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13] 닥터 드레가 데스 로우에서 쫓겨 나가게 되면서 불만이 시작된듯하다. Snoop Dogg, Doggpound, Nate Dogg드레가 데스 로우에 데려왔는데 불화로 인해 수장이 나가버렸으니 당시 내부 사정이 어땠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14] https://www.youtube.com/watch?v=S9sUdf3hAfU 사망 3일전 MTV와의 인터뷰영상. 매우 유명한 영상이다.[15] https://www.youtube.com/watch?v=DKa0Q5d8nU4[16] 여담으로, 이를 두고 한 외국 네티즌이 "이날 '''투팍은 살아났지만, 당시 관객들은 죽었다'''."고 평했다.(죽었다는 표현은 아마도 투팍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시원찮은 걸 보고 죽은 거 같은 걸 비유해서 죽었다고 표현한 듯하다.)[17] 2Pac 홀로그램을 제작한 회사는 Digital Domain으로 '''타이타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같은 유명 영화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나, 현재 파산했다.[18] 또 다른 여담으로, '2019학년도 수능특강 독서' 내에서 문제의 보기 예시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