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 전투

 

1. 개요
2. 전개
3. 영향
4. 대중매체의 묘사
5.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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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Pavia'''
4차 이탈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1525년 2월 24일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 성을 두고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1] 연합군과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 사이에 '''이탈리아 패권을 걸고 벌어진 전투'''이다. 결과는 카를 5세의 대승이었다.
중세 시대 유럽 전투력의 핵심이었던 기사의 아성을 화약 무기, 즉, '''화승총'''으로 격파를 한 최초의 기념비적 전투이며 잘 나가던 스위스 용병들의 인기가 폭락한 전투이다. 테르시오 전법의 전성기와 스페인의 유럽 패권, 즉 시글로 데 오로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과 연합했다.[2]
화승총이 냉병기 부대를 발라버린 승리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인 전투로 밀덕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학자들의 견해는 밀덕들과는 온도차가 있다.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화승총이 승리의 요인중 하나이긴 하지만 다른 여러 요인들이 겹쳐진 승리이며, 이 전쟁 이후에도 화승총이 파이크병의 군대를 압도하지는 못했으며 파이크병은 17세기까지 여전히 지상군의 주력이었음을 지적한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1520년대초 스위스 용병대의 군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 항명으로 인해 지휘관들이 몰살당하는 등 스위스 용병대 자체가 막장 군대화가 된 상황이었음에 주목하고 있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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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16세기 전반 유럽 최대의 맞수이자 강군인 카를 5세 치하의 합스부르크 군대와 프랑수아 1세 치하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두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로, 특히 프랑스는 국왕인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친정하는 의욕을 보였다.
여기다 카를 5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스페인의 그 유명한 '''테르시오''' 부대와 독일 정예 용병 란츠크네히트를 동원했고 이에 맞서 프랑수아 1세는 당대 유럽 최강으로 손꼽히던 '''스위스 용병'''과 프랑스군의 정예 중기병[3][4] 그리고 총기와 마찬가지로 한창 뜨기 시작하던 신무기인 포병대를 투입 동원해 그야말로 16세기 유럽 최고의 드림 매치를 실현한 국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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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베네치아와 연합해 마리냐노 전투[5]에서 이탈리아로 기어내려오던 스위스군을 쳐부순 이래 꾸준히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부르고뉴스페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손에 넣은 신임 황제 카를 5세는 이에 맞서 이탈리아까지 점유해 유럽의 패권을 확실히 다지고자 했으니만큼 두 군주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는 기선제압을 위해 4만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로 진격했다. 진격하고 1개월도 안 되어 밀라노는 프랑스 수중에 떨어지고, 프랑스군은 다음 목표인 파비아로 쾌속 진격했다.
하지만 파비아 성을 수비하던 합스부르크의 병력 9천명은 거듭되는 공격에도 잘 버텨냈다. 계속된 공성에도 많은 사상자만 낸 프랑스군은 제2차 빈 공방전의 양상과 흡사하게 포위를 통한 말려죽이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러나 파비아 수비군은 말, 당나귀, 개와 고양이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궁지에 몰리고서도 지원군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항복을 거부하며 완강하게 버텼다.
프랑스군은 12월에 제노바에서 벌어진 스페인군과의 해전에서도 승리했다. 여기에 프랑스는 교황 클레멘스 7세와도 밀약을 맺어 이탈리아 내부에서 카를 5세에게 호응하는 상황을 차단했다. 여기다 피렌체의 조반니 데 메디치(여걸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아들)가 이끄는 정예 용병대 '검은 군단'까지 프랑스에 협력하여 합스부르크 군대를 퇴각시켰다. 1524년의 북이탈리아 전역은 여러모로 프랑스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분노한 카를 5세는 독일의 정예 용병부대 란츠크네히트를 스위스로 출병시켰다. 당황한 프랑스측 스위스 용병 5천여명은 일단 본국을 지키러 귀환했다. 반면 이탈리아 방면의 합스부르크 지휘관 샤를 드 라누아는 란츠크네히트의 지원에 힘입어 역공에 나섰다. 이리하여 전황은 서서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1525년 2월 합스부르크 군대는 프랑스군의 병참선 요소를 차단하고 파비아에 당도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군 총사령관은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여 카를 5세에게 가세한 프랑스의 부르봉 공작이었으며, 스페인 군은 페스카라 장군이, 란츠크네히트는 역전의 용병대장 프룬츠베르크가 지휘하고 있었다. 파비아를 둘러싸고 2월 한달여간 일진일퇴의 국지전이 이어졌다.
마침내 2월 23일 저녁부터 24일 아침까지, 프랑스군이 6천5백명의 기병대와 수천의 정예 스위스 용병대, 1만 5천이 넘는 보병과 53문에 달하는 대포를 앞세워 파비아 성에 대한 총공세에 돌입했다. 비록 성벽이 버티고는 있다 하나 병력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열세였다. 하지만 병기의 선진성, 전술, 그리고 병사들의 기백은 합스부르크가 우위였다.
또 전체적인 병력은 비슷했지만 프랑스군은 성을 포위하기 위해 넒게 분산되어 있었고 반대로 제국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전에서는 제국군의 병력이 우세했고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파비아 성에서 충돌이 벌어지는 사이, 합스부르크 제국 측의 중장기병 4천명과 스페인군 보병대는 야음을 틈타 교묘히 전선을 우회해 프랑스군의 숙영지를 들이쳤다. 공성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프랑스군은 새벽에 후방의 포병대가 급습당하는 사태를 깨닫고서야 부랴부랴 전선의 기병들을 후방으로 투입해 기습해온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싸워 격퇴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대오는 크게 흐트러졌다.
반면 일단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한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반격은 거셌다. 24일 오전 7시를 전후해 대규모 육박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유럽 최강을 다투는 보병대인 독일 란츠크네히트스위스 용병[6]간의 충돌은 실로 치열했다. 하지만 화승총을 장비한 스페인군의 아르카부스 총병대 1500명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스위스 용병들도 선진 전술과 무기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프랑스군 기병이 먼저 차례로 쓰러졌고, 뒤이어 란츠크네히트 부대가 정면과 좌측면에서 검은 군단을 향해 돌격했다. 곧 스위스군의 대열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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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여에 걸친 치열한 혼전이 끝나고 오전 8시가 되면 프랑스군 기병대는 화승총 세례를 받아 거의 궤멸된다. 메디치 가문의 검은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스위스 용병들도 대부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티치노 강으로 도주하던 프랑스군 패잔병들도 많은 수가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 강물에 빠져 살상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항하다 화승총 부대에 포위되어 말에서 떨어져 제국군한테 붙잡혀 포로 신세로 떨어졌다. 결국 프랑스 입장에서는 치욕의 대패였다.
이 전투로 인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5000명''' 반면 합스부르크는 고작 '''500명'''이었다. 이 경이로운 교환비는 기존의 기사와 장창병을 내세운 중세적인 재래식 군대가 더 이상 화기를 당해내지 못함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물론 프랑스군에는 포병대가 있어서 총병대에 대응할 수 있었으나 문제가 프랑스군이 포병에 대한 보호를 신경 쓰지않았던 나머지 이 야습으로 인해 프랑스군 포병들은 독일군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신생 스페인군의 강대한 위상을 유럽 내륙에까지 떨치게 되는 희생양 신세를 면치 못했다. 또한 무적으로 칭송받던 스위스 용병대는 몰락일로를 걷게 되었다.
특히 제국군은 화승총이라는 신무기의 위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군의 전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집중된 전력으로 공격하고 공성전에 집중하고 있을 때 취약한 후방부터 공격하고 총병대의 공격으로 프랑스군 기병대와 보병대의 연계를 차단해 버리는 등 전술적으로도 우수했다.
이 전투의 결과, 이탈리아를 장악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보려던 프랑스의 야심은 좌절되고 기존의 영향력을 크게 잃고 만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이송되어 유폐당했다가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카를 5세는 명실공히 유럽의 패자로 등극해 맞설 자가 없게 되었고 후에는 이탈리아를 장악하여 교황마저 압박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 화승총이 제식 무기로서 본격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보병의 위상이 상승함에 따라, 이로 인한 기사 계급의 퇴조는 유럽 각국이 봉건제에서 절대왕정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프랑수아 1세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스페인에 맞섰다.

3. 영향


'''총포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전투의 핵심에 서기 시작한 역사상의 전환점'''
21세기인 지금도 보병의 기본 장비로 쓰이는 이, 유럽 전사상 처음 본격적인 제식 무기로 활용되기 시작한 분수령이라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한 봉건제도의 상징이던 기사계급이 몰락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중세를 걷어냈다는 의의도 있다.

4. 대중매체의 묘사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역사적 전투의 한 전투로 플레이 가능하다. 유저는 신성 로마 제국 진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란즈크네흐트 장창병대와 화승총병대의 연계가 중요하다. 장창병대가 적의 발을 묶는 사이 화승총병대가 적을 처리하는 식. 화승총병대는 앞에 아군이 있으면 사격하지 않기 때문에 장창병대를 화승총병대에 사격을 방해하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섞어두는 것이 관건이다.

5. 관련 문서



[1] 스페인 왕국 + 신성 로마 제국.[2] 그리고 30년 전쟁 시에 종교도 포기하고 신교 측에 가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 군을 패배시켜 120여년만에 설욕에 성공했다.[3] 단순한 '흉갑기병' 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 프랑스군 정예 기병부대는 단순히 흉갑만 착용한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말까지 완전 무장한 중갑기병인 장다름(Gendarme, 미디블2: 토탈 워에 나오는 그 친구들), 그리고 이들은 이 당시 유럽에서 최강의 기병대라 봐도 손색이 없었다.[4] [image] (이렇게 생겼다.)[5] 이 전쟁은 스위스 역사상 유일한 타국 침공 사례이며, 또한 중세 유럽 최강으로 정평이 나 있던 스위스 용병이 프랑스 중기병에게 대패하여 파비아 전투와 더불어 가장 크게 참패한 굴욕적인 전투였다.[6] 당시에는 아직 스위스 서약동맹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라우뷘덴(Graubünden)주 출신 용병부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