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도독령

 



'''필리핀 도독령'''
'''Capitanía General de las Filipinas'''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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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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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 1898년[1]
위치
필리핀 제도 및 ,
팔라우, 캐롤라인,
북마리아나 제도
수도
마닐라
정치체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국가원수
국왕, 도독
언어
스페인어
종교
가톨릭
성립 이전
누에바에스파냐
멸망 이후
미국 통치기 필리핀,
, 독일령 뉴기니
1. 역사
1.1. 초기
1.2. 중후반기
1.3. 카티푸난의 독립 운동과 미국-스페인 전쟁
2. 참고 문헌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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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부터 1898년까지 존속한 스페인 제국식민지이다.
도독령(Capitanía general)이란 부왕령(Virreinato)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 스페인 본국에서 파견한 도독(Capitán General)이 통치하였다. 필리핀 도독령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속하였다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폐지된 1821년부터 독자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1. 역사



1.1. 초기


필리핀은 1521년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은 포르투갈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Fernão de Magalhães)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마젤란은 라푸라푸 왕의 군대에 의해 세부에서 사살되었다. 마젤란과 함께 있던 일부 스페인군들은 퇴각하여 스페인으로 귀환하였다. 마젤란의 실패 이후에도 스페인은 1525년부터 1564년까지 5차례 원정대를 필리핀에 파견하였다. 앞서 네차례의 원정은 전부 실패하고 1564년 2월, 마지막 다섯번째 원정대가 4척의 함대에 380명의 선원으로 필리핀 세부에 도착하였다. 이 함대를 지휘한 이가 바로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였다. 그는 필리핀 도독령의 초대 도독이 되었다.
레가스피의 함대에는 군인들과 더불어 성직자 6명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스페인의 필리핀 기독교화에 앞장섰다. 1565년 세부를 평정한 레가스피는 그곳에 영구정착지를 수립하고 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1569년에는 세부에서 파나이로 근거지를 옮기고 필리핀 정복을 계속하였다.세부와 파나이를 중심으로 스페인인들은 몇년동안 필리핀 주변 지역을 조사, 탐험하며 필리핀 정복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을 위시한 신성 동맹오스만 제국을 물리치자 여유병력이 필리핀으로 흘러들어왔다.
스페인군이 증강되자 본격적인 필리핀 정복사업이 벌어졌다. 레가스피와 스페인군은 필리핀 북쪽으로 이동하여 당시 이슬람 국가 치하에 있던 마닐라를 공격하였다. 1572년 6월 24일 후에 필리핀의 수도가 될 마닐라는 스페인의 식민지 도시로 선포되었다.
스페인은 마닐라를 정복한 이후 레이테, 파나이, 민도로 등을 차례차례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정복 활동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미 필리핀에 일정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이슬람 국가들은 스페인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하였다. 이 저항을 모로 전쟁이라고 부르며, 1578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종료되는 1898년까지 약 300년 동안 벌어졌다.[2]
스페인인들의 필리핀 도래 이후 비교적 빨리 통치체제를 확립하였고, 기독교(가톨릭) 개종 사업도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필리핀에는 스페인인들이 기대한 , , 향신료 등 값진 물품이 많지 않았다. 마닐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스페인인들은 식량을 주변 원주민들로부터 강매를 통해 헐값으로 구매하였고, 다른 물품은 중국 상선을 통해 공급받고 있었다. 중국 상선은 일용품, 식료부터 도자기, 비단, 등 기호품까지 다양한 물품을 싣고 마닐라로 내항하였다. 스페인인들은 이들로부터 얻은 아시아 상품들을 또다른 스페인 식민지였던 멕시코와의 무역에 이용하였다.
중국에서 마닐라로 들어온 물품들은 갈리온을 통해 운반되어 태평양 건너 멕시코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돌아오는 배는 은이 실리고, 은은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 통칭 갈리온 무역이라고 불리우는 이 중개무역으로 스페인 본국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스페인은 갈리온 무역 외에 필리핀의 다른 경제 활동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1572년부터 시작된 이 무역은 19세기에 쇠퇴하게 되어 결국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1815년 폐지되었다.

1.2. 중후반기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독점적인 무역체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영국은 7년 전쟁이 한창이었던 1762년부터 1764년까지 필리핀을 점령하여 스페인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다. 7년 전쟁 종전 이후 파리조약(1763년)을 통해 스페인은 영국으로부터 필리핀을 반환받게 되었다.[3]

필리핀의 생산양식이 크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대농장경영 형태인 아시엔다(Hacienda)의 등장 이후였다. 갈리온 무역의 쇠퇴와 스페인 지배 하 남미 국가들의 독립으로 스페인은 기존에 시행하던 정책 대신 새로운 정책을 필리핀에 도입하였다. 1778년부터 1787년까지 계속된 바스코(José Basco y Vargas) 도독의 정책으로 인해 필리핀의 경제는 발전하였다. 특히 이 시기 상품수출을 위한 농업이 나타났고, 잉여를 위한 형태로 경작방식이 바뀌었다.[4] 도독령 정부는 식민지 경쟁국들이 그러한 것처럼 특산물을 재배하여 매매하기 시작했다. 1781년 필리핀 경제 사회청을 신설하고 1782년 담배전매제를 시행하였다. 1783년부터 1795년까지 약 12,297,772페소 어치의 담배가 스페인으로 수송되었다. 담배와 함께 사탕수수, 마닐라삼 등의 전문경작이 필리핀에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들 작물은 아시엔다라는 이름의 대농장 형태로 경영되었다.[5]
초기 아시엔다는 지주, 소작의 직접적인 관계로 형성되었으나 이후 중간 착취자인 임대자(inquilino, 잉킬리노)층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지주와 소작 사이에서 부를 축적했고 이렇게 축적된 부의 일부를 교육에 투자하여 지식인 계층을 형성시켰다. 필리핀 독립운동 초기에 등장하는 계몽지식인층이 바로 이렇게 형성된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6] 1834년 마닐라가 세계 무역항으로 개항되고나서 아시엔다는 필리핀의 특산물을 생산하는 특유의 생산양식으로 발전하였다.

1.3. 카티푸난의 독립 운동과 미국-스페인 전쟁


스페인 본국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저항은 식민 초기부터 있어왔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 였다. 19세기 전반 유럽을 강타한 자유주의 사상은 스페인과 그 산하 식민지들도 예외가 아니였다. 대부분의 중남미 식민지들이 1820~1830년대에 독립을 선포했고, 이 소식은 필리핀에도 전해졌다.
또한 마닐라의 개항 이후 필리핀의 토착 엘리트들이 성장함에 따라 필리핀의 경제적 지배계급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필리핀의 민족 의식이 각성하였으며, 이는 필리핀의 지배 국가인 스페인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영향력 확대는 스페인인들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필리핀인들의 개혁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강압적으로 진압했고, 이는 무력을 동반한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1872년부터 1898년까지의 시기는 '반스페인 민족운동이 조직된 시기'로 간주되고 있다.[7]
1872년 1월 20일 발발한 카비테 폭동(Cavite Mutiny)을 스페인 당국이 과잉 진압하자, 필리핀인들은 이를 문제삼고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호세 리살(Jose Rizal)을 위시한 이 온건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보다는 동화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1892년 6월, 리살이 스페인 당국에 체포됨으로써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필리핀인들은 온건적인 개혁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동반한 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 1892년 7월 7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 발렌틴 디아스(Valentin Diaz), 테오도로 라타(Teodoro Plata), 라디슬라오 디와(Ladislao Diwa), 데오다토 아라노(Deodato Arellano)와 그 외 몇 명이 모여 '카티푸난(Katipunan)'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수립되었다.
이들의 결성 초기에는 200여명에 불과했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조직원들이 증가하였다. 1896년 8월 23일 '푸가드 라윈의 절규(Cry of Pugad Lawin)'를 신호로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 전쟁을 시작할 때는 무려 수십만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궐기는 사전에 스페인 당국에 의해 발각되었다. 1896년 8월 29일 자유를 위한 총궐기(General uprising)라는 형식으로 스페인 당국에 선전포고하였다. 블랑코(Ramón Blanco y Erenas) 도독은 8월 30일 계염령을 선포하고 즉각 대응하였다. 카티푸난의 궐기는 필리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나 스페인 당국의 강력한 대응으로 서서히 약화되어갔다. 게다가 카티푸난 내부의 주도권 싸움으로 보니파시오가 실각하고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후에 필리핀 제1대 대통령이 됨)가 지도자가 되었다.
1897년 4월 스페인 당국은 리베라(Fernando Primo de Rivera)를 필리핀 신도독으로 부임시켜 혁명세력을 저지하게 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포고령을 반포하는 등 카티푸난을 저지하려 했으나 여의치않았다. 양측의 교전이 장기화되자 스페인 당국은 아기날도 측에 협상을 제의하였다. 리베라 총독과 파테르노(Pedro A. Paterno) 사이에 마련된 휴전안을 통해 1897년 12월 15일 양측은 협상에 조인하였다. 협상안을 통해 아기날도와 그 일행은 자발적으로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그 비용 부담 및 필리핀인들의 피해 보상을 스페인 당국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휴전안을 신뢰할 수 없었던 일부 카티푸난 지도자들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스페인 당국 역시 협상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의 무력 충돌은 1898년 2월 중순부터 다시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충돌은 1898년 5월 미국-스페인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카티푸난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 아래 마닐라와 그 근교지역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필리핀의 지역을 장악한 카티푸난은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한편 파리조약(1898년)에 의해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양도받았고, 이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였다.[8]

2. 참고 문헌


  • 유인선 (1990). 필리핀의 역사와 문화 - 필리핀근대사의 성립과 전개과정 -. 아세아연구, 33(2), 305-346.
  • 서용석 (1997). [연구논문1]필리핀의 식민지 경험과 사회발전 : 1898-1946. 비교사회, 200-269.
  • 권오신 (2009). 스페인지배 말기의 필리핀 독립운동: 미완의 혁명(1896-1898). 아시아연구, 11(3), 47-76.
  • 조병욱, '이야기 필리핀사', 해피&북스, 2013

3. 관련 문서



[1] 스페인령 동인도까지 범위를 확대할 경우 1901년까지[2] 스페인 지배 초기 필리핀인들의 저항은 강제이주나 개종에 반발하는 정도로, 단순히 낮선 외국인과 외부종교의 자의적인 태도에 대한 저항일 뿐이었다. 17세기 이후에 지배에 대한 반란의 원인은 가혹한 공세와 강제노역 등이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나타난 조직적인 움직임은 무력 시위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 권오신 (2009), 53p[3] 그러나 당시 통신 시설의 미비로 이 소식이 필리핀에 알려진 것은 이듬해인 1764년이었다.[4] 유인선 (1990), 318[5] 아시엔다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로부터 땅을 임대받은 카사마(Kasama, 자기 토지가 없는 농민들)가 토지를 경작하고, 소작 형태는 지주와 소작인이 생산비를 분담하여 부담에 따라 생산물을 나눴다.[6] 유인선 (1990), 320[7] Martneg, 1983: 39-41[8] 필리핀 제도와 괌 외에 팔라우, 캐롤라인, 북마리아나 제도1899년 스페인이 독일 제국에게 매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