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

 



'''이름'''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y Palacios Ponte-Andrade y Blanco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이 팔라시오스 폰테안드라데 이 블랑코[1]
'''출생'''
1783년 7월 24일,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 카라카스
'''사망'''
1831년 12월 17일, 그란 콜롬비아 산타마르타
'''국적'''
그란 콜롬비아
'''신장'''
168cm
'''경력'''
그란 콜롬비아 제 1대 대통령
(1819년~1830년)
페루 제 8대 대통령
(1824년~1826년)
볼리비아 제 1대 대통령
(1825년~1826년)
'''별명'''
El Libertador(해방자)
1. 개요
2. 생애
2.1. 탄생과 성장
2.2. 독립운동
2.3. 몰락
3. 평가
4. 어록
5. 기타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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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자 대지주, 그란 콜롬비아의 초대 대통령이며 남아메리카 6개국(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를 독립시킨 해방자(El Libertador엘 리베르타도르)이자 독재자가 된 영웅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탄생과 성장


1783년 카라카스(독립 후 베네수엘라의 수도가 된다.)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데팔라시오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병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흑인 노예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그게 흑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흑인 노예 해방을 이야기하게 된 건 아이티에서 지원받게 된 다음 이야기다. 정작 그러고도 여전히 pardocracia(거칠게 번역하면, '깜둥이 정치?')를 두려워했다.
9살이 되던 1792년, 어머니마저 병으로 사망하자 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후아나는 결혼을 하고, 형인 후안 비센테도 다른 가정의 양자가 되면서 남매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난 이후 볼리바르는 처음엔 외할아버지 - 외할머니 내외의 집에서 맡겨졌으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나이가 많아 시몬을 부양할 능력이 떨어졌고, 곧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에게 맡겨졌다.[2] 그러나 성격이 엄격한 외삼촌과 허영심이 많은 외숙모와 계속 갈등을 빚었고[3], 결국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외삼촌의 집을 나가 첫째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큰매형 내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시몬의 가출에 반발한 외삼촌 카를로스는 시몬의 거주 양육권을 놓고 시몬과 마리아 - 큰매형 부부와 법적 싸움까지 벌였으나, 당시 식민지 법원에서 시몬의 양육권이 누나 - 매형 부부에게 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결국 패소하였다. 한편 이후에 시몬은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1769 ~ 1854)를 만나 계몽사상에 눈뜬다. 당시 스페인에서 독립하겠다는 크리오요[4]가 많았고 시몬 로드리게스도 그 중 하나였기에 볼리바르가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다. 다만, 볼리바르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크리오요 집이라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로드리게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망명하면서 안드레스 베요(1781 ~ 1865)에게 새로이 지도받는다. 이때 사관학교입학하였다.

2.2. 독립운동


시몬 볼리바르는 1799년에서 1802년까지 멕시코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끓어오르던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특히 스페인의 지식인인 후작 우스타리스와 만나면서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볼리바르는 마드리드에서 외삼촌인 페드로 델토로[5]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귀향하는데 아내가 황열병으로 9개월만에 쓸쓸히 죽는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시몬 볼리바르는 재혼하지 않았다.[6]
유럽으로 돌아가 이곳저곳을 떠돌던 볼리바르는 스승 로드리게스를 만나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서 그 유명한 '산상 선언'[7] 을 외쳤다.
귀향한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노장군 프란시스코 미란다(1750~1816)와 안드레스 베요와 함께 1811년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을 세웠다. 이 공화국은 스페인 섭정 행정부에서 '유색인종'에게 인정했던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정하고 일정 이상 재산을 갖춘 이만 참정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스페인 왕이 명했던 여러 유색인을 배려한 법을 없애려고 하자 당시 베네수엘라 인구 80% 이상을 차지하던 '비백인'들이 반발했고 이것은 1812년 지진을 기점으로 폭발하였다. 발렌시아에서 행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유색인종'이 저항을 선언하자 제1 공화국은 전원 백인으로 구성한 군대를 보내 저항을 억눌렀으나, 스페인 왕정과는 달리 인정사정없는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에 반발한 절대 다수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지원으로 왕당파가 세를 얻었고 그러한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볼리바르는 퀴라소 섬으로 망명해야 했다.[8]
그 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옮겼다가 여기서 '카르타헤나 선언' 으로 베네수엘라와 누에바 그라나다[9]의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 8월 4일 3년 만에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여 '해방자' 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경험 부족과 물자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연전연패해서 아이티로 결국 망명했다. 당시 남부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페숑은 흑인 노예의 독립을 조건으로 1,2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원했으나 볼리바르는 계속 패배한다.
이 난관을 타개하고자 볼리바르는 야노스[10]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을 벌여 스페인군을 이기고 이어서 1819년 피스바 산을 넘어 콜롬비아로 쳐들어간다. 여기서 볼리바르는 영국군아일랜드군의 지원을 받아 콜롬비아를 정복하고 '그란 콜롬비아 Grand Colombia 공화국'[11]을 선언한다.
잠시 휴전으로 병력을 추스른 볼리바르는 1821년 6월 24일 카라보보 전투에서 승리하고 키토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키토를 함락시킨다.[12]
그 후 아르헨티나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물리친 호세 데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13]을 하고서 산 마르틴이 유럽으로 망명하자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수크레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부왕(副王, Viceroy)[14]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면서 페루마저 함락시킨다. 이로써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이 지배력을 영구히 상실하였다.[15]

2.3. 몰락


그 후 지금의 콜롭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거대한 그란 콜롬비아의 종신 대통령을 지내던 시몬 볼리바르는 연이은 반란과 권력투쟁 등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결국 1830년엔 대통령직마저 사임한 채 콜롬비아로 떠나간다.
은퇴 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의 별장에서 요양하다가, 폐결핵으로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47세에 죽는다.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3. 평가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같은 동네의 칠레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되어 큰 혼란을 겪었다.[16] 어떻게 보면 워싱턴이나 산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고생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13개 식민지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패권을 쥐락펴락하는 슈퍼파워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는 슈퍼파워까지는 아니어도 통합에 성공했고,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 역시 통합에도 성공했고, 1929년 미국발 대공황 이후로 정치적 혼란을 거치며 쇠퇴하긴 했어도 스페인에서 독립 이후 한때 남미의 강대국으로 그 위세를 떨쳤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잘 못나간 것은 자업자득인 면도 있다.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세운 공화국을 망쳤다. 실제로 옆의 사람들이 종신 대통령의 자리를 권했고 딱히 반대할 만한 세력도 여론도 없었던 상황에도, 자기 자신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며 두 번 재임 후 은퇴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오이긴스 또한 칠레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독재를 시도하려다가 반대파 세력들의 압력에 승복하고 사퇴했다.[17]
지리적인 요인도 한 몪했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 대서양의 해안저지대가 남북으로 영토가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는데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된 험준한 지형들로 가로막혀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방대한 면적의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볼리바르는 해방된 남미가 다시 유럽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지 않으려면 남미의 여러국가가 모두 힘을 합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같은 거대 연방제체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그란 콜롬비아 연방'''은 각 지역이나 계층, 신분에 따른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지리적인 악조건까지 겹치면서 제대로 된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당시 베네수엘라 부통령은 파에스(야노스 군벌 출신)였고 콜롬비아 부통령은 프란시스코 파울라 데산탄데르(법학도 출신)[18]였는데 파에스가 자기가 대통령을 해먹고 싶어서 반란했다가 항복하자 볼리바르는 아무런 처벌 없이 부통령직을 계속 맡기는데 산탄데르는 중앙 행정부의 권력과 법이 땅에 떨어졌다 느끼면서 분노하고 이후 볼리바르의 정책에 계속 태클을 건다.[19]
이후 둘은 계속 갈등하여 결국 볼리바르는 부통령직을 없애기에 이르고 산탄데르의 반란을 유발한다.[20]
게다가 이런 거대 신생국을 유럽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기에 은밀히 내부 분쟁을 부추겼고, 연방 안에서도 각 계층과 인종 간의 여러 갈등이 터지면서 그란 콜롬비아가 결국 해체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주의에 영향받기는 했어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원주민은 잠재된 '적'으로 여기고 '유색인종'을 멸시했다.[21] 시몬 볼리바르가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음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시몬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를 게 없다.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시몬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 존경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시몬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애증의 대상이 될 듯 싶다.[22] 하지만, 아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시몬 볼리바르도 인종차별주의 의혹에 대해 항변할 여지는 있었다. 아예 유럽계 백인과 메스티소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에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 같은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23] 등과는 달리, 지금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구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못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위정자들은 애써 건설한 자유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는 상황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볼리바르가 흑인들에게는 전혀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지라, 그의 원주민 배제 정책이 꼭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는 실정이다[24].
일단, 이와는 별개로 그가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릴 적에 자신의 유모이기도 했던 흑인 노예인 이폴리타에 대한 일화나[25]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없이 친하게 지냈던 것, 그리고 아이티 망명 중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군인 아이티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26]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7].
다만 그래도 시몬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과 궤를 달리하고 또 인정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독재자가 된 다른 이들과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갓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대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청소하는 전횡을 휘두르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이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 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하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물욕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날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특히 원래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은 다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집은 커녕 모아놓은 재산이 한푼도 없었기에 퇴임 뒤에 그에게 호의적인 후원자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농장에서 칩거하며 살아야 했다.[28] 오죽하면 그가 47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다 못해 아주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즉 통일 남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신념에 매몰되어버린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4. 어록


'''Los tres grandes majaderos de la historia hemos sido Jesucristo, Don Quijote... y yo.'''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셋 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나 볼리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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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싸운 우리들은 바다 위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

'''¡Colombianos! Mis últimos votos son por la felicidad de la patria. Si mi muerte contribuye para que cesen los partidos y se consolide la Unión, yo bajaré tranquilo al sepulcro.'''

'''콜롬비아인이여! 나의 마지막 소원은 국가의 행복이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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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almas generosas se interesan en la gente que busca recuperar los derechos otorgados por el Creador y la naturaleza.'''

'''관대한 영혼들은 항상 조물주와 자연이 부여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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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나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자기는 침략자가 아니고 원주민은 적이란 소리다. 중앙,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우 순수 백인이나 순수 원주민보다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혼혈이 더 많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이 드문 케이스라 비교적 쉽게 침략자 백인 vs 피해자 원주민의 구도를 만들 수 있는 북미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런 혼혈적 정체성은 중남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29]
그런데 스페인의 침략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원주민과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가 반드시 혼혈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횡설수설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기실 스페인 부왕령의 일부였던 구역들도 스페인 출신 행정가가 직접 부임하지 않고 현지 원주민 수장을 카시케(Cacique)로 임명해서 장원 비슷하게 운영하도록 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볼리바르 입장에서는 실제로 원주민들이 돌발행위를 벌이면 6개국이 허망하게 무너질 것으로 경계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 되어도 최소한 국가 선거 정도는 치를 수 있는 21세기와 같은 상황이 아니다.

5. 기타


  • 아메리카 대륙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다.
    • 베네수엘라의 정식 국명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u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이다. 본래는 베네수엘라 공화국이었다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999년 개헌 당시에 베네수엘라의 국명에 볼리바르를 넣자고 제안해서 바뀌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 건국공신으로 존경받아왔던 인물이다.
    • 볼리비아라는 국명도 볼리바르에서 따온 것이다.[30]
    • 미국 미시시피 주에 있는 볼리바르 카운티 외의 많은 미국 지명[31]과 이름에도 들어가있다.
    • 볼리바르가 해방시킨 나라들의 '볼리바르'라는 지명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 2차대전 당시 전사한 장군인 사이먼 버크너도 사이먼 볼리바르 버크너가 풀네임인데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남미의 혁명가였지만 명성이 미국에도 많이 알려진듯 하다.
  • 가정적으로 굉장히 불행했는데 앞에서 말한대로 부모를 어린 시절에 잃었고[32] 그가 사랑하여 2년간 구애한 끝에 결혼한 아내 마리아 테레사 델 토로도 결혼한지 8개월만인 21세에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아내가 자식없이 사망했고 볼리바르는 이때 크게 슬퍼하면서 두번 다시는 결혼하지 않아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33]
  •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의 화폐명 또한 그의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다.
  • 남미합중국(United States of South America)을 꿈꿨을 정도로 미국의 정치 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34] 동시에 미국을 매우 경계하였다. 당시 미국은 대서양 연안에만 발을 걸친 2류국가였지만,[35]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남미 쪽에는 당시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을 쏟을 수 없었으며[36] 볼리바르가 활동하던 19세기 초 당시 미국은 북미대륙 동부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갓 독립한 나라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대륙 중심부의 프랑스령을 팔아넘겼지만 개척은 고사하고 이제 막 탐사대가 오가던 정도. 제국주의는 고사하고 집안살림 챙기기에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우려대로 "먼로 독트린"을 앞세운 미국은 남미를 뒷마당으로 여기며 현재까지도 남미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우고 차베스가 볼리바르를 추앙했던 것도 이 점을 반영한다.
  • 시몬 볼리바르가 사용했던 검이 콜롬비아에 보관되어 있다.
[image]
원래 보고타의 볼리바르 생가에 보존하고 있었는데 1973년 2월 17일 콜롬비아의 반군인 M-19가 이걸 훔쳐가버렸다. 이때 M-19는 "볼리바르 당신의 검이 전쟁터로 돌아갑니다"(Bolívar, tu espada vuelve a la lucha)라는 똘기넘치는 글을 벽에 남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훔친 검의 행방을 두고 여러 설이 있는데 쿠바피델 카스트로부터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까지 다양하다. 특히 파블로 설은 파블로의 아들인 후안(Juan Pablo Escobar)가 증언한 부분이라 신빙성이 높다(출처:스페인어). 이후 여러 곳을 떠돌던 검은 1991년에 다시 콜롬비아 정부로 돌아왔다.
이 검의 상징성 때문인지 베네수엘라 같은 상당수의 남미 국가들이 예검으로 볼리바르 검의 모조품을 지급하고 있다.
  • 게임 문명 6에서 그란 콜롬비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정복 성능이 너무 강력해서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로 만들어버렸다.
  • 베네수엘라에서도 영웅으로 존경한다.

6.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



[image]
왼쪽의 남자. 오른쪽은 아멜리아 블랙.
영어식 발음을 참조해서 그런지 이름이 '''볼리바'''로 나온다. 한국판 성우는 정승욱. 스페인군에 맞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잉카의 후예들을 만나러 온 아멜리아 블랙카넨케와 만난다. 볼리바르는 아멜리아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파카마요 계곡을 통과할 안내자를 붙여주기로 약속한다.
시몬 볼리바르와 그의 군대는 아군이 조작 불가능한 동맹군으로 나오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각 마을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동한다. 해방된 마을의 시설은 아군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본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사령부를 무너뜨리면 승리하게 된다.
전투 후 볼리바르는 약속대로 안내자를 붙여주고 아멜리아는 그를 격려하며 헤어진다. 근데 안내자로 붙여준 병사 중 하나가 쓰레기 잉여 유닛 중 하나인 스트렐치다.
결정판에서는 혁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들 중에서 페루를 선택한 경우, 시몬 볼리바르가 유닛으로서 직접 등장한다. 혁명이 완료되는 즉시, 홈 시티 집결 지점으로 볼리바르가 소환되는 식이다.

7. 참조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결국 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시몬이 외삼촌 카를로스와 첫째누나 마리아의 집을 떠도는 와중에 노환으로 사망한다.[3] 부모 양친을 모두 조실부모한 외조카 볼리바르를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고 부하직원 대하듯이 차별했다. 그래서 볼리바르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무척 싫어했다. 실제로 과거 8,90년대에 발간했었던 웅진위인전기 전집의 시몬 볼리바르 편에서는 어린 시절의 시몬이 외숙모의 유리 접시를 깨트려 외삼촌 - 외숙모 내외와 갈등을 빚는 일화가 나온다.[4] 중남미의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들을 일컫는 호칭이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본토 사람들에게 온갖 차별을 당하였고 군인들도 '''최고로 높게 진급을 해야 대위''' 정도에만 진급할 수 있었다. [5] 그래도 이 사람은 다른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보다는 온건했다.[6] 단 일부 애인 등은 있었다.[7]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얻을 때까지 내 팔에 자유를 주지 않겠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선언이다.[8] 미란다는 스페인으로 끌려가 옥사했고, 베요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칠레에 정착해서 법률학자 및 국립대학 총장이 된다.[9] 훗날의 콜롬비아와 파나마.[10] 베네수엘라 남부 초원지대.[11] 현재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파나마), 키토(에콰도르)를 포괄하는 지역[12] 키토는 에콰도르의 수도가 된다.[13] 이 회담은 역사상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미스터리한 회담이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좋게 끝내지는 못했다는 것뿐이다.[14]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한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領)' 이었고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15] 우루과이는 1830년에 브라질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여기서 제외된다.[16] 심지어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는 인접국끼리 전쟁까지 벌였다.[17] 물론 워싱턴이 엄청나게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걸 감안해야 한다. 워싱턴 재임시절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등, 대통령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와 선거군주에 가까웠는데도 독재를 하지 않고 스스로 내려왔기 때문이다.[18] 그러나 볼리바르 밑에서 군인으로 상당히 오래 재직했다. 또한 그란 콜롬비아 초대 부통령이었다.[19] 그러나 산탄데르가 소인배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산탄데르의 경제 정책 상당수를 볼리바르가 폐기한 적이 있었고 파에스를 아무런 처벌 없이 부통령직에 맡겼기 때문에 자업자득인 셈이다.[20] 다만 산탄데르가 정말 반란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점이 상당하다. 불참했지만 알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누명이다 등등 이야기가 분분하다. 산탄데르는 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볼리바르는 이를 사면하고 유배를 보냈으며, 산탄데르는 볼리바르 사후 1832년부터 1836년까지 누에바 그라나다 대통령직을 맡는다.[21] 이건 훨씬 이후에도 마찬가지긴 해서 볼리비아에선 1940년대까지 원주민의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도 후안 페론이 아니면 원주민들이 다 멸족되었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로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몰아내거나 가혹하게 마구 죽인 역사가 있으며, 칠레는 마푸체와 야간, 카웨스카르 등 원주민 집단들에 대한 학살을 일삼았으며 차별이 현재진행형이고 우루과이에서는 아예 독립을 지원한 원주민들의 뒷통수를 쳐서 원주민들을 쏴 죽이거나 노예로 팔기도 했으며, 에콰도르나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는 원주민을 그리 좋게 대하지 않았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3국 동맹 전쟁 이후 남성 인구가 너무 적어져서 급속도로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한 파라과이.[22] 반면 백인들이 다수인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선 스페인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호세 데 산 마르틴과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국부로 존경받는다.[23] 자국 국민 대다수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거나 그냥 원주민이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스페인의 식민지 합병 이전의 아즈텍이나 마야, 톨텍 등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에서 국가적 정통성을 찾았던 연유 때문인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공적인 대우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자마자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과거 원주민이 살던 지역에 백인 이주민들을 닥치는데로 부어대어 자국내 남미 원주민 그룹들을 인종청소하였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보다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백인 출신 대통령들 밖에 나오지 않았던 이들 3개국과 달리,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 등 원주민 출신 대통령도 존재했다.) 실질적으로는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억압, 홀대가 존재했으며 북부 지역의 아파치나 치치멕 같은 원주민 부족들의 경우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마푸체나 테우엘체 족과 같이 멕시코 정부에서 무력으로 토벌한 바 있었다.[24] 원래 일국의 국가원수라면, 자국의 안보 문제에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게 정답이다. 노예 제도와 인종차별을 끝까지 반대하고 철폐하려 했던 인도주의자인 에이브러햄 링컨조차도 남북전쟁의 와중에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중의 하나인 나바호족이 연방 정부에게 개기면서 남부로의 합류를 선언하자, 즉각 군대를 파병해서 이들을 철저히 토벌한 전적이 있다. 이는 명백히 미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던지라,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링컨의 이런 행보를 두고 위선이라고 보지않고 있다.[25] 어린 시절의 볼리바르는 형인 시몬 비센테와 사이가 매우 나빠서 자주 싸우곤 했는데, 이에 그의 유모인 이폴리타가 형제의 싸움을 뜯어말리려하자 시몬 비센테가 '''"노예 주제에 어디서 끼어드냐?"'''며 막말을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더욱 분노한 볼리바르가 온 가족들에게 '''"이폴리타는 노예가 아니라, 내 엄마다."'''라고 외쳐서, 유모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26] 이 일화는 백인 우월주의 정책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에서 추방된 뒤의 일이다.[27]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의외로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하다. 남북전쟁 때도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배를 불렸던 남부의 노예주들만 해도 정작 자신들과는 인종이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는 거리낌없이 동맹을 맺었으며, 동 시기의 북부에서도 노예 제도 폐지와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 그 이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는 등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잘만 했다. 이런 식으로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게만 차별의식을 갖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28] 다만 말이 농장이지 실제론 큰 별장이었고 호아킨이 볼리바르한테 좋은 대우를 해주었기에 거주는 괜찮았다.[29] 백인이 다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는 제외. 물론 백인-원주민 혼혈은 적지 않지만 오랜 원주민 틴압 등으로 인해 정체성도 혼혈인 경우는 적다.[30] 볼리비아의 수도 중 하나인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부하 장군이자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통령을 지냈던 그 수크레에서 따온 것이다.[31] 이 중에서는 '볼리버' (Oliver 앞에 B 발음 넣은 것)처럼 발음되는 경우가 많다.[32] 물론 누나와 형 등 형제들이 있긴 했다.[33] 사실 마누엘라 사엔즈라는 여성을 애인으로 사귀었으나 마누엘라는 볼리바르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정작 볼리바르가 거부하여서 결혼이 실패한다.[34] 당시 미국처럼 안정적인 공화정은 매우 드물었고,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한 프랑스 공화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계몽주의의 전통에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35] 본격적으로 서부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860년 이후 남북전쟁 이후이다.[36] 어떤 작가가 스페인 문학사를 쓰려고 했더니 스페인어 사전이 하나도 없어서 유럽에 요청해야 했을 정도. 먼로 독트린도 남미 독립이 완전히 끝난 1830년에 발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