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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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552년 7월 18일 ~ 1612년 1월 20일(만 59세)
재위기간 : 1576년 10월 12일 ~ 1612년 1월 20일
1. 개관
2. 쾰른 전쟁
3. 대오스만 장기전[1]
4. 도나우뵈르트 사건
5. 신교도 동맹 결성과 루돌프 2세의 보헤미아 도주
6. 보헤미아와 신앙 자유 칙서(Letter of Majesty)
7. 율리히 클레베 베르크 분쟁 개입
8. 앙리 4세의 위협
9. 루돌프 2세의 파멸과 최후


1. 개관


신성 로마 제국황제. 암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실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루돌프 2세의 형제들에게는 거의 영지를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슈타이어마르크의 대공인 카를이 가지고 있는 일부의 영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영지의 권한이 루돌프 2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루돌프 2세가 즉위했을대 그의 황권은 막강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한 루돌프 2세는 예술, 평화, 과학을 사랑했다. 독일의 답답한 궁정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던 그는 곧 다른 쪽에 취미를 두었다. 그는 천문학과 점성술[2], 자연사, 연금술, 고고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보석, 골동품, 미술품 등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고, 황제는 신하들의 눈에서 벗어나 방에 틀어박혀 점성술과 연금술 실험에 매달렸다.
이렇게 황제가 정치에 무관심하고 신하들이 황제를 배알하기 힘들어지자 점차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결속하는 힘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된다.

2. 쾰른 전쟁


쾰른 선제후인 게브하르트 폰 트루크세스 발트부르크가 만스펠트 백작가의 영애,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문제는 쾰른 선제후가 가톨릭의 대주교라는 것이었다. 만스펠트 백작가는 신교도, 그것도 칼뱅교도였기 때문에 더 문제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만스펠트 백작가의 사람들은 게브하르트 선제후를 찾아가 아그네스와 관계를 끊거나, 아니면 가톨릭에서 칼뱅교로 개종한 후 결혼하라고 했다. 결국 게브하르트는 1582년 12월에 가톨릭을 버리고 1583년, 아그네스와 결혼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의 조항 중에 황제 명령에 의해 교회령의 수장이 개종하게 되었을 경우, 그 모든 권한이 박탈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게브하르트는 이 조항에 따라서 깨끗하게 선제후직을 포기하려 했으나, 쾰른 선제후령의 많은 신교도들이 선제후령을 포기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또한 신교도 선제후들도 게브하르트를 지원했다. 당시 선제후는 7명이 있었는데 그 중 3대주교(마인츠, 트리어, 쾰른)와 4세속제후 중 보헤미아 왕(당시에는 합스부르크 가 오스트리아 대공과 동군연합 상태)까지 4명이 가톨릭 교도였고 나머지 3세속제후(작센, 브란덴부르크, 팔츠)는 신교도였다. 쾰른 선제후가 신교로 개종하면 합스부르크 가가 세습하고 있는 황제의 자리마저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게브하르트가 결혼했던 시점에 쾰른 대주교직이 박탈당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3년 4월에 그를 파문시켰던 것이다. 게브하르트가 파문당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가톨릭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쾰른 선제후의 신하들은 그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의 조항에 따라 쾰른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대주교 겸 선제후를 선출한다. 새롭게 선출된 선제후의 이름은 에른스트 폰 바이에른, 당시 합스부르크가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양대 명문을 이뤘던 비텔스바흐 가의 인물이었다. 그는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의 동생으로서, 1576년 선제후 선거에서 게브하르트에게 패했던 리에주의 주교였다.
이제 쾰른은 선제후들 사이의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에른스트 측에는 바이에른 공작의 병력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있던 스페인군이 그를 도와주러 합류했다. 그러나 게브하르트는 지원 병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바로 루터교와 칼뱅교의 반목 때문이었다. 많은 루터교 제후들은 이 반목 때문에 게브하르트를 지원하는 것을 망설였다. 또한 당시 3명의 신교도 선제후들은 루터교의 신자였기 때문에 게브하르트를 지원하는 것을 주저했다.
오직 팔츠 선제후의 동생인 요한 카시미르 궁중백만이 게브하르트를 지원하러 왔다. 요한 카시미르는 팔츠의 사냥꾼으로 불리는 인물로서, 칼뱅교의 수호자라 불렸으며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군대와 바이에른군의 대군에 비교하면 카시미르 궁중백의 구원군은 너무 적었다. 곧 쾰른 선제후령의 대부분이 이들 스페인, 바이에른군에 유린당했고 많은 도시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당했다. 게브하르트는 선제후령을 떠나 베스트팔렌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저항을 계속하려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1585년에 그는 네덜란드로 도망쳐서 네덜란드 독립군의 지원을 얻어 1588년까지 계속 싸웠다. 하지만 이 역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독립군 역시 스페인의 걸출한 영웅, 알렉산더 파르네제 앞에서는 풍전등화 신세였던 것이다.
결국 쾰른 전쟁은 신교도의 완패로 끝내게 된다. 게브하르트는 영국으로 도망쳐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꿨으나, 당시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결국 스트라스부르크의 수도원에서 게브하르트는 생애를 마치게 된다.
쾰른 전쟁을 스페인과 바이에른의 도움으로 마무리지은 루돌프 2세는 다시 평안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큰 일 하나가 또 터지게 된다.

3. 대오스만 장기전[3]


1591년부터 1606년까지 계속된 Long Turkish War는,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대총독이었던 텔리 하산 파샤가 선전포고 없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던 크로아티아를 침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방군 가운데 상당수는 비정규 기병대인 아큰즈[4]들이었는데, 언제나처럼 약탈 전쟁에 나섰던 것.
하지만 하산 파샤는 1593년에 벌어진 시사크 전투에서 1453년 이래 이렇게 탈탈 털리기는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박살이 나고 본인도 전사하였으며, 일이 이렇게 되자 콘스탄티노플 정부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복수전을 주장하게 된다.
당시 크로아티아와 바로 접하고 있는 최전선이 보스니아였는데, 보스니아 대총독 하산 파샤를 비롯. 보스니아에 속한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들도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조리 전사했다. 오스만 제국의 방위체계에 이렇게 큰 구멍이 뚫리기는 아예 나라가 풍비박산이 났던 앙카라 전투 이후 이것이 처음. 이전 항목에서는 이 전투에서 패했음에도 오스만 제국이 '이 정도 타격으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라고 했었는데, 당시 오스만의 물량이 대단했던 건 맞지만 1590년에 이미 파산 선언을 할 정도로 경제력이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16세기 말기에는 동쪽의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라는 걸출한 강적과 박빙의 대결을 벌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휘관과 병사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상황은 도저히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날 역사가들은 하산 파샤의 원정은 콘스탄티노플 정부의 정책이나 이익에 들어맞기는커녕 오히려 반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며, 이로 인해 150년 동안 오스만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세르비아인 사이에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급기야는 반란까지 일어났을 정도.
그리고 당시 오스만의 황제였던 무라드 3세는 매사를 몇년 전에 사망한 모후 누르바누 술탄과 애첩인 사피예 술탄에게 맡겨 온 무능한 인물이었고, 결국 군부의 뜻을 받아들여 신성로마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쯤 되자 루돌프 2세도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 루돌프 2세는 1593년 대규모의 십자군(신성동맹)을 조직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었던 왈라키아 공국(미하이 2세 바테아즐),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지기몬드 바토리)의 공작들이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제국에 맞서 싸웠다.
1595년 8월 13일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미하이 비테아줄이 이끄는 2만의 왈라키아 병력은 오스만 제국군과 칼루가레니에서 마주쳤다. 초기에는 왈라키아군이 밀렸으나 용감공이라 불리는 미하이의 용감한 기병 돌진으로 좁은 다리를 건너던 오스만 제국군을 충격에 빠트렸다. 결국 오스만 제국군은 1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미하이 비테아줄은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트가 이끄는 4만의 병력과 합류했고, 신성 로마 제국군까지 합치자 오스만 제국군의 숫자와도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북진은 막을지언정 그들을 격퇴시키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새로 황제가 된 메흐메트 3세가 친정에 나섰으며, 1596년 10월 24일에 케레츠테스에서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대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의 오스만 제국군은 15만이었으며, 막시밀리안 대공과 바토리 지그몬트가 이끄는 5만의 병력이 케레츠테스에서 격돌했다. 연합군은 군사적 재능이 그렇게 우수하지 못했던 메흐메트 3세의 친정군을 상대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3일 간에 걸친 이 전투에서 메흐메트 3세의 대군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만 황제의 진영까지 들어간 연합군이 약탈에 눈이 먼 사이에, 오스만 제국 기병대가 연합군의 측면을 들이쳤으며 이것은 곧 연합군에 대패를 불러왔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곧 군대를 정비하고 다시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국 헝가리와 루마니아가 전장이 된 이 전쟁은 서로 결정적인 승리 없이 1606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후에 이 전쟁은 '투르크인과의 긴 전쟁', 또는 15년 전쟁, 13년 전쟁이라고 불리게 된다 '15년 전쟁' 은 1591년에 시작된 텔리 하산 파샤의 원정도 전쟁의 일부라고 간주하는 것이고, '13년 전쟁' 이라고 부르는 쪽은 시사크 전투가 벌어진 1593년에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에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때를 전쟁의 시작으로 보는 입장.
1601년, 루돌프 2세는 왈라키아 공국보이보드였던 미하이 2세를 암살한다.
게다가 신성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었지만 전쟁 중에 직접 통치하게 된 트란실바니아를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는데, 당연히 이는 대규모 반란을 불러왔다. 당시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 가운데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도도 적지 않았고,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던 루마니아인 가운데에는 동방 정교도가 많았다.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인 '이슈트반 보치커이'가 일으킨 이 반란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부치던 합스부르크 제국에 더 짐을 떠안아 주게 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트란실바니아,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루돌프 2세의 인기는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사람들조차 루돌프 2세로는 제국과 가문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 전체의 압력에 의해서 루돌프 2세는 1605년 동생 마티아스 대공에게 헝가리 전역을 종결시킬 모든 권한을 넘겼다.
1606년 11월 11일, 헝가리의 지트바토로크에서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 마티아스 대공은 독일, 헝가리의 귀족들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드시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이전보다 훨씬 더 굴욕적인 평화 조약으로 귀결되었다. 루돌프 2세는 이 협정에 맹렬하게 반대했으나, 전권을 이미 넘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정확히 말하면 1568년 이래)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매년 '선물' 이라 쓰고 '공물' 이라 읽는 금액 3만 두카토를 오스만 제국의 황제에게 주는(진상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20만 두카토로 뛰게 되었다
다만 지트바토로크 조약문은 헝가리어로 쓰여있는 것과 오스만 투르크어로 쓰여있는 것 두 종류가 현존하는데, 문제는 두 문서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헝가리어 조약문에 따르면 20만 두카토를 한 번 지불하고 끝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스만 투르크어 조약문에는 3년에 한번씩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나마 오스만 제국이 사상 처음으로 '독일의 왕' 을 황제(카이사르)로 인정했다는 것이 합스부르크 측의 성과였다.
미미한 성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이건 중국으로 치면 중화사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은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 한 사람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전까지 합스부르크 황가와 조약을 맺을 때에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가리켜 '독일 왕' 이라고 해왔다. 가령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와 헝가리의 영유권을 놓고 조약을 맺을 때에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니라 '스페인 왕' 으로. 카를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황제 대리로서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 왕' 으로 불렀지, 신성로마라는 이름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황제라고 인정했다는 건 이러한 주장을 버리겠다는 뜻이었으며, 16세기 후반 까지 중부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던 오스만의 단독 패도에 흠집이 갔다는 걸 의미했다.

4. 도나우뵈르트 사건


1606년 4월 25일 슈바벤의 도나우뵈르트 시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이 도시는 도나우 강과 뵈르니츠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도나우 강 남북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제국 자유시로서 자치권이 완벽하게 보장된 도시기도 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한때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개신교에 관대했던 페르디난트 1세와 막시밀리안 2세의 시대에 신교도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1606년에는 신교도가 절대 다수였다. 정부 전체를 신교도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제국법에 따라 가톨릭을 용인하고 있었고 구교도들은 별 문제없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도나우뵈르트의 한 수도원장이 자유롭게 자신의 신앙을 표출하고 싶어함에 따라 십자가와 5명의 수도자들을 앞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성가를 부르면서 행진을 한 것이 문제였다. 신교도들은 이것을 가톨릭 신자들의 도나우뵈르트 정부 전복 의도로 판단했던 것이다. 신교도들은 "깃발을 내리고 성가를 부르지 않는다면 성문 통과를 허락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과는 난투극이었다.
사건 자체는 작았으나 종교적 긴장감이 높아져가고 있던 때에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도나우뵈르트 교구를 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주교가 즉시 루돌프 2세에게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에서 결정한 제국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루돌프 2세는 종교간의 분쟁을 원치 않았다. 그는 도나우뵈르트에 특사를 파견하여 다시 한 번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제국 파면"의 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루돌프 2세의 떨어질 대로 떨어진 권위를 존중하는 사람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 거의 없었다. 1년 후 가톨릭 교도들은 똑같은 행진을 했고 신교도들은 심해진 폭력으로 응수했다. 황제는 특사를 다시 파견했으나 도나우뵈르트 시민들은 이를 비웃었고 특사를 쫓아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루돌프 2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도나우뵈르트 시에 공식적으로 "제국 파면"을 선포했다. 이제 도나우뵈르트 정부는 제국의 모든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루돌프 2세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을 불러서 도나우뵈르트의 "반역도"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바이에른은 독일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자처했고 막시밀리안 공작은 유럽에서 제일가는 대부호였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가톨릭과 바이에른의 세력을 확장시킬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공작은 곧 군대를 출병시켰다. 당시 바이에른의 수도는 뮌헨이었는데 도나우뵈르트 시와는 지척의 거리였다. 도나우뵈르트의 신교도들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바이에른의 군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은 즉시 항복을 선언했고 막시밀리안 공작은 도나우뵈르트 시를 접수했다. 도나우뵈르트는 자유시의 모든 권리를 잃어버리고 바이에른의 한 지방 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도나우뵈르트의 신교도 신앙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지만 신교도들을 내쫓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신교도들이 법을 위반해 제국 파면의 벌을 받았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은 선고에 따라 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선고의 실행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10개의 제국 크라이스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다. 도나우뵈르트는 이 중에서 바덴, 슈바벤 등의 독일 남부를 관할하는 슈바벤 크라이스 소속이었는데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은 바이에른 크라이스의 장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슈바벤 크라이스의 장은 뷔르뎀베르크의 공작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루터교 신자였으며 법적 정당성이 떨어지는 열성 가톨릭 제후가 선고를 실행한데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신교도들은 거대한 종교 탄압의 서막이라고 생각했고 즉각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5. 신교도 동맹 결성과 루돌프 2세의 보헤미아 도주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4세는 도나우뵈르트 사건에 큰 위협을 느꼈다. 상 팔츠 지역이 바이에른 공작령과 맞닿아 있었고 선제후 자리를 놓고 바이에른과 경쟁했던 사실, 거기에 프리드리히 4세 자신은 칼뱅교였는데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은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골수 구교도였으니 도나우뵈르트 사건에 위협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 프리드리히 4세의 책사인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이 신교도 제후들을 포섭한 결과, 1608년에 신교도 동맹(Protestant Union)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팔츠 선제후는 물론, 뷔르뎀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도 들어가 있었다. 신교도 동맹은 자신들의 요구를 루돌프 2세에게 개진하기 시작했다. 요구의 내용은 도나위뵈르트 시의 자유시 복귀, 가톨릭 교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제국 법정의 폐지, 황제의 총신을 축출하고 새로운 재국 정부의 구성 등이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이 요구를 들어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 엄청난 위험이 이 제국의 황제에게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황제 자리 찬탈의 음모였다.
오스만 제국과의 굴욕적인 평화를 뒤집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계획하고 있던 루돌프 2세에게 헝가리의 귀족들은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그들은 헝가리의 왕위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당시 헝가리 왕은 루돌프 2세가 겸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귀족들이 차세대 왕으로 미는 사람은 바로 황제의 동생, 마티아스 대공이었다. 마티아스 대공이라면 "폭군" 루돌프 2세를 몰아내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헝가리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와 오스트리아 또한 루돌프 2세를 싫어했다. 30년이 넘는 치세 동안 백성과 귀족, 내정을 살피는 데 관심이 없었던 황제에게 오스트리아의 귀족들과 합스부르크 가가 염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 역시 새로운 황제로 마티아스 대공을 지지했다.
헝가리에서 시작된 이 황제 교체의 쓰나미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 전역을 삼켰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전 지역이 마티아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6. 보헤미아와 신앙 자유 칙서(Letter of Majesty)


그러나 보헤미아에서도 루돌프 2세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얀 후스가 종교 개혁을 한 곳으로서 신교도가 절대 다수던 보헤미아는 선대 황제 막시밀리안 2세 때 거의 완벽한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 2세는 칙령으로 신교도들의 모든 특권을 박탈했고, 이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막시밀리안 2세의 구두 약속을 언급하면서 항의했지만 루돌프 2세는 이를 무시했다.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 보헤미아 내에서 루돌프 2세가 환영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보헤미아 왕국 내의 모라비아는 곧 마티아스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대공 역시 보헤미아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다른 귀족들 역시 마티아스에게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이 루돌프 2세의 위기를 자신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이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권리를 확보할 때까지는 황제의 신하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루돌프 2세는 1609년의 보헤미아 의회에서 종교적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여 간신히 보헤미아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이제 황제를 위해 무기를 들었다. 보헤미아, 슐레지엔, 루사티아를 가진 루돌프 2세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모라비아를 지닌 마티아스 대공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골육상쟁의 전쟁이 일어나려는 찰나, 이 합스부르크가의 두 형제는 전투 직전에 칼을 멈추었다.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와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이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마티아스 역시 모험적인 전쟁을 벌임으로써 다 된 밥에 재뿌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두 형제 사이에는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 마티아스가 황제의 신하라는 것을 인정하고, 보헤미아의 왕 직위에 대해 도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대신,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에게 공식적으로 헝가리의 왕 직위, 오스트리아의 대공 직위, 그리고 모라비아의 변경백 직위를 넘겨 주었고, 황제가 사망한 후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자로 마티아스 대공을 인정했다.
루돌프 2세는 간신히 보헤미아를 지켜낼 수 있었고, 그는 이것으로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돌프 2세는 또 하나의 여러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1609년의 보헤미아 의회가 다가왔던 것이었다. 그가 작년에는 미봉책으로 막아 놓았지만, 새로 열린 이 의회에서는 곧 종교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막시밀리안 2세 때와 마찬가지의 신앙의 자유를 요구했고, 신교도 교회 법정의 설립, 프라하 대학의 신교화,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보호자 선출의 권한을 요구했다.
황제는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려 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황제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프라하 시내에서 그들 스스로 회의를 주최한 후, 황제에게 실력으로 위협을 가했다. 그들은 황제의 재가 없이도 10명의 자유 수호자를 선출했고, 그 수장으로 하인리히 마티아스 폰 투른 백작을 지명했다. 투른 백작의 지휘하에 보헤미아인은 병력을 모았고, 황제의 가장 큰 정적, 마티아스 대공에 접근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티아스 대공에게 보헤미아마저 내줄 수는 없었던 루돌프 2세는 다시 한 번 보헤미아인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닌 칙서(Letter of Majesty)에 서명하였다.
1. 보헤미아에서 개신교 신앙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인정된다.
2. 칙서에 서명된 날짜까지 도시와 마을에 건립된 모든 개신교 예배당은 보호되며, 이후에도 귀족령, 기사령, 그리고 자유시에서는 새로운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 허락된다.
3. 신앙의 자유를 보호할 ‘자유의 수호자’를 선출할 권한을 부여한다.
후에 30년전쟁이라는 엄청난 일을 발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 바로 이 칙서이다. 이 칙서는 보헤미아를 절반 정도 공화국 상태로 만들었고,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 왕으로서의 권위 이외에는 거의 힘을 가질 수 없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스스로의 인내와 통합, 협동으로 인해 권력을 쟁취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스스로가 선출한 ‘자유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권위하에 뭉치기 시작했다.

7. 율리히 클레베 베르크 분쟁 개입


이런 상황에 또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터져나왔다. 1609년 3월,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공작이던 요한 빌헬름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요한 빌헬름은 또한 마르크의 백작이자, 라펜스베르크 백작이기도 했었다. 요한 빌헬름이 남긴 상속령은 상당한 규모였으며, 또한 당시 전 유럽 가톨릭 세력의 맹주였던 스페인 제국의 군대가 이탈리아-라인강을 거쳐서 네덜란드 일대의 신교 반란군과 싸우러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소위 '스페인인의 길 (The Spanish Road/El Camino Español)'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근세 유럽 최대 규모의 군사적 병참로이며, 이 대로가 안정적으로 확보 되어야 스페인 입장에서는 알프스 이북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뒤집어 말하면 스페인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개신교와 프랑스 세력 입장에서는 이 길을 틀어 막아야 유럽 내 스페인 제국의 남북 봉토를 말라 비틀어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행군로였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강력한 요새 중 하나였던 율리히 요새를 가지고 있었던 곳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영주들이 이 부유하고 중요한 영지의 계승권을 놓고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멸망하기 직전의 제국이라 할지라도, 그 계승권의 정당성이 없으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법이다. 요한 빌헬름 공작의 모든 친족들은 자신이야말로 이 영지의 참된 주인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요한 빌헬름에게는 3명의 누나와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들은 각각 다음 사람들과 결혼한 바 있었다.
1. 제 1공녀 마리 엘레노레: 프로이센의 공작 알브레흐트와 결혼.
2. 제 2공녀 안나 : 팔츠-노이부르크의 궁중백 필립 루트비히와 결혼
3. 제 3공녀 막달레네 : 팔츠-쯔바이브뤼켄의 공작이자 궁중백인 요한과 결혼
4. 제 4공녀 시빌레 : 부르가우의 변경백인 카를과 결혼
이 중, 제 1공녀 마리 엘레노레는 프로이센 공작과의 사이에서 딸들만을 낳았으며, 그녀의 장녀인 안나는 브란덴부르크의 요한 지기스문트 선제후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요한 지기스문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아내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제 2공녀 안나는 팔츠-노이부르크 궁중백인 필립 루트비히와 결혼하여 후계자인 볼프강 빌헬름을 낳았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장녀의 가계로서 우선권을 주장한 반면, 팔츠-노이부르크 궁중백은 차녀의 가계이기는 했지만, 남성 상속인으로서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제 3공녀의 가계인 팔츠-쯔바이브뤼켄의 공작과 제 4공녀의 가계인 부르가우의 변경백도 계승권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의 권리는 위의 두 가계의 권리에 비해서는 그 명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외에도, 작센의 선제후와 작센의 공작 등 여러 제후들이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법률적으로나 그 명분으로나 브란덴부르크와 팔츠-노이부르크에 비해 격이 크게 떨어지는 후보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나, 팔츠-노이부르크 궁중백인 필립 루트비히가 모두 신교도 동맹의 일원이었지만, 눈 앞의 이득 앞에서 양보는 없었다. 브란덴부르크는 급히 북쪽에 있었던 클레베 공작령, 마르크 백작령, 라펜스베르크 백작령에 특사를 파견하여 자신들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 애썼고, 이에 뒤질세라 팔츠-노이부르크는 남쪽의 율리히 공작령, 베르크 공작령, 마르크 백작령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 개입했던 엉뚱한 방해자 하나가 상황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다. 그 방해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였다. 마티아스 대공의 반란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쫓겨나, 보헤미아인들의 요구와 마티아스 대공의 계승권 요구에 굴복해야 했던 루돌프 2세는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동생, 마티아스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세금과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후계자가 없는 영지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적법한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 영지를 가압류할 것을 선언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팔츠-노이부르크 궁중백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개입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곧 전투를 시작할 듯했던 두 제후는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신속하게 협상에 돌입했다. 결국 1610년 여름, 두 제후들 사이에서는 공동 통치 협정이 맺어졌다. 즉, 브란덴베르크 선제후의 동생인 에른스트 변경백과 팔츠-노이부르크 궁중백의 아들인 볼프강 빌헬름을 공동 통치자로 삼아 이 요충지의 군주로 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신교도 동맹국들 역시 동맹국 사이의 분란이 종식된 것을 축하하면서 이 결정을 지지했다.
그런데 루돌프 2세는 또 한 번의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다. 그가 마티아스에 대해 품고 있는 미움이 너무 강했기에, 그는 그의 후계자로 다른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그의 친족들 중에서 후계자감으로 스트라스부르크와 파사우의 주교인 레오폴트 대공[5]을 꼽고 있었다. 만약 그를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공작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순식간에 강력한 황제 후보로 떠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율리히-클레베-베르크의 귀족들에게 브란덴베르크, 팔츠-노이부르크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금하고, 급히 레오폴트 대공을 율리히로 파견했다.
레오폴트 대공이 도착했을 때는 율리히 공작령을 제외한 클레베 공작령, 베르크 공작령, 마르크 백작령, 라펜스베르크 백작령이 모두 새로운 신교도 공동 통치 영주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단지, 율리히 요새의 사령관인 라우센베르크 대령만이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있었고, 그는 레오폴트 대공을 율리히 요새로 맞아들였다.
율리히 요새는 16세기 율리히 공작이던 빌헬름 5세가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맞서기 위해 심혈을 들여 건축한 요새이다. 이 율리히 요새는 네덜란드에 있었던 브레다, 안트워프, 마스트리흐트, 스헤르토헨보스와 독일의 브라이자흐, 잉골쉬태트와 더불어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요새였다. 레오폴트 대공은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황제파와 가톨릭 파를 통합하려 했지만 이미 황제파의 자금은 바닥나 있는 상황이었다. 율리히는 5,000명에 이르는 요새병들이 농성할 수 있는 강력한 요새였지만, 현재까지 그들이 모은 병력은 800명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율리히의 계승권 다툼을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대결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독일 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라인강을 따라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중요한 보급선이었던 이곳을 누가 차지하는가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에 엄청나게 큰 중요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곳을 더 큰 전략적 의미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다름아닌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왕, 앙리 4세였다.

8. 앙리 4세의 위협


앙리 4세는 1575년 프랑스의 위그노 군대의 수장이 된 이후, 1587년 쿠트라 전투, 1589년 아르크 전투, 1590년 이브리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에 잇따라 승리하면서 전장의 샛별로 떠올랐다.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1594년에 낭트 칙령을 선포하여 프랑스 내의 종교적 통합을 이루어내었고 10여년간의 평화로운 치세로 프랑스는 서서히 카를 5세와 자웅을 겨루었던 프랑수아 1세 시절의 막강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앙리 4세가 프랑스를 통합하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었던 세력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당시 전유럽 가톨릭 교도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스페인은, 프랑스 위그노 전쟁 초기부터 가톨릭 파에 대해 전폭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1590년부터는 유럽 최고의 명장 알렉산더 파르네제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앙리 4세를 괴롭혔다. 또한, 스페인 공주 이사벨 클라라 에우게니아는 앙리 4세를 대신할 가톨릭 계열 프랑스 왕으로 천거된 적도 있었던 것이다.
앙리 4세는 비록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종교에 상관 없이 프랑스의 이득을 일차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숙적을 합스부르크 왕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강력한 힘에 상당한 압박을 받았었던 그는, 카를 5세와 같은 황제가 나타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스페인 합스부르크를 통합하게 된다면 프랑스의 안전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앙리 4세가 프랑스에서 종교 내전을 경험하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신교도 제후들과 오스만 제국의 압박, 그리고 신교도에 너그러운 황제 등의 이유로 프랑스의 상황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오스만 제국과 신교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좌우에서 압박하는 안전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606년 이후에 오스만 제국아바스 1세 아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싸움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직접적인 분쟁에서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6] 이러한 안전핀에는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었다. 앙리 4세는 스페인의 힘을 네덜란드-영국과의 동맹으로 압박하고 있었지만, 스페인 쪽에 오스트리아가 가담하는 순간, 이 세력 균형은 순식간에 뒤집어지는 것이었다.
앙리 4세는 머뭇거리고 있었던 신교도 동맹에 강력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약속했다. 율리히-클레베-베르크를 신교도 제후의 손에 넣어둘 수 있다면, 유사시에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보급로 압박을 가중시킬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직접적인 연결 통로를 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막 스페인과 12년간의 정전 조약을 맺었던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견제하려 했던 영국 역시 신교도 동맹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소위 신교도 인터내셔널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앙리 4세의 강력한 지원 약속에 힘을 얻은 신교도 동맹군은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1609년 여름, 총사령관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 휘하에 6,000명의 병력이 모집되기 시작했고, 이 병력은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영국의 제임스 1세의 지원하에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앙리 4세는 유럽 전체를 체스판으로 하여 체스를 둘 생각이었다. 그는 우선 신교도 동맹군과 프랑스군이 라인 강에서 합세하여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지역을 휩쓸어 버린 후에, 네덜란드군과 합세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3면에서 협공하는 한편으로, 일부 병력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사보이 공국, 베네치아, 교황과 힘을 합쳐 밀라노를 포함한 스페인의 속령을 해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로 진격, 북이탈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의 속령을 해방시킨 후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의 신교도들과 합세하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숨통을 죄려 했다. 앙리 4세는 이 장대한 반 합스부르크 전선의 맹주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신교도 동맹군은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끌어들인 자금으로 거의 3만 명에 이르는 대군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은 이 병력을 이끌고 율리히 요새로 향했다. 레오폴트 대공은 그동안 최선을 다해 병력을 끌어 모았지만, 신교도 동맹군의 강력한 대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율리히 요새에 1,500명 정도의 병력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레오폴트 대공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급히 구원병력을 요청했으며, 신교도 동맹군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7]은 명장 스피놀라 휘하에 20,000명에 이르는 구원 병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10년 5월 10일,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계승 전쟁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쉴리를 만나러 가던 앙리 4세는 갑작스럽게 그의 마차 안으로 뛰어든 한 암살자의 칼을 맞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이것으로 인해 루돌프 2세는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9. 루돌프 2세의 파멸과 최후


레오폴트 대공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를 율리히로 파견했었던 루돌프 2세는 편치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황제관을 레오폴트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동생 마티아스 대공에 대한 증오심은 루돌프에게 최후의 악수를 두게 만들었다. 루돌프 2세는 레오폴트의 영지인 파사우 주교령에서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파사우 용병대의 목표는 마티아스였지만, 루돌프는 이를 극비에 부쳤다.
하지만 루돌프 2세의 동생을 향한 증오심은 결국 그 자신의 파멸을 불렀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더 이상 루돌프 2세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파사우 용병대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병력을 편성하는 한편, 황제의 위험한 적수인 마티아스 대공에게 보헤미아 왕국을 구원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나 저제나 황제 형님이 죽기만을 기다리던 마티아스 대공에게는 이만한 호기가 없었다. 그는 1611년, 8,000명의 병력과 함께 프라하로 진격해 들어갔으며, 약탈에만 정신이 없던 파사우 용병대를 가볍게 격파하고 보헤미아 인의 환호 속에 프라하를 접수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도망칠 힘도 없었던 루돌프 2세는 프라하의 궁전에서 포로가 되어 감금되었다.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 대공에게 보헤미아의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라는 호칭뿐이었다. 루돌프가 가지고 있던 합스부르크의 모든 영지가 이제 마티아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루돌프 2세는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로 프라하 궁전에 갇혀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1612년 1월 20일, 5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가 얼마나 인망이 없었던지 신성 로마 제국의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루돌프 2세는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만승지군의 지위에 오르기에는 너무도 무능하고, 너무도 나태한 인물이었다.

[1] 독일어로는 Langer Türkenkrieg, 영어로는 Long Turkish War라고 하며, 오스만 터키어로는 딱히 특별한 명칭이 없다.[2]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였던 요하네스 케플러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3] 독일어로는 Langer Türkenkrieg, 영어로는 Long Turkish War라고 하며, 오스만 터키어로는 딱히 특별한 명칭이 없다.[4]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병대로, 유럽 국가들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대이다보니 예니체리나 시파히와는 대조적으로 봉급을 받지 않아 이웃나라의 마을이나 방어가 취약한 도시를 공격한 뒤 약탈한 전리품을 봉급이다 생각하고 나누어가져야 했는데, 그 이웃나라가 항의해 와도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미처 몰랐네? 미안.' 으로 일관하기 일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잘 나가던 시기. 즉 아큰즈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의 오스만 제국에게 '이웃나라' 는 '잠정적인 정복 대상' 에 불과했으며 아큰즈들의 약탈로 평상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은 물론이요 어디의 방어가 취약한지도 알 수 있었다.[5] 1583~1632, 이 양반은 페르디난트 2세의 동생으로 형이 황제가 된 후 환속되어 티롤을 통치하게 되는데('''a.k.a 티롤 대공 레오폴트 5세''') 아들 대에 대가 끊기고 티롤은 레오폴트 1세에게 간다. 여담이지만 외손자들 중 하나인 만투나 공작 페르디난도 곤차가-느베르는 친프랑스 세력이었다[6] 상술한 것 처럼 프랑스 입장에서 독일 내 개신교도들과 오스만제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동서의 안전핀이었다면, 반대로 합스부르크 입장에서는 서방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방의 페르시아가 오스만 제국이 중부 유럽에 직접적으로 처들어가는 것을 억제하는 안전핀이었다. 이러한 외교적 연유로 17세기 초반에는 영국인 외교관 안토니와 로버트 셜리 형제를 필두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후원하는 페르시아-합스부르크간 외교 채널이 바쁘게 돌아갔고, 비공식 동맹도 몇번 체결 되었다.[7]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이자,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공주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