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계 유대인
1. 개요
Persian Jews 또는 Iranian Jews
'''페르시아계 유대인''' 또는 이란계 유대인은 이란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 및 그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스라엘내 7만 5천여 명,1993년 통계 기준 미국에 6만에서 8만명, 이란 내에 8,756명에서 25,000명 사이의 인구가 있다.
미즈라힘과 겹치는 점들이 많지만 엄연히 사용하는 언어 계통이 달랐다. 미즈라힘을 동방 유대인으로 정의할 경우 이들도 미즈라힘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미즈라힘들이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는 것과 다르게 이들은 이란계 언어를 사용한다.
1.1. 하위 그룹
러시아 내 체첸 공화국, 인구셰티야,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야, 카바르디노발카리야, 다게스탄 및 이란 근처의 아제르바이잔 등 카프카스 일대의 유대인들을 이른바 '''산악 유대인(타트 유대인)'''으로 부르고,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타지크계 유대인들은 부하라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쓰이는 언어들로는 주후리(juhuri)[1] , 지히디(Dzhidi)는 유대이란어군(Judeo-Iranian languages)에 해당되는 방언이다. 주후리어는 아제르바이잔 산악 유대인들이, 지히디는 이란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용한다.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유대인'''들은 부하라어(Judeo- Bukharic)[2] 를 사용한다.
2. 초기 역사
바빌론 유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잡혀서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끌려갔는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는 이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때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의 직계 조상이다. 이들은 페르시아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여타 유대인 공동체들 이를테면 부하라 유대인 및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직계 조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카프카스의 고립된 유대인 공동체는 여타 아슈케나즈 및 세파르드 유대인 공동체와 유대교 교리에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카프카스 산악지대에 고립된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들은 여타 유대인 공동체들과 언어도 다르고 유대교 교리도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들 대부분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과 동화하고자 입을 닫고 살아서(...) 이들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영토 유프라테스강 서안의 도시들 중에 수라 시와 품베디타 시는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으며, 이들은 예시바(Yeshiva)라는 학교를 바탕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편찬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상당수는 후궁으로 유대인을 선호하였다 한다. 페르시아 샤한샤 중 야즈데게르드 1세의 경우 모친 슈산두흐트가 유대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스파한에 해당하는 스파한에 유대인 구역(예후디예) 건설을 지원하기도 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나날이 페르시아에서 교세가 늘어나자, 이에 자신들도 동로마 제국의 동포들처럼 다수가 기독교도인 사회 안에서 탄압받는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기독교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중동에 이름났다고 한다.
3. 중세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중세 이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밀려서 기세를 그렇게 펴지 못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게 위해서 무슬림 혹은 조로아스터교도 권력자들에게 선물공세로 일관하여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상권을 장악하다시피 했지만, 유대인은 그런 거 없었다.
사산 왕조가 망하고 페르시아를 점령한 아랍인들은 스파한 예후디예의 유대인들이 나중에 적그리스도를 추종할 것이라는 예언[3] 을 믿고 이 지역의 유대인들을 전부 죽이거나 추방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이스파한 시가지는 예후디예를 파괴한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약 천년 후에는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의 숙적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스파한 근교로 대규모로 강제이주된 이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세우며 번영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통역으로 맹활약했던 것과 다르게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유대인들은 별 힘이 없었다. 당시 이란의 유대인들이 주로 입에 풀칠하던 분야는 의료 분야였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무슬림이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는 대신에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앙심이 부족해서이다.'''"라는 인식이 중세 후기부터 널리 퍼지면서, 무슬림들이 의학을 공부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정작 중세 의학 기술이 이븐 시나를 비롯한 무슬림들에 의해서 집성되고 발전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4]
몽골 제국이 이란 전역을 정복한 후, 당시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무슬림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 칸국에서는 유대인들을 관료로 중용하였다.[5] 일 칸국의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중국의 원나라로도 이주하여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물론 일 칸국이 몰락하고 사파비 왕조가 등장한 이후로는 다시 쩌리로...
이들 중 일부는 중국까지 가기도 했다. 카이펑의 유대교도 항목 참조.
4. 근, 현대
고대와 중세에 강성했던 페르시아가 근현대가 되면서 황폐하고 가난한 지역으로 전락하면서 페르시아계 유대인 공동체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시골 지역의 유대인들은 가난하고 고립된 상황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계속 늘어났고, 도회지에 사는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생활 기반을 잠식당하며 경제적인 곤경을 겪었다. 적지 않은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은 16~18세기 아르메니아인들이 없는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시를 중심으로 이주하였다. 부하라 시의 유대인 공동체들은 투르크계 지배자들의 눈치 때문에 이슬람을 믿는 척 하면서 집에서는 몰래 유대교를 신앙하는 저들이었다.
부하라 유대인은 소련의 개방과 붕괴 이후 대량 이민으로 인해 오늘날 부하라에는 단 150명 정도만 남아있고, 우즈베키스탄에 남아있는 부하라 유대인들의 수 역시 천명 안팎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에는 대략 10~12만명이 살고 있고, 미국으로 이민간 부하라 유대인들은 뉴욕 퀸즈를 중심으로 5만명 정도가 모여산다고 한다.
카프카스 지역에 고립된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 당시 끌려온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인 특성상 전례 뿐만이 아니라 교리 전반에서 미즈라흐 및 세파르드 유대인들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6] 19세기부터 카프카스 지역이 조금씩 러시아 제국에 점령되기 시작하면서 이 일대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조우하며 서구화되었다. 특히 교역 요충지 중 하나였던 중세부터 트빌리시는 카프카스 유대인들의 주요 터전 중의 하나였다. 이들 카프카스 무슬림들은 예루살렘 기준으로 동방에 있다는 이유로 미즈라힘으로 분류되기도 하나, 미즈라힘들과 전례는 물론 교리조차도 크게 차이가 나이게 페르시아계 유대인 혹은 소수 유대교 종파로 인정되는 추세이다.
페르시아계 유대인에게는 러시아의 카프카스 점령 이외에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더 있었다. 바로 이스라엘의 건국과 이란 이슬람 혁명이다. 시오니즘에 동조하는 세력은 이스라엘로 넘어가기도 하였지만, 급속히 붕괴한 아랍권 유대인 공동체와는 달리 존속하였다.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한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의 개'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친유대 국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빼았겼던 경제적 이권을 되찼고 신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팔레비 왕조는 중동전쟁을 아랍인-유대인의 대결로 보았기 때문에 중동전쟁의 포화에서 이란은 없었으니까... 팔레비 왕조 말기 유대인의 80%가 중산층, 10%가 상류층이었고 10%만이 하류층으로 분류되었다.
기쁨도 잠시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180도 변해버렸다. 호메이니와 그의 친구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 행위는 자제하였지만, 팔레비 왕조 당시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이 누렸던 특권을 대폭 제한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은 패자부활전(...)에 성공하면서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은 다시금 몰락한다. 인구 절대수 자체도 미국, 이스라엘을 비롯한 해외로 탈출하면서 1976년 62,258명 → 2006년 9,252명으로 대폭 줄어버린다. 또한 이란 외에도 타지키스탄 등지에서도 독재나 유대인 탄압 등으로 인해 정치적 이유로 미국과 이스라엘 등으로 망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7][8]
5. 현재
이란 혁명 이전 8만여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이란에 거주했었다. 오늘날에는 미국 등으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면서 1만여 명 정도만 남아있다. 이들은 이란 국민과 같은 의무를 진다. 심지어 군대에도 같이 징집된다!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도 참전했으며, 사상자 또한 나왔다. 이슬람 혁명 이후 반유대 감정이 올라갔지만, 이들에게는 이란 국회 의석중 한자리가 여전히 보장되고 있다. 이스라엘 방문도 가능하다. 다만 이스라엘과 국교가 없고, 본국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제 3국 (주로 터키)을 거치고, 이스라엘 비자도 받아야 하니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등지에도 페르시아계 유태인으로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수십만명에 달한다. 한동안 이란은 이스라엘 빼곤 중동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사는 나라있다.
이란 내에서의 인식은 전직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답이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딸이 만약 유대인과 결혼한다면 무작정 반대가 아니라 그 사람 그 자체를 보겠다고 답했다.[9] 이는 곧 유대인은 페르시아 역사에 수많은 획을 놓은 소중한 유산이며, "이스라엘국=유대인"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말. 이슬람 혁명 이후로 그냥 전반적으로 억압적으로 변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탄압 당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란 당국은 이란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유대인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도 만들고 하는 등 의도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과 적대해도 인종차별적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건 아니다! 아랍, 유럽과는 다르다'는 메세지를 주기적으로 보내곤 한다. 테헤란의 한 랍비: "우린 여기서 아무런 문제도 없고, 존중받고 있다. 다른 곳들의 시나고그와는 달리 무장 경호원도 필요 없다
[1] 유대-타트어(Judeo-Tat)로도 부른다.[2] 알타이제어 및 투르크어족이 아닌 인도-유럽어족의 타지크어 방언에 해당하는 언어이다.[3] https://sunnah.com/riyadussaliheen/19/5[4] 하지만 이븐 시나 역시 주류 무슬림은 아니고 쉬아파 중에서도 이단 취급 받는 이스마일파 신도였으며, 이븐 시나의 치료 요법에는 상사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난교(...)를 하면 된다라는 등의 비이슬람적인 내용도 적지는 않았다.[5] 몽골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일 칸국의 역사가 라시드 앗 딘은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였다. 공식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라시드 앗 딘이 죽자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유대인이 죽었으니 지옥에나 떨어질 거라고 저주하며 축하하던(...) 사례가 있던 기록을 보면 유대인 출신이 페르시아인 사이에서 핸디캡으로 남았던 듯 하다.[6] 그리스의 일부 유대인 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일부 그리스 유대인들은 사두개파의 교리를 아직도 믿고 있다 한다.[7] 비록 이스라엘 역시 같은 유대인들조차 지역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거나 탄압하기도 했지만 나름 부분적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가기도 하고, 유대인들의 나라이기도 했으니 이러한 이유로 망명했었다.[8] 그러나 유대교를 믿던 이들의 특성상 소련에서 무신론을 권장하고 종교를 탄압하는 와중에 많은 가정에서 유대교 교리를 아예 통째로 까먹은 관계로(...) 그냥 타지크계, 우즈베크계, 아제르바이잔계, 러시아계로 귀화해서 조용히 입 닫고 묻혀갈려고 하는 경향이 크다. 한 편 구 소련권은 아니지만 근처의 아프가니스탄에도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내전의 영향으로 소련 등 다른 주변국가로 난민으로 망명하거나 극소수만 남아있다.[9] 아마디네자드 본인이 유대계라는 의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