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졸복
1. 개요
조선시대, 포졸들이 주로 입었던 근무복이자 전시때 조선군의 군복으로, 사또나 포도대장 등의 옷인 구군복과 함께 조선을 다룬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옷. '''동시에 한국 미디어의 최대 피해자이다.'''
형태는 직령+쾌자로, 세세한 구조는 다르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구군복에 색깔만 바꾸면 포졸복이 된다. 조선시대 사극에서 조선군의 가장 낮은 말단졸병들이 입고 나오는 옷이다. 심지어 용의 눈물처럼 두 시대에 걸친 드라마에서는 고려 말까지는 멀쩡히 두정갑과 갑사용 전용 갑주에 창과 방패, 검 등으로 다양하게 무장하는데,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 군사들의 장비가 별안간 당파(흔히 말하는 삼지창)에 헐렁한 포졸복으로 통일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렇듯 포졸복은 엄연히 "군복"이지만 현대인에겐 "웨이터 복장", "펭귄 복장", "전통 갑옷" 따위의 우스갯거리로 인식된다. 중요한건 일제의 역사왜곡도 아닌 한국 미디어가 '''돈''' 때문에 지금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것[3] 더욱이 현대 매체에서는 관아에서 정식으로 근무하는 포졸 이상급의 인원과, 그 이하급의 관복을 차려입지 않은 비정규적으로 동원하는 인원의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지극히 기초적인 오류가 흔히 퍼져있다. 하지만, 포졸은 범죄를 잡는데 관해서 전문성이 있고 최소한의 권한은 갖추는등 제대로 된 군인, 경찰직종이었다.
2. 현대 매체의 잘못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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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도 아닌 관군이 배를 허벌창 드러낸 잘못된 복장과 착용예시일 뿐더러, 기병들이 말단 포졸복을 입은 어이없는 장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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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군에 등장한 포졸복. 역시 고증오류다. 하지만 '水'를 떼면 형태는 그나마 비슷하다.[5]
잘못된 포졸복에 착용까지 잘못된 예시. 중세 포졸을 묘사한 듯 보이는데, 겉옷을 걸친 와중에 배를 일부러 드러낸 것을 당시 군관들이 봤다면 내리갈굼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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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온라인 게임중에서 유명한 게임 중 하나인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도 등장한다.
위의 복식들은 조선의 부정적 이미지, 왜곡돤 전통의 전달, 관아•민간의 복장을 잘 구분하지 못한 시선 등이 서로 맞물리면서 생겨난 모습들인데, 포졸의 옷은 관(官)의 인원인 이상, 조선중기까지는 관습적으로 관직에 따른 복식은 배를 드러내거나 기장을 짧게 줄여서 입는 옷이 아니라고 명시했다. 조선중기 이전의 사람들이 봤다면 '군기 빠졌다, 천박하다' 라고 생각하여 민망하게 생각하는걸 넘어서, 벼슬아치들이 봤다면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엄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건 고대부터 현대의 모든 국가와 민족의 군대나 경찰에서도 마찬가지인 매우 기초적인 제식에 관한 '상식'이다.[6] 그렇다고 후기의 포졸들이 무조건 배를 까고 다닌다는 건 아니다. 긴 포와 정갈함은 당시 무관의 덕목이였으니, 중기에 비해 약간 풀리긴 했으나 위의 생각들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이 100% 틀린 것은 아니다. 보급용이나 여름용으로 포를 빼고 반팔이 달린 쾌자를 입긴 했었으니까. 허나 사시사철 저렇게만 입는것은 당연한 오류다. 대부분 포와 띠가 생략되어 나오는데, 관을 섬기는 사람이 '''무의미하게 배를 드러내고 포와 띠가 없는 복장'''을 입는 묘사는 당대 사회상에 맞지 않으며, 특히나 관청의 인원들이 보여줘야할 근엄한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체면'과 '역할'을 중시했던 조선사람들이 봤다면, 저런 짧은 겉옷은 관(官)의 명령을 받드는 인원이기 이전에 "겉옷을 걸친 의미 자체가 없다." 고 생각할 것이다. 애초에 유물만 보더라도, 시대나 관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포졸복은 현대의 매체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길다. 또한 사실 밑의 갑옷 논쟁까지 포함하여, 현대인들은 포졸복 또한 '''관복의 파생형'''이라는 개념을 인지 못하고 그냥 일반 백성처럼 묘사해놨는데, 이마저 평민들도 꺼릴 형태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의복에 대한 기본개념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전달되어 미디어의 오류가 심각한 편.[7] 포졸도 제대로 된 헌병이나 관의 집단으로서 인식하고 여러 차이를 둠으로서, 기존의 편견 자체를 바꿔나갈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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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포졸들의 의복은 역할이나, 배치된 방향과 수준에 따라서 배색이 다양했다. 오방색을 기준으로 염색하여 확인되는 것만 빨•주•초•파•회•검•보 정도다. 물론 지금의 인식처럼 파란색으로만 입기도 했는데, 세종시기에 지역이나 방향에 관계없이 포졸의 겉옷색깔을 '파란색' 정도로 통일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 그림으로 보아, '흑백' 못지 않게 약간 '푸르스름'한 색도 자주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전란기의 비참한 말단 병사의 복장으로 포졸복을 묘사했다고 생각하면, 소의 뒷걸음질에 개구리가 밟혀죽는 격으로 최전선의 전쟁물에서의 고증은 맞다. 하지만 평화기의 정식관아의 포졸복을 일반 천민한테 쾌자만 입혀놓은 급으로 소품을 돌려쓰는 묘사라든지, 현대인들이 포졸복을 노비[8] 만도 못한 민간인의 의복[9] 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등, 어디까지나 관아의 의복으로 시작한 이 복장의 구성과 착용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고서 판단하며, 고증이 잘된 미디어물에겐 조선을 미화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3. 갑옷과 포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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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이다. 흔히 아는 모습 같지만 기장이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포졸복 위에, 말단 병사들이 가죽 방호구 or 섬유 방호구로 엄심갑(흉갑)을 조달하여 착용했는데 개인별로 방호력의 편차가 묘사되고, 조총 탄약이 든 죽관을 두른 모습이 잘 재현되었다. 2019년 현재까지 나온 영상물 중에서 조선군의 말단 전투병의 고증이 가장 잘 된 모습이다. 실제 갑옷의 모양에 대해서는 한국 갑옷 참조.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상식적으로 전투시에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갑옷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조차도 군사용 갑옷(두정갑, 가죽갑옷, 지갑)은 구비할 수 없더라도, 심지어 솥뚜껑 같은거라도 방호구로 쓰거나 나무껍질과 두꺼운 섬유 같은걸로 어떻게든 챙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대로 된 갑옷까진 아니더라도, 칼을 들고 살의를 지닌 적군 앞에 최소한의 방호구조차 갖추지 않고 싸우러갈 용기를 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심리상 있기 어렵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28년(1446년) 평안도 도내에 도적들이 창궐해 대성산성을 거점으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백성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온적도 있어 조선시대에는 정규군도 아닌 일개 도적도 갑옷으로 무장하였다는것을 알 수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선교사로 온 포르투갈 사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또한,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진왜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병사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자에서도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라는 일기를 볼 때, 각 진영에서 갑옷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지 그저 창고에 보관만 했겠는가?[10]
물론, 그것이 조선군 전원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역사상 아무리 부유하고 막강한 제국이라도 전군에게 국가가 중무장을 시켜준 예시는 거의 없다. 동시대 유럽 군대, 특히 쉴새없이 유럽에서 전투를 치러 온 스페인군도 전원이 갑옷으로 중무장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로이스는 조선원정에 직접 참여한 이도 아니다. 갑옷을 보유했다는 기록만으로는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 어느정도인지 증명해주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실제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여 년 후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휘하 수군들이 승선할 때 갑주를 입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으며, 실제로 수병들은 갑옷을 입는 경우가 드물다. 참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군사들이 규정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마련하는 것을 어려워한다거나 비축된 갑옷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끊임없이 나온다. 사실 이렇게 갑옷을 제대로 무장한 병사들이 부족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흔한 현상이었다. 현대의 미디어매체에서야 다들 갑옷을 입혀놓은 캐릭터들을 잔뜩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어떤 시대에나 모든 지역의 병사들이 완벽한 무장도를 유지한 경우는 현대에도 많지 않다. 하다못해 세계 순위권 육군력을 자랑하는 현대 한국군도 수많은 장비들이 치장물자로 보존만 되어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포졸복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으나, 적어도 전투중에 방호구가 아예 없거나 근위대로서 위엄을 보여야할 기능을 지닌 군졸이 '''민간인'''에 가까운 의복을 입는 현재의 묘사에는 무리가 있으며, 평화기의 포졸 묘사에도 현재의 포졸복 같은 저렴한 소품 돌려막기를 고증에 맞다고 우기는 것도 무리수이다. 애초에 포졸복에 대한 논의는 무관들이 칼을 패용하지 않고 칼집을 일일히 손으로 잡고 들고 다니는 묘사와 마찬가지로, 국산 사극의 나태함에 질린 사람이 많다고도 볼 수 있다.
[1] 현대인의 눈으로는 비슷해보일 수 있지만, 기장이나 위엄 면에서 민간인의 의상에 가까우며 심지어 전모에 장식이 달려있는 것만 봐도 알수있듯이 축제의상에 가깝다. 구한말에는 체면치레의 가치관이 다소 완화되고 복장이나 기장이 매우 단축되어 이런 단출한 반팔을 입은 포졸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경우에는 아예 잘라내어 깔끔한 조끼처럼 만들어 입은 모습이 대다수였다.[2]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면, 당장 유교사회인 조선에서는 고용받지 못한 천민을 제외하면 없는 천쪼가리라도 여러겹 껴입어서 신체를 감추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었고, 체면치레에 신경쓰는 유교사회의 상관들이 민간인처럼 짧은 옷에 팔다리를 접어입는 순경을 봤다면 관할구역의 담당자부터 기강을 무너트렸다는 이유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시당초, 관복을 입은 포졸은 일종의 헌병으로서 관아에서는 정식직원이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포졸 밑에도 하청으로 부려먹던 지저분한 실무를 담당하는 민간인 부하들을 따로 고용하거나 두는 기록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포졸복을 구한말 이후의 민간인들이나 입을만한 간소화 된 의상을 기준으로 '착용의 이유와 개념'을 착각하고 있는 것. 당장 현대에도 정복과 같은 제식이 존재하는 직종들은 이런걸로 처벌받기도 한다.[3] 전통고증이 심각하던 시절엔 제작비를 많이 잡아먹는 갑옷이 가장 큰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투씬 이외엔 자주 쓰이지 않고.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의 낮은 전통 인식이 시너지를 일으켜 생긴 결과라 볼 수 있다.[4] 2005년 불멸의 이순신의 탄금대 전투에 등장한 포졸복이다. 물론 당시 기병들은 철저히 갑옷을 입었으므로 고증오류다. 고대부터 말을 갖추어줄 정도의 병사들은 스스로 무장을 잘 갖출 정도의 경제력이 있거나, 없더라도 국가에서 철저하게 무장을 입혀주는 것이 인류의 역사 이래로 매우 기초적인 상식이다.[5] 어이없는건 다른 곳도 아니고 '''국방부'''가 개최하는 제4회 군가합창대회에서 해군에게 저 옷을 입혀서 나오게 했다(...)[6] 무엇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술취해서, 싸워서, 더워서처럼 어쩌다가 그럴진 몰라도 따로 사는 천민이 아니라면 배를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했다. 기장의 길이는 약간씩 차이가 발생하더라도, 최소한 중세 이전의 조선시대를 묘사할 경우에 배를 당당히 드러내는건 무식한 고증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문화는 구한말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변형되어 전해진 것이다.[7] 관청에서도 진짜로 더럽거나 힘든 일을 하는 일종의 민간인이나 평민 이하의 하청들은 따로 두었다. 차라리 그렇게 매번 임시로 모집되는 졸개들을 고증할거면 아예 관복을 제대로 챙겨입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포졸의 의상에 그만큼 공을 들여야한다. 포졸 이상의 관원들은 심지어 노비일지라도 고용된 만큼 평민보다 깔끔한 옷을 입었기 때문.[8] 오히려 밖에 보여주기 위한 노비라면 어지간히 잘 사는 평민보다 잘 입었다. 사회에서 버려진 계층과는 달리, 노비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홀대하거나 옷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주인이 처벌받았다.[9] 19~20세기 초 사진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오히려 당시 민간인들이 저것보단 잘 입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구석의 빈민가 사진이라면 고증에 맞겠지만 말이다.[10] 이는 해석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다. 이 때 조선군 병사들은 갑옷을 '''자체 조달했다.''' 진영에서 보유했다는 의미라기보다 병사들을 소집했더니 입고 온 갑옷들이 기준 미달이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