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영화)
1. 개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 사극.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하기까지 47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치욕을 참고 항복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과 치욕을 견디고 사느니 끝까지 항전하여 죽음을 택하자는 척화파인 김상헌의 대립, 그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조의 갈등을 다룬다. 원작처럼 허무주의 색채가 깊다.
2. 마케팅
2.1. 예고편
2.2. 포스터
3. 시놉시스
4. 등장인물
4.1. 주연
4.2. 조선
4.3. 청나라
5. 줄거리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온다. 강화도로의 피난길이 막히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글귀가 나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이어서 최명길이 얼어붙은 강 위에서 청의 선봉대 군사들과 마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청군은 기선 제압을 위해 최명길의 바로 앞에 화살을 발사한다. 그리고 통역관의 신분을 밝히라는 말에 따라 최명길이 자신의 관직을 말하며 이것이 사신을 대하는 처사냐고 외친다.
장면이 바뀌고, 얼어붙은 강 위에서 한 노인[1] 과 김상헌이 건너가고 있다. 노인은 강 근처 나루터에서 부모를 잃은 손녀와 살고 있으며 얼음 지리에 밝아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손녀를 뒤로 한 채 노인과 함께 강을 건너는 김상헌은 노인에게 곧 청군이 들이닥칠 것이니 남한산성으로 가지 않겠냐고 권유한다. 그러나 노인은 청군이 자신 같은 나루터 늙은이를 죽이겠냐고 하면서, 어제 인조에게 얼음 길을 알려주었는데, 좁쌀 한 되도 받지 못했다며 청군이 지나가면 길을 알려주고 곡식이라도 받아볼 생각이라 말하며 거절한다. 이를 들은 김상헌은 자신이 돌보아줄 테니 손녀와 같이 남한산성으로 갈 것을 몇 번이나 더 권하지만, 끝내 노인이 거부하자 돌아가는 노인을 칼로 베어 죽인다.[해석] 죽은 노인의 모습에서 멀어지면서 남한산성 로고가 뜨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먼저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비롯한 조선군이 들어오는 걸 보며 대장장이 날쇠에게 동생 칠복은 성내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갔다는데 우리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날쇠는 지난 정묘년 때 이곳으로 온 뒤 이제는 살더라도 이곳에서 살고 죽더라도 이곳에서 죽는다며 도망칠 거면 칠복에게 혼자 가라 하자 칠복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형님이랑 계속 함께 있을 거라고 한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신하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한다. 이때 갑자기 문을 열어 젖히며 김상헌이 나타나서는 다 듣고 있었던 것인지 화친은 아니 된다며 최명길의 목을 베라 말한다.[2] 평상복을 입은 김상헌과 수어사 이시백이 성벽 위를 순찰하던 중 날쇠의 동생을 비롯한 병졸들이 추워서 불을 지핀 것을 보고 청나라 군대가 성벽의 병사배치와 이동을 알아챌까 봐 불을 끄라며 단속하는 군관을 발견한다. 이때 옆에 있던 대장장이 날쇠가 동생이 군역을 경험하지 못해 잘 몰라서 그랬다고 사죄하면서 김상헌에게 가마니라도 내어주면 눈비와 바람을 막고 바닥의 한기를 막을 수 있다며 나눠 달라 청하고, 좋은 생각이라 여긴 김상헌은 이를 인조에게 고하여 가마니를 나눠줄 수 있도록 조치한다.
청군의 강화 조건이 세자를 볼모로 잡는 것이라고 인조에게 보고하자, 소현세자는 스스로 볼모가 되겠다고 자처하나 조정 신료들은 세자의 행동을 칭찬하며 조선의 앞날이 밝다함과 동시에 볼모로 보내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인조 또한 아비가 어찌 아들을 사지로 보낼 수 있냐면서 반대한다. 최명길은 다시 한 번 청군과 회담을 하러 갔다가 조선으로 칸(청 태종)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3] 하지만 김류를 포함한 조정 신료들은 현재 명나라도 상대하고 있는 청군의 칸이 어찌 심양에서 이곳까지 올 수 있냐면서, 최명길이 청군과 내통을 하고 있으며 사기를 꺾는다는 모함을 하나, 이에 최명길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용골대의 발언 그대로를 전한 것이라며 반박한다.
결국 항전을 결의한 인조는 팔도에 근왕병을 소집하여 남한산성을 구원하라는 격서를 보내기로 결정하고,김상헌에게 격서를 쓰게 한 후 성책 위의 병사들을 독려하며 격서를 보낼 결사대를 파견한다.
그러나 결사대가 길을 간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의 매복 부대의 맹렬한 기습 공격을 받고, 그 와중에 날쇠의 동생이 청 기병의 표적이 되자 날쇠는 옆에 있던 조총을 들어 한 번 사격 하지만 조총이 불량품에 가까워서 맞추지 못하고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가까스로 동생과 함께 살아 돌아온 날쇠는 자신의 청을 들어줬던 김상헌에게 조총의 가늠자가 비틀어지고 총신이 휘어져 구실을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면서 대장장이인 자신이 쇠를 다루는 재주가 있으므로 고치게 해달라 말한다.[4] 이에 김상헌은 어찌 자신이라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냐며 묻고, 날쇠는 부탁에 따라 가마니를 성벽 위에 올려준 일을 말한다. 김상헌은 가마니를 나눠준 건 자신이 아닌 주상전하가 군사를 아껴 내려주신 은덕이라 하지만 날쇠는 그럼 전하에게 이 안건을 건의해 달라 요청하였고, 김상헌이 인조에게 건의하자 인조는 병조에 명하여 날쇠로 하여금 병장기들을 수리하게 한다. 한편 최명길은 눈을 쓸다가 김상헌과 만나는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그렇게 조정에서는 전투를 벌여서 화친할 뜻이 없음을 성 밖의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결정하고, 수리한 조총 등의 병장기들을 가지고 이시백을 지휘관으로 한 전투에서 청군 장수의 목을 베는 등 첫 승전을 올리며 사기를 끌어올린다.김상헌: 조정이 가난하여 너희들의 추위를 덮어주지 못하니, 임금인 나의 부덕이다. 너희들이 이 외로운 산중에서.. 얇은 옷에 떨고 거친 밥에 주리며, 살이 얼어 터지고 발가락이 빠지는 추위에 알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온 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 아프다. 이제 적들은, 차마 옮기지 못할 말로 야만의 무도한 속내를 드러내니. 금수(禽獸)만도 못한 것들을 어찌 사람의 말로 꾸짖을 수 있겠느냐? 저들 마음 어둡기가 짐승 같아, 말 길이 막히고 화친의 길이 끊어졌으니.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군신상하(君臣上下)가 한 몸으로 성을 지키고 창의(倡義)를 몰아오는 근왕병과 함께 떨쳐 일어서면, 대의(大義)가 이미 우리와 함께 했으니 깊이 들어와 의지할 곳 없는 오랑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고립된 성은 위태하기가 머리칼과 같고 군부의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삼남의 군사들은 밤을 새워 달려오라! '''너희 의로운 신민들은 달려오고 달려오라!'''
승전하여 성으로 돌아오는 이시백의 눈에 나루터에서부터 포위된 남한산성까지 찾아온 나루가 숲 속에 웅크린 것이 보이고, 이 소식은 승전보와 함께 조정에까지 알려진다. 인조는 승리한 날에 적군이 가득하여 산성까지 오기가 불가능한 북문으로 어리고 여린 소녀가 단신으로 오자 상서로운 일이라 여기며 비천한 백성의 자식을 어찌 데려오겠냐는 영의정 김류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려오게 한다. 조정 중신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인조는 나루가 자신들을 안내해준 노인의 손녀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도 인연이라면서 그 노인은 어딨냐고 묻는다.[5] 인조는 신하들에게 나루의 할아버지를 찾으라고 하고 김상헌이 평소 아이들을 잘 아낀다고 소문났다면서 나루를 맡을 것을 명한다. 김상헌은 당황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김상헌은 나루를 데리고 집에 와서 식솔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라고 부탁한다. 나루는 정말 할아버지를 찾아주냐고 묻고 김상헌은 허탈함과 동정 어린 표정을 짓는다.
한편 승전한 이시백의 거처를 찾은 최명길은 자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척화파의 여론을 안주거리 삼아 술잔을 기울인다. 자신의 소신을 감당하는 최명길의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는 부분. 최명길이 이시백에게 무슨 파냐고 묻자, 이시백은 자신이 척화파, 주화파 그 어느 편도 아니며 단지 명령에 따라 싸우는 무관일 뿐이라고 말하고, 최명길은 자신도 무과나 볼 걸 그랬다고 한숨을 쉰다.[6]
그러나 희망도 잠시, 성 안에 먹을 것이 없어 말들이 비실비실 쓰러지기 시작한다. 말들이 굶어 죽자 인조는 '말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지만, 백성과 병사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돌이키기 어렵다'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병이 전쟁에서 중요하다는 도체찰사 김류의 말을 들어[7] 초가집의 지붕 볏집과 바닥, 병사들에게 나눠준 가마니를 거두어 말먹이와 땔감으로 사용한다. 이때 추위에 떨며 애원하는 가족과 노인이 나오며 민초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칠복과 날쇠도 가마니를 실어 나르는 역을 하게 되고, 칠복은 말로 태어나지 못한 게 한이라고 냉소 하며 날쇠는 아래의 한마디를 남긴다.
한편 성으로 회군 하는 병사들 사이로 한 병사가 오랑캐의 머리를 잘라왔으니 상을 받을 수 있겠다며 좋아한다. 그런데 머리를 본 이시백과 김상헌은 이 머리가 격서를 쥐어서 보낸 전령의 머리임을 알아채고 김상헌은 칼을 뽑고 달려나가 머리를 가져온 병사에게 이 머리를 어디서 잘랐느냐 추궁한다. 그 병사는 당황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결국 병사가 전령의 머리를 잘라다가 오랑캐의 머리라 속여 가져온 것이 밝혀지고, 인조와 대신들은 이를 두고 격서를 다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조의 말에 적의 군세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포위가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어 격서를 보낼 길이 없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최명길의 대답 등 이런저런 대화가 오간다. 모든 길이 막힌 것은 아닐 거라는 김상헌의 말에 인조는 몸이 날랜 정예 무관도 해내지 못한 일을 누가 하겠느냐며 묻고, 김류가 끼어들어 성 안의 병사와 백성의 숫자가 몇인데 설마 격서를 전달할 사람이 없겠느냐며 답한다. 이에 인조는 그럼 영상이 하겠는가? 라며 묻지만 김류는 헛기침만 하며 대답을 피한다. 그리고 최명길은 천만다행으로 이번엔 격서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적이 이를 역으로 이용할 것이라 진언한다.'''서날쇠: ... 어리석은 짓을 하는구나.'''
논의를 마친 후 거처로 돌아온 김상헌은 자신을 기다리던 나루를 보고 할아버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라 한 뒤 나루를 피하듯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후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 김상헌 얼굴을 비추는데 점점 마음의 부담이 커져 가고 있는 듯 하다. 날이 밝자 전령의 목을 잘라온 병사도 참수 되어 거리에 효수되고, 남아있던 말들마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버린다. 말들은 이후 전부 도축 되어 [8] 병사들에게 고깃국으로 배급된다. 간만에 고기를 먹으며 웃음 꽃이 피어오른 이때, 영의정 김류를 필두로 한 고관들이 순시를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한 병졸이 우리 볏짚을 뺏어 기른 말고기 한 점 드셔 보시라며, 기왕 말고기를 줄 거면 살이 좀 쪄 있을 때 잡았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말로 조롱[9] 섞인 말을 꺼낸다. 이에 군관이 정녕 죽고 싶은 거냐고 호통치지만 병졸은 아랑곳 않고 어차피 칸이 오면 우리는 다 죽을 텐 데 며칠 먼저 죽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친다. 난데없는 조롱에 격분한 김류는 옆의 군관에게 그의 입을 찢으라고 명령한다. 칼을 빼든 군관을 이시백이 제지하지만, 체찰사를 겸하고 있던 김류는 군율의 지엄함을 내세워 벌을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상헌과 최명길은 병졸을 당장 벌하여 일시적으로 복종 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럴 순 없다며 만류한다. 그러자 김류는 뒤늦게 주변의 병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10] 을 느끼고 명령을 거두어 들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이시백의 목을 치겠다고 호통을 치고는 가버린다. 날이 다시 저물자 이시백과 최명길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성벽 위에 올라가 적의 진을 살핀다. 빼곡하게 쳐진 횃불들과 청군의 진을 보며 이시백은 어제부터 더 많은 청군들이 삼전도로 모여들고 있다고 말하고, 이에 최명길은 분명 칸이 오고 있는 것이라 답한다.
새해를 맞은 조정. 최명길은 칸이 정말로 도착했는지 염탐할 겸, 용골대에게 세찬을 주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이때 김류가 또 나서서 적과 내통한 최명길은 믿을 수가 없다며 공격하고, 인조가 그럼 김류도 같이 가서 청군 진영을 살펴보고 오라고 명하고, 그의 충심에 큰 보답을 내리겠다고 한다. 마치 김류의 공격적인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한 인조의 발언이 사이다. 반대로 김류의 표정은 썩어 들어간다.[11] 그렇게 김류와 최명길은 청의 앞잡이 역관 정명수와 함께 청 진영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면서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명에서 획득한 홍이포를 보게 된다. 정명수는 명군에게서 빼앗은 서양의 대포라 소개하며 이 대포로 댁들 임금이 숨어있는 성의 벽도 속절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며 넌지시 협박한다. 김류는 정명수를 보며 당신도 조선 사람 아니었느냐 하며 어찌 청군 편을 드냐며 묻지만, 정명수는 자신은 노비로 태어났고 조선의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는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고 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이윽고 사신단은 용골대를 만나 소와 세찬을 바치지만, 용골대는 이미 술, 고기, 과자들이 풍성하게 차려진 상에서 보란 듯이 식사를 하던 중이었고, 이어 세찬을 거절하며 도로 가져가라 말한다. 김류는 이유를 물으며 가져온 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고 질문하지만 용골대는 가져가서 너희 임금의 봉양을 위해 먹이라며 우리는 먹을 것이 넉넉하기에 여유롭다는 대답을 한다. 최명길은 도성을 나와 고루 갖추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임금이 보낸 세찬과 소라며 받아주기를 바라지만 용골대는 이어 조선의 8도가 이미 우리의 것이니 8도의 술과 고기도 우리의 것이라며 너희들이 그 성에 숨어 먹을 것이 없음을 내가 이미 아니 굶주린 너희 왕과 신하들이나 먹이라며 끝내 거절한다. 그럼 이렇게 온 이상 칸을 뵙고 가고 싶다고 하지만 용골대는 단칼에 거절한다. 칸은 어디에 있느냐는 최명길의 물음에도, 곧 소식이 갈 것이라는 말만 전해 듣는다.
김류와 최명길이 돌아온 후, 세찬을 거부 당해 당연히 화가 난 조정에서는 최명길은 물론이고 김류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오랑캐 무리에게 선공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난다.[12] 김류를 총 사령관으로 하여 군사 300여 명이 성 밖을 나간다. 김류는 바람이 심하고 때가 좋지 않다며 만류하는 이시백을 물리치고[13] 성루에 서서 총공격 신호를 내리며 북을 치지만, 초관을 비롯한 병사들은 살기가 섬뜩한 산성 주변 숲을 보며 두려움에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김류는 부관에게 자신의 칼을 내려주며 '체찰사의 칼이다, 움직이지 않는 병사들을 베라'고 하고, 부관이 김류의 칼로 병졸을 죽이자 그제서야 부대가 전진한다. 긴장감 넘치는 숲 속. 무언가 부스럭거리자 부대 전체가 얼어버리고 초관이 그 지점을 활로 쏘는데, 확인하러 간 병졸이 사슴이라면서 고기를 얻었다고 좋아한다. 초관은 그 자리에 표시를 해서 돌아올 때 사슴을 갖고 가자고 한다.
공격 부대는 내려가서 청군의 목책에 불을 지르고 넓은 들로 전진해서 부대 재배치 및 정찰을 하려 하지만 목책 주변이 비어 있던 것은 청군의 함정이었다. 병사들은 얼마 전진하지도 못하고 개활지에서 적 포병 화력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청군 홍이포의 포격이 작렬하는 가운데 초관은 청군의 목책 뒤로 성공적으로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초관은 다가오는 청의 기병들이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병졸이 실수로 사격을 해버리자, 이를 시작으로 모든 조총병들이 따라 사격을 해, 탄을 전부 허공에 날려버리고 만다. 다급해진 조총병들은 얼른 재장전을 하려 하지만 전투 직전 이시백의 강풍에 대한 염려가 현실이 되어 총구 안으로 화약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그 사이에 청 기병들이 조선군을 박살 내버린다. 전령이 성문으로 뛰어 오는 것을 보자, 패배를 직감한 이시백이 퇴각을 주장하지만 반대로 김류는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며 지원군을 내려보낼 것을 강요한다. 이시백은 지원군도 다 죽는다며 항명하고, 곧 북을 울려 퇴각 신호를 보낸다.[14] 후퇴 북 소리를 들은 초관과 잔여병들이 후퇴하지만 이어지는 청 보병의 추격과 홍이포의 포격으로 대다수가 전사하고, 죽은 사슴의 곁은 수많은 조선군의 시신으로 뒤덮인다.
패전 후 조정에서 책임론이 일자, 김류는 자신도 죽을 죄를 지었지만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항명한 이시백과 휘하 병사들을 모두 잃은 초관의 책임이 더 크다면서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15] 최명길은 자신이 아는 수어사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며 이시백을 변호하지만, 김류가 최명길은 이시백과 동문이었다고 들었다며 이시백과의 사사로운 정으로 대사를 그르친다며 공격하면서 변호가 무산되었고, 이시백은 상관인 자신을 참하고 부하는 살려줄 것을 청하지만 결국 이시백은 곤장 30대를 맞게 되고 부하를 모두 잃은 초관이 참수 당하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김류는 체찰사직을 삭탈당하고 김상헌이 체찰사가 된다.
이후 날이 밝자 김상헌은 새로 쓴 격서[16] 를 인조에게 올리며, 인조는 내용인 즉 성문을 열고 나가 근왕병들과 합세에 야습을 하여 청군을 몰아내자는 격서를 읽으며 이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다. 김상헌은 어젯밤 한 승려가 성으로 들어왔는데 근처에 도원수가 이끄는 어림잡아도 수만은 되는 근왕병들의 진지를 봤다는 증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인조는 필시 근왕군이 와서 명령을 기다릴 것이라는 김상헌의 말을 듣고 정월 대보름에 검단산에 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하기로 하지만,[17] 포위된 성 밖으로 격서를 전달할 방법이 없어 그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
김상헌은 날쇠에게 격서를 근왕병을 이끄는 도원수의 진영까지 전달할 것을 부탁한다. 날쇠는 군관도 아닌 천한 대장장이에게 이러한 국가의 막중대사를 맡기냐며 질문하고, 김상헌은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데 충절의 귀천이 있겠느냐며 날쇠를 설득하지만 오히려 날쇠는 먹고 살며 때리고 가두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다며 반문하고 자신보다 나은 이가 있을 거라며 거절한다. 하지만 김상헌은 등을 돌린 날쇠에게 무관들은 성 밖의 지리를 알지 못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날쇠 밖에 없다며 계속 부탁하고, 날쇠가 망설이던 찰나 나무를 해오고 돌아오던 동생 칠복이 이야기를 듣고 뛰어 들어와 왜 자꾸 우리 형님에게만 목숨을 걸라 하냐며 완강히 거부하지만 날쇠는 마음을 굳힌 듯 격서만 전달된다면 전쟁이 끝나냐고 김상헌에게 묻는다.
김상헌은 그렇다고 하며 조정이 나서야 성 밖의 백성들도 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칠복은 그 말을 듣고 기가 찬 듯 이미 다 뒤져버렸는데 누굴 살리느냐며 김상헌에게 대들고 날쇠는 그런 칠복을 말려보지만 칠복은 계속해서 김상헌에게 정묘년의 난리 때 마을에 오랑캐가 쳐들어와 마을 사람 중 남자는 싸그리 참살 당하고 여자는 겁탈 당했다고, 형님의 색시와 자식들도 모조리 오랑캐에게 죽어나가는 와중 지체 높으신 분들은 전부 강화도로 도망가버렸는데 김상헌 대감은 어디 있었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계속해서 날쇠가 그만 하라며 타이르지만 칠복은 부모님 시체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며 울분을 터뜨린다.
김상헌은 이런 칠복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결국 거처로 돌아간 김상헌은 새해를 맞이해 나루에게 떡국이 놓인 상을 받지만 나루에게 상을 물리며 니가 먹으라며 나루에게 내준다. 나루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며 수저를 들기를 권하지만 김상헌은 나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그만 먹으면 안되겠냐고 하지만 결국 권유에 못 이겨 한 숟가락을 뜬 뒤 임금님이 내리신 음식을 버릴 수도 없으니 니가 먹으라고 하며 나루에게 떡국을 물려주고 나루가 떡국을 먹는 모습만 바라본다.
그 후 새해를 맞아 남한산성 안에서는 명나라 황제를 위한 망궐례가 행해지는데, 산 위의 청군 진영에서는 이 모습을 바라보는 청 태종이 등장한다. 용골대가 자신의 무능으로 이를 막지 못했다며 홍이포로 망궐례를 중단 시키겠다고 하지만 칸은 정초에 화약 냄새는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며 이를 중지 시킨다. 망궐례를 치르던 대신들과 인조는 산맥을 넘어 포대가 설치된 청의 진영을 보고 후에 논의를 시작한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칸이 여기에 온 이유는 성벽을 밖에서 부터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문을 안에서 부터 열기 위함이라며 먼저 서신을 보내 청 황제에게 예를 갖출 것을 권한다. 김상헌은 그것은 용골대에게 세찬을 보내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며 이에 반발하며 이미 어떠한 서신도 없이 국경을 넘어 온 자들에게 예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라 반문한다. 김상헌은 결사항전을 주장하지만 최명길은 체념한 듯 살 길을 찾기 위해서 항복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올리고 논쟁이 격해지자 인조는 그만둘 것을 명한다. 하지만 인조의 명에도 아랑곳 않고 임진년의 왜란에 명의 황제가 도와주신 덕에 정사를 보존한 것이라거나 오랑캐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는 없는 것이라는 지극히 친명배금적인 주장이 계속해서 나오고 인조는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너희들이 그만하지 않으니 내가 그만해야 할 노릇이라 말하고 자리를 나선다. 최명길은 엎드려서 걸어나가는 인조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삶이 있은 후에야 대의와 명분 또한 있는 것 아닌가라며 울먹이고, 김상헌도 그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한편 서날쇠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고 낫을 챙겨 들고 대장간을 나서던 중 같이 가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칠복에게 같이 있으면 더 눈에 잘 띌 것이며 여기에 남아 대장간을 지켜 달라 부탁한다. 칠복은 형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만 날쇠는 니가 장가 가는 모습은 보고 죽을 것이라며 타이르고, 끝내 칠복은 체념하며 형을 보낸다. 암문에 도착한 날쇠는 김상헌으로부터 격서를 받고 이 일을 성공하고 돌아온다면 주상전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라 격려 받지만..
날쇠는 이렇게 자신과 같은 소시민들이 정확히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자신들이 꿈꾸고 있는 세계는 얼마나 소박한지, 또한 간절한 것인지 정곡을 찌르는 명대사를 남기며, 이후 김상헌에게 절을 올리고 문을 나선다. 김상헌은 후에 최명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겨울이 참으로 모질고 깊다는 김상헌의 한탄에 최명길은 겨울이 깊었으니 봄이 멀지 않았을 것이라며 모진 겨울을 견뎌낸 것들이 곧 봄을 맞을 것이라 답한다. 자리를 나서는 최명길을 불러 세운 김상헌은 격서가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해주고 최명길은 그에 대답 없이 김상헌을 바라본다.서날쇠: 제가 이 일을 하는 건, 주상전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 같은 놈들이야 그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밤 중 청의 병사들의 맹렬한 추격을 받아 도망치는 날쇠가 화살 세례를 받고, 결국 화살이 맞았는지 핏자국을 뚝뚝 흘리고 격서를 떨어뜨리고 만다. 핏자국을 추적하던 병사가 격서를 발견하고 주우려던 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날쇠가 뛰어내려 낫으로 병사의 목을 베어 죽이고 간신히 격서를 챙겨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한편으로 청나라의 군영에선 태종이 용골대에게 군사를 나눠 사방에서 성을 공격하면 하룻밤 안에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며 모든 장수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말하지만 태종은 자신은 저런 작은 성 하나를 얻고자 군사를 보내 성벽을 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직접 그들이 성문을 열고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황제의 위엄이 빛날 것이라 한다. 즉 직접 공격하지 않고 성을 압박해 직접 그들이 항복하게 하겠단 것. 이후 태종은 문장이 좋은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시키며, 아래의 서신을 쓴다.
서신을 읽은 인조는 두려움에 떨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지만 김류는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이니 대신들에게 묻지 말고 전하께서 뜻을 말하시면 받들겠다"고 대답한다.[18] 인조는 살고자 하며, 이것이 자신의 뜻이라 말한다. 최명길은 살고자 한다면 답서를 보내어 말귀를 트라 진언하지만 김상헌은 살고자 하는 뜻은 거룩한 것이니 진정 살고자 하신다면 답서를 보내지 말라 반문한다.[19] 이 말을 들은 인조는 보냈다는 전령은 어디 있냐고 물었지만, 김상헌도 아는 것이 없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인조는 이제 곧 대보름인데 도원수의 근왕병은 언제 오는 것인지 이어서 물었지만 김상헌은 그저 진정하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만 답한다.청 태종: 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患亂)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왔다.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 주겠다. 너는 나와서 두려워 말고 말하라.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하늘에 보름달이 차는 날.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인조는 언성을 높이며 칸이 이성벽을 무너뜨리고 오랑캐들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호통치며 김상헌은 쩔쩔매며 보름날까진 시간이 남았으며 반드시 근왕병의 봉화가 오를 것이라고 말하지만 대신들은 이를 듣고 의아해 하며 근왕병의 봉화가 무엇이냐며 물었고 곧 사태를 파악한 몇몇 대신이 국가의 중대사를 어찌 소신들도 모르게 도모할 수 있냐며 말한다. 김류는 군사경험이 일천한 김상헌 예판에게 종사의 운명을 맡기시냐며 따지듯이 물었으나 인조는 그렇다면 다시 그대에게 맡기냐고 말하는 것으로 답하고 경이 날 살려보겠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김류는 따지고 보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도 예판이 화친을 배척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예판에게 화친의 뜻을 담은 답서를 써서 보내게 하면 칸도 마음을 아실 것이라며 답한다. 인조는 이를 받아들여 문구를 최대한 공손하게 해서 답서를 지어 올리라 하지만,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며 불복한다. 그 때 최명길이 나서서 조선에 문장가가 김상헌 밖에 없겠냐며 화친을 반대했던 그 이름을 지켜 달라고 청한다. 인조가 다시 누가 항서를 쓸 것이냐 묻지만 신하들은 후대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오로지 최명길만이 스스로 나설 뿐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던 날쇠는 상처를 입고 쓰러지지만 다행히 조선군에 발견돼 목숨을 건지고 격서도 전달한다. 근왕군 장수들은 처음에는 의식을 찾은 날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며 격서는 잘 받았다면서 어느 군영의 군관이냐고 함자(이름)를 묻지만 날쇠가 자기 신분을 밝히자 곧바로 반말을 하면서 대장장이 따위가 격서를 전달하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의심한다. 한편 칠복은 김상헌으로부터 동상에 좋다는 돼지 기름을 받으며 이것을 전해주러 온 것 뿐이냐는 질문을 한다. 김상헌은 애매모호하게 "소식은 없느냐"라고 물었고 칠복은 날쇠에 대한 소식인지 근왕병에 대한 소식인지를 되물었다. 김상헌은 그 둘은 다르지 않다고 하자 칠복은 근왕병이 더 중요할 것임을 안다며 냉소하고 자리를 떠난다.
김상헌이 다시 거처로 돌아오던 중 밖에서 흙바닥에 물고기를 그리고 있던 나루를 발견하고 물고기인 꺽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나루는 송파강이 녹으면 꺽지를 잡아드리겠다며 김상헌에게 말하고, 김상헌의 송파강의 해빙기를 묻자 민들레 꽃이 필 때 같이 송파강의 얼음이 녹는다며 답한다. 시간이 지나 최명길이 쓴 항서가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답서를 불태우고 역적 최명길의 목을 베라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사는 길을 주제로 논쟁을 벌인다.[20]
인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최명길: ..신의 학식과 경륜이 짧아, 전하의 성심을 온전히 글로 옮기지 못했사옵니다.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하명해 주시옵소서.
김상헌: 이 문서가 정녕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전하, 명길의 문서는 살자는 글이 아니라..
최명길: (김상헌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러하옵니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야 할 길이옵니다.'''
김상헌: '''지금 전하의 군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최명길: '''성첩 위 군사들은 이미 추위와 굶주림에 기력을 잃어가고 있사옵니다..'''
김상헌: 내일이 보름이옵니다. 오늘밤 반드시 금단산에 봉화가 오르고 근왕병들이 성을 향해 달려올 것이옵니다!
최명길: 오늘 답서를 보내지 않으면.. 칸의 대군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세상은 모두 불타고 무너져버릴 것이옵니다.
김상헌: 하룻밤이옵니다!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고 어찌 먼저 무릎을 꿇으려 하시옵니까!
최명길: '''그 하룻밤에 온 세상이 무너질 수 있사옵니다.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내일 신을 죽이시더라도.. 오늘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 명길이 칸을 황제로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로 칭했으니, 전하께서는 명길의 문서를 두 손에 받쳐들고 칸 앞에 엎드리시겠사옵니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라 명한다면 칸에게 술을 따라 올리시겠사옵니까?!
최명길: 전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는 것과 같이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것이옵니다!
김상헌: 정녕 명길이 말하는 것이 전하가 살아서 걸어가시고자 하는 길이옵니까?
최명길: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그저 말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 옵니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은 삶을 죽음과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 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김상헌: (울먹이며)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신은 그런 임금은 차마 받들 수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최명길: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에 발 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서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한편 인근 근왕병의 주둔지에서는 격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천한 대장장이에게 국서를 맡겼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무관들은 진언하지만 도원수는 날인된 국새를 보고 인조의 격서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무관들은 남한산성은 견고한 성이니 홀로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청나라의 군대를 두려워 해 진을 뒤로 물리는 것을 권한다. 설령 봉화를 올리더라도 청군에게 노출되어 집중 공격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워하여 공격을 망설이며 왕명을 거역하여 전쟁 이후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을 고민한다. 도원수와 장수들의 결론은 '''격서를 받은 적이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21]
결국 무관이 몰래 침소에 들어와 단도로 날쇠를 죽이려고 이불에 단도를 찔러 넣었으나 이불 안에 있었던 것은 짚더미였고, 뒤에 숨어 있던 날쇠는 "나는 벼슬아치들을 믿지 않소."라고 말하며[22] 성을 떠날 때부터 챙겼던 낫으로 군관을 제압하고 달아난다. 같은 시간, 김상헌은 어두운 금화산의 봉화대를 바라보며 봉화를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오히려 근왕병들은 청군과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포위를 뚫고 격서를 전달한 구국의 영웅인 날쇠를 첩자로 몰아 엄하게 죽이려 들고 있었다. 추적 도중 앞뒤로 포위당한 날쇠가 얼어붙은 폭포를 조선 낫을 피켈처럼 찍어 올라 도망가는 걸 알아차리지만, 군관이 활로 날쇠를 겨냥하는 순간 폭포 위의 청군의 공격을 받고, 쏟아지는 화살에 추격하던 근왕병은 날쇠를 포기하고 도망친다.
한편 인조는 최명길과 독대하여 후대에 역적으로 남아도 괜찮겠냐고 묻고, 최명길은 자신이 감당할 일이라고 말하며 김상헌만한 충신이 없으니 후일 궁으로 돌아가더라도 내치지 말아 달라고 한다. 이에 인조 역시 경도 나의 충신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김상헌과 최명길 모두 우국충정의 길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도망치는 근왕병들을 청군이 추격하면서 근왕군의 본진은 완전히 초토화된다. 남한산성 성벽에서 김상헌은 봉화대를 하염없이 바라 보는데 어두웠던 먼 산에 횃불이 하나 둘 씩 켜지며 함성이 울려퍼지는 듯 하지만 김상헌의 멍한 표정을 잠깐 비춰준 뒤 아무일도 없이 잠잠한 산을 다시 비춰주며 김상헌의 간절한 바람 섞인 상상과는 달리 결국 봉화의 불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23] 저항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 초토화된 조선군 진영을 걷는 날쇠의 모습 뒤로 까마귀가 시체의 눈을 파먹는다.
모든 방해를 무릅쓰고 마침내 최명길이 청군 진영으로 출발한다. 그 시각 성벽 위의 칠복은 김상헌에게 받은 돼지기름을 동상 부위에 바르며 형이 근왕병들을 이끌고 와서 난국을 돌파할 것이라며 주변 병졸들과 잡담을 한다. 나이 먹은 병졸이 정말 그렇게 되면 자신의 딸을 날쇠 동생과 혼인시켜 주겠다고 하자, 칠복은 딸이 이쁘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말하려는 순간, 병졸이 기대어 있던 성벽이 청군의 포격으로 순식간에 무너지며 즉사하고 정월 대보름으로 예고한 청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청군이 쳐들어오고, 이시백을 필두로 한 조선군과 청군의 백병전이 벌어진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응전하지만 청군의 압도적인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군역 경험이 없었던 칠복은 가까스로 동료를 죽이려는 청군 한 명을 쓰러뜨리지만 곧바로 청군의 창을 맞고 전사한다.[24] 포격으로 인조가 있는 행궁을 비롯해 성 안이 파괴되고 김상헌은 집안으로 들어가 겁에 질린 나루를 안아 보호한다.[25] 대포 소리에 다급하게 말을 달려 겨우 청의 본진에 도착한 최명길은 항서를 칸에게 바치며 항복을 청하고, 이에 칸은 공격을 멈춘다. 때 맞춰 남한산성으로 돌아온 날쇠는 동생의 시신을 보며 오열한다.
청에 항복하기로 최종 결정이 나자 조정에서는 성내 청을 오랑캐로 취급하는 문서와 서적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이후 성으로 돌아온 최명길은 김상헌을 찾아온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사직의 안위와 무고한 백성들을 구했다고 말한다. 이에 최명길은 같이 조선을 다시 일으키자고 설득하지만 김상헌은 그것이 임금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백성을 위한 것인지 반문한다. 최명길이 둘 다를 위한다고 답하자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말이오.''' 이와 같이 말하며 거절한다.
김상헌은 나루를 날쇠에게 맡기고 어려운 일을 해주었으며 마지막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준 날쇠에게 큰 절을 올리자 날쇠 또한 절을 하며 작별한다. 최명길은 임금의 곤룡포가 아닌 신하의 남색옷을 입고 항복의 예를 하러 가는[26] 인조의 말 고삐를 잡고 성문 앞까지 향한다. 항복하러 가는 인조 행렬을 보며 나루가 날쇠에게 왜 사람들이 우냐고 묻고, 날쇠는 임금이 궁궐로 돌아가는 게 좋아서 우는 거라고 답해준다. 청나라의 요구로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가려는 인조에게 최명길은 성문 밖에서부터는 말을 탈 수가 없다 간언하였고 이에 인조는 하마하여 문 밖으로 나가는 그 뒤를 신하들이 따르고 한쪽 팔을 다친 이시백을 비롯한 병졸들과 장수들은 모두 절을 한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를 바치고 그런 인조를 보는 최명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그 시각 김상헌은 인조가 있는 삼전도를 향해 절을 올린 뒤 나루의 할아버지를 죽였던 바로 그 칼로 자결한다.[27][28][29]
굴욕의 항복식이 끝나고 그 때의 복장 그대로인 인조와 신하들이 한양 궁궐로 돌아온다. 폐허가 된 궁은 어지러웠다. 인조와 신하 행렬이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최명길이 뒤돌아 관객들을 응시하다가 궁궐 문이 닫힌다. 이 다음으로 병자호란이 개전 47일 만에 끝났으며 50만 명의 조선인이 청에 끌려갔다는 글귀가 나온다.
다음해 봄이 되어 민들레꽃이 핀 마을. 언제 전쟁이 났냐는 듯 평화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루가 날쇠가 대장간 일하는 걸 쪼그려 앉아 구경하다가 친구와 연을 날리러 뛰어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30]
6. 탐구
6.1. 원작과의 차이점
- 나루가 벤 사공의 딸에서 손녀로 바뀌었다. 부모는 이미 사공 일을 하다가 재해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설정.
- 서날쇠의 설정도 바뀌었다. 원작에서 서날쇠는 이미 피난을 보냈을 뿐 아내도 있고 두 아들도 있는 가장이지만, 영화에서는 아내와 갓난 딸을 정묘호란 때 잃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온 인물로 바뀌었다. 대신 칠복이라는 동생(의동생) 캐릭터가 새로 설정되었다. 원작은 날쇠가 나루를 거두고 그녀가 곧 크면 자신의 아들과 혼례를 시킬 계획을 세우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 서날쇠가 나루를 맡는 시점이 다르다. 원작에서는 나루가 산성에 들어온 직후 김상헌이 나루를 날쇠에게 맡기지만 영화에서는 출성이 결정된 후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 날쇠에게 맡겨진다. 덕분에 나루가 김상헌에 대해 느끼는 친근감이 한층 강해졌다.[31]
- 러닝타임상 표현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이 잘렸다. 날쇠가 가죽을 꿰맬 대나무 바늘을 만드는 장면, 칸의 소재에 대하여 대소신료와 백성들이 온갖 풍문을 퍼뜨리고 주워담으며 혼란에 빠지는 장면, 김류·김상헌·최명길이 온조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 칸에게 보낼 항복 문서 작성을 명 받은 당하관 셋이 각자의 방식으로 어명을 피하는 장면 등. 원작의 내용이 출성이냐 항전이냐 이상으로 그러한 주장들을 떠들어 대는 신료들의 말[言]들이 얽히고 부서지는 모습, 명분론의 말로 성을 쌓는 김상헌과 현실론의 말로 길을 내는 최명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영화는 이야기의 주제를 보다 현실의 문제로 좁히고 압축하여 전개하였다.
- 영의정 김류가 원작 이상으로 찌질하게 묘사되었다. 원작의 김류도 무능하고 권위적이면서 아무 의미 없는 말들로 당장 임금의 질문에만 모면하려 하는 인물상이지만 영화에서는 더욱 밉상으로 표현된다. 말고깃국을 두고서 군병들이 김류를 조롱하는 장면에서, 원작은 옆의 비장만 성을 냈을 뿐 김류는 자신의 부덕이니 그냥 두라며 흘려넘겼지만 영화에서는 비장에게 직접 그 군병의 입을 찢어버리라고 지시하다가 이시백, 김상헌, 최명길의 만류와 주변 군병들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고 취소한다. 심지어 선공을 하려다 개박살나는 장면에선 옆의 장수가 바람이 불리하게 불어 화약 장전도 못할 거라고 지적하자 무당이 말한 기일이 오늘이라는 드립까지 치는데, 흡사 기일에 싸우면 금나라 병사들을 이길 수 있다며 육갑신병을 모으다 털린 곽경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마침 두 침략군 모두 여진족이었고. 이는 김상헌을 최대한 충신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적 원작 각색으로 보인다. 김류가 찌질하게 나온 덕에 매번 그를 막아서는 김상헌이 충신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감독 등이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중 김류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음울한 영화의 분위기를 일시적으로 살짝 풀어주는 개그 담당이기도 하다. 헛소리 하다가 옆에서 태클을 당하는 장면이 여럿 있는데 그때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가령 인조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역적 최명길의 목을 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라고 나섰더니 그 인조가 내놓은 "영상의 목을 치라는 상소도 있었다." 한 마디에 그대로 놀라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를 않나, "최명길이 오랑캐의 힘을 너무 과장하고 있습니다!" 라는 식의 주장을 인조 앞에서 하다가 역시나 바로 그 인조한테서 "그럼 그대가 명길과 함께 사신으로 가서 그 동태를 살피도록 하라." 는 말이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죽을상을 하면서 청군 진영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된다거나 하는 등.
- 영화에서는 김류의 책임 뒤집어씌우기에 인조가 이시백에게 곤장형을 내리지만, 원작에서는 김류가 독단적으로 형을 집행하고 나서 보고하고, 인조는 당상관에게 매를 쳤다는 보고를 듣고 놀란다. 조선에서 당상관은 역모급 죄에 연류된게 아닌한 정말 왠만해선 매 맞을 일이 없다. 정말 심한 죄를 지어 매를 치려면 먼저 왕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김류를 대신해서 제찰사가 되지만, 원작에서는 그런거 없다. 문제는 상술했듯 김상헌을 체찰사로 임명하는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체찰사라는 사람이 성이 전면공격을 받는 와중에 군사지휘도 포기하고 아이를 보호하러 달려가는 어이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만 것.
- 산성 밖의 조선 근왕병들이 청군의 집중공격을 당하기도 싫고 어명을 거스른 뒷감당을 하기도 두려워 격서를 태우고 그를 가져온 서날쇠를 죽이려는 장면은 영화만의 창작이다. 영화 내에서 실명은 안 나왔지만 이 근왕병의 도원수는 다름아닌 김자점. 사실 이쪽이 영화에서 메인 악역으로 나오는 김류보다 훨씬 악명높은 인물인지라 실명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김류가 먹을 어그로를 상당히 흡수할 가능성이 있어 일부러 감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 청나라 칸(홍타이지)이 인조에게 보내는 문서의 내용이 원작 소설의 원문에 비해서 꽤 압축되었다. 원문의 글이 대사로 읊기에는 지나치게 길기는 하다. 그러나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칸의 저음 목소리, 음악과 어울려서 위압과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꽤나 인상적이다. 소설 원문에서의 문구는 아래와 같다,
- 원작에선 인조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릴 때 중간에 청 태종이 잠시 멈추게 하고 오줌을 갈긴다.(...) 영화에선 나오지 않는다.
- 김상헌이 항복이 결정된 후 자결한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원작은 (그리고 역사에서도) 목을 매어 자진하려고 하나 저지당한 뒤, 청이 척화신들을 찾는다는 말에 아직 자신의 목숨을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겠다며 청의 포로로 끌려간다. 영화에서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방에서 칼로 배를 찔러 목숨을 끊는다. 이 때 사용한 칼은 초반에 뱃사공을 베었던 칼이며, 그가 죽을 때의 모습도 뱃사공이 죽어 쓰러진 모습과 비슷하게 연출된다. 일종의 수미상관적 연출. 실제 역사에서 할복을 시도한 인물은 이조참판 정온으로 이쪽도 미수에 그쳤다.
- 원작의 김상헌은 역사적으로도 나오는 명분론의 입장을 완고히 고수하는 캐릭터지만,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출성하면 조정에 나가 임금과 백성을 위한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하는 최명길에게 김상헌은 백성들이 나아갈 새 길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이 모두 부서져야 한다. 나도, 최명길도, 우리가 세운 임금마저도 부서져야 새 길이 열린다 고 대답한 뒤 끝끝내 남한산성을 떠나지 않고 죽는다. 그것이 자신이 성 안에서 깨달은 것이라고.
6.2. 시대적 고증
- 병자호란 당시 김자점이 북쪽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실제 김자점은 12월 25일 토산에서 도르곤의 기습을 받고 패전한 뒤 12월 30일에는 남한산성에서 멀지 않은 미원(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서 평안도 근왕병을 수습하고 경기+황해+함경+강원 4도의 근왕병을 집결시켜 1만 7천에 달하는 병력을 모아두고 있었다.# 따라서 '도원수 김자점이 남한산성 근처까지 병력을 끌고 왔다'는 내용 자체를 고증 오류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후 한 달 동안 미원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아, 이듬해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맞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 본 작품이 아직 제작 중이던 2016년 10월 3일 청나라 군대는 갑옷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기사가 떠서 역덕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32] 이유인고 하니 청과 후금은 다르니 청나라 갑옷을 입힐 수 없으며 조선까지 그 먼 길에 갑옷을 어떻게 입고 오겠냐는 것이다. 이에 역덕들은 만주에서 대포도 끌고 왔는데 춥다고 갑옷을 입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면서 뇌피셜 고증이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가해지는 가운데 10월 11일 부흥 카페에서 의상 디자이너란 사람이 나타나 해명을 했다. 자신도 그 기사를 보고 뜨악했다면서 아직까지도 의상은 샘플링 중이고, 두정갑을 비롯한 다양한 갑옷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명이 있고나서 일단 논란은 진정되었다.
- 논란이 지나간 후 스틸컷이 공개되었다. 스틸컷에 나타난 조선군의 고증은 우려와 달리 상당한 수준이었다. 목책 뒤에서 조총을 발사하는 조선군 모습은 기존의 사극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특히 환도의 올바른 패용법이 묘사되었으며 날쇠가 조총을 수리하는 장면에서 쇠구슬을 주조하는 등 중간중간 지나치기 쉬운 장면에서도 고증을 철저하게 했다. 첨주형 투구와 얇은 갑옷을 걸친 조선군의 모습에서 보듯이 의상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고증을 보이고 있어 고증에 대한 우려는 단번에 불식되었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역덕들에게도 영화가 굉장히 기대된다는 등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고증이 완전한 건 아니다. 조선군과 청군이 접전하는 장면의 스틸컷을 보면 조선군 고증은 최상급이나 청군의 복장이 최종병기 활 등에 나온 팔기군 갑주가 아니라 명장(영화) 등에 나오는 청나라 말기 녹영병 복장에 가까워보여 청군 갑옷 운운한 최초 기사와 맞물려 역덕후들의 우려가 아직 남아있다.
- 우려와 다르게 팔기군의 갑옷도 제대로 등장하기는 한다. 다만 지휘관급 인물들만 팔기군 두정갑을 입는 것으로 취사고증을 했다. 그리고 타타라 잉굴다이가 정백기 출신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정백기가 입던 색깔의 갑옷을 입고 나온다. 게다가 팔기군 전원이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료에 나타나는 포상 기록에서 팔기 병졸 중 경보병과 갑옷을 챙기지 못한 보병들이 언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대제국이라 하더라도 전군에게 갑옷으로 중무장을 시키는 나라는 없었다. 로마 제국의 군대도 상당수의 경장보병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진시황의 병마용을 봐도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들 못지 않게 경무장한 보병들의 인형도 많다. 오히려 일반 병사들 전원이 갑옷을 입고 나오는 여러 사극들의 고증이 틀렸다고 봐야 한다.
- 조선의 조총 고증은 한국 사극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다. 대신 활의 비중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영화상에서 활은 무관들만 쓰는 정도로 묘사된다.[34] 그러나 조선의 군대에서 활이 사실상 퇴출된 시기는 영정조 시기쯤이며(공식적인 퇴출은 고종 시기다.) 이때까지는 활은 조총의 긴 장전시간을 보조하는 역할로 중요하게 쓰였다. 더불어서 천자총통 같은 조선군의 대포도 화면상엔 등장하지 않고 대사로만 언급된다. 다만 인조시대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활의 운용이 조총 도래 이후 화포같은 화약무기를 숭상하여 병장기 정비와 수련을 게을리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을 정도[35] 로 지리멸렬 해졌다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 이는 조선이 조총을 임진왜란의 전훈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과 똑같은 문제가 불거진 병과 불균형의 방증이기도 했다.
- 홍이포를 '서양'에서 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이부분은 틀린 것도 아니고, '서양'이란 용어가 관객에게 훨씬 친숙한 것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더 옛스런 느낌을 원한다면 양이(洋夷), 색목인(色目人), 홍모인(紅毛人)에게서 얻었다고 할 수 있다.
- 이시백이 곤장을 맞는 장면에서 초관이 참수를 당하는데, 실제 조선에서 죄인을 참수할 때는 귀에 화살을 꽂아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고 완전히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형을 집행한다. 다만 이것은 아직까지 어느 영상매체에서도 구현이 안 된 부분이라... 만화 《칼부림》에는 이 방식이 등장한다.[37]
- 후반부 인조가 숭덕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할 때 이마에 흙만 묻는 정도로 약하게 절을 한다. 삼궤구고두례 문서에 나오듯이 이마에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했다[38] 는 인식과 달리 과격하지 않게 1번 절하면 3번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으로 3회 반복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에 맞게 1번 절을 하고 3번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 문무백관이 융복(철릭)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융복이 아닌 관복(단령) 차림을 하고 있다.(이괄의 난 때부터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는 시점까지 문무조신들은 융복을 착용하는 세월이 많았다.)
- 조선 장수들의 두정갑에 투구 드림부분이 여전히 펄럭인다. 또한 드림이 지나치게 크다.(투구에 달린 드림은 귀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 드림에 달린 끈으로 펄럭이지 않게 고정시키는데 이 점이 기존 사극처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 청나라 병사들의 갑옷이 청나라 말기 한족 출신 녹영 병사들의 흉갑이다.
- 청나라 초기의 변발 금전서미는 머리 뒤통수에 위치해야 하는데 정수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류가 있다.
- 명나라를 일컬어 대명제국이란 표현을 쓰는데 동양권 국가에서 제국이란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료상의 기록에서도 제국이란 표현은 19세기 말 근대화 시기에서나 등장하는 서양식 표현이고, 이전 동양권 국가에서 중국을 표현하는 이색적인 단어는 천조(天朝), 上國(상국), 천자국(天子國) 등이었다. 즉, 대명제국이라는 정체불명의 호칭보다는 명나라, 대명, 천조, 상국 등으로 불렀어야 알맞은 표기인 것이다. 심플하게 황제, 대국, 명(明)이란 말을 썼으면 아무 문제도 안 됐을 텐데 괜히 있어보이려다가 고증을 어긴 느낌이 든다.
- 인조가 자신을 짐(朕)이라고 자칭하는 부분이 있다. 짐(朕)은 황제가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이다.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하였으므로, 조선 왕이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은 '과인'(寡人), 또는 ‘고’(孤)이다.
- 정명수가 상투를 틀고 나온다. 이미 청나라로 오래 전에 끌려가 청나라 사람이 된 터이니 변발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선 고증에 맞게 정명수가 변발로 나왔다.
6.3. 기존 사극과 비교점
- 기존의 호란과 관련됐던 사극(광해, 최종병기 활 등)에서 문제가 되던 지나친 중립 외교 찬양, 만물 친명원인설이 배제됐다. 광해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광해군이 친명이 아닌 것도 아니며 외교 실력이 탁월했던 것이지 중립외교론자는 아니었다.
- 보통의 사극에서 척화파라고 하면 민생과 동떨어진 세력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남한산성은 그렇지 않다. 최명길과 김상헌 두 사람 모두 충신이라는 걸 확실히 하고서 척화와 주화의 대립이 펼쳐진다. 도리어 척화파 김상헌은 백성들과 만나는 장면을 많이 넣어 민생을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주고 있는 반면에, 주화파 최명길은 백성들과 접점이 없고 인조와의 장면이 대다수다. 김상헌을 평면적인 고리타분한 꼰대로 묘사하지 않으려고 애쓴 듯한 전개다. 척화와 주화의 표면적인 모습만으로는 아무래도 주화의 현실주의적인 모습이 현대 관객들에게 더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척화파 역시 나름대로 백성을 위하며 노력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그 균형을 맞출 수 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대신 다른 관료들이 꼰대마냥 표현되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 인조가 기본적인 인품, 위엄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었다. 전형적인 암군으로 묘사되어 온 여타 매체에서의 인조 모습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점이다.[39] 하지만 극한 상황에서 혼란스러워 하거나 패닉에 빠지기도 하는 등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전쟁의 암울한 상황에서 왕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감정을 중립적으로 그려내었다. 원작자인 김훈 작가와 황동혁 감독 모두 시사회 기자회견에서 공통적인 인조를 "위대한 임금은 아니지만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통 받은 한 명의 나약한 개인."이라고 평가했다. 두 원작자가 인조를 바라보는 온정적인 시각이 영화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기존 사극과 비교해서 조총병과 궁병에 대한 고증이 극단적이다. 기존 사극이 조총병을 과도하게 무시했다면 이 영화는 궁병에 대한 고증을 극단적으로 무시하고 조총병을 강조하고 있다.
6.4. 실제 역사와 다른 점
- 전체적으로 남한산성 공성전 진행과 조선과 청나라와의 교섭 등이 매우 단순화되고 중요한 디테일도 대거 생략되었다. 예컨대 후금에 인질로 갔던 박난영이 가짜 왕제[40] 와 대신들을 데리고 청나라 진영을 방문했다가 용골대에게 참수된 일과 같은 임팩트 있는 일화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 김상헌이 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는 자결을 시도하다 제지를 받아 죽지 않고 척화파를 압송하라는 청의 요구에 따라 심양에 갔다가 소헌세자가 귀국할 때 돌아온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칼로 배를 찌르는데, 기록을 보면 김상헌은 목을 매었고 칼로 배를 찌른 것은 이조참판 정온이다. 한편 농성 도중 의견차로 마찰을 빚은 최명길은 당시 김상헌의 자결이 보여주기식 쇼라고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 김상헌 역의 김윤석이 김류 역의 송영창보다 젊게 나온다. 실제로는 김상헌이 김류보다 1살이 많다. 이건 우리나라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1980년대에 방영된 <조선왕조 500년>의 남한산성편 에서는 그나마 김상헌이 김류보다 나이 들게 나오는데 그나마 최근에 방영된 JTBC 드라마 꽃들의 전쟁 궁중 잔혹사를 보면 김류가 ~하시게 체로 김상헌을 하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뭐. 김상헌이 효종때가 되어서 좌의정이 된 지라 영의정을 여러번 지낸 김류가 하대 할수 있겠지만 하대는 둘째 치더라도 분장이 심하다. 김류는 나이에 맞게 6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김상헌은 좋게 봐야 50대 언저리다.
- 또 김자점 부대 말고는 근왕군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실제 역사를 보면 지방군들은 당연히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 것을 알고 다수가 구원에 나섰으나 청군에게 박살나거나 그밖의 사정으로 남한산성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이 청군에게 패한 대표적인 전투가 쌍령 전투다.[41]
- 소현세자 역할은 2001년생 배우 신기준이 맡았다. 따라서 영화 속의 소현세자도 앳된 소년으로만 보이며, 인조는 청나라 볼모 역을 자처하는 소현세자를 "아직 어린 세자를 적국 볼모로 보낼 수 없다"며 제지시킨다. 실제로는 호란 당시 소현세자는 25세의 장성한 청년이었다. 인조 역의 박해일이 동안이라 그 아들 역에 20대 배우를 캐스팅하면 부자 관계가 아니라 형제 관계로 느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렇게 한 듯 싶다.
- 홍이포의 위력이 매우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물론 홍이포는 당시 동양에서는 잘 쓰이지 않던 거대 화포였고, 포의 구경은 당시 조선의 가장 큰 화포인 천자총통보다 작지만 포신의 길이가 훨씬 길고 화약 소모량은 4배가 넘어서 화력은 훨씬 강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쇠뭉치를 날리는 전근대 대포라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폭발은 일으킬 수 없었다. 심지어 서양에서도 1870년 보불전쟁 이후에야 도입되는 주퇴복좌 기능까지 나온다. 물론 홍이포의 위력이 영화만큼은 아니더라도 남한산성 내의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릴 정도로 막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1월 24일 청군은 남한산성에 홍이포로 대규모 포격을 가하는데 그 결과 성첩이 여러 군데 무너졌으며 포탄이 행궁의 천장까지 뚫어버리고 바닥에 깊이 처박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 역사적 사실을 축약하느라, 인조가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성이 함락되면 모두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심' 정도로 단순화시켰다. 실제 역사에서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게 된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강화도가 함락되어 두 왕자와 원손(元孫)이 포로가 된 일이었다. 남한산성에 그 사실이 전해진 것이 1637년 1월 26일의 일이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인조는 그동안 극력거부하고 있던 출성을 약속하는 서신을 청태종에게 보내게 된다. 조선의 왕위 계승 순위 2, 3, 4순위자가 포로가 되었다는 부담감에, 난공불락인줄 알았던 강화도가 적에게 넘어갔으면 남한산성도 머지 않았다는 공포심이 인조를 출성으로 이끈 것이었다.[42] 그보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추위, 굶주림,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분노, 무엇보다도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실록은 그다지 성의있게 다루고 있지 않지만 승정원일기와 연려실기술에는 그러한 사정이 잘 나와 있다. 1월 22일에 "군사들의 마음이 이미 변해서 극단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軍情已變, 事將罔極]"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부터 조선 정부는 외부의 적과 맞서는 것보다 군사들을 달래는 데 진력하게 되었다. 1월 23일 남산산성의 수비군 수백 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다.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병조의 하급 관리를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인다.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보여 달라."며 야유를 보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보다 심각하다[今日軍情, 甚於外敵]"고 할 정도였으니,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 이시백이 무신으로 나온다. 이시백은 작중 내내 갑옷을 입고 청군을 상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하며, 심지어 최명길이 그의 앞에서 나도 그대처럼 무과에 응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등 완벽한 무인으로 묘사되었다. 실제 이시백이 수어사로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방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시백의 근본은 문신이었다.
- 김상헌과 최명길이라는 두 충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당시 남한산성에 같이 있던, 할복으로 굴욕에 항거한 이조참판 정온이나 자진하여 청나라 진영에 압송되는 척화신이 된 삼학사 등의 존재를 생략했다.
- 영화에서는 최명길이 조선에 문장가가 김상헌밖에 없겠냐며 화친을 반대했던 그 이름을 지켜달라고 청하는데, 실제 기록에 따르면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김상헌이 찢어 버리자 최명길이 이를 다시 주워모았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 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처럼 주워 모으는 자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최명길이 항서를 바치기 직전, 남한산성의 성벽이 무너지고 산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고, 최명길의 항서를 받고 청 태종이 공격을 중지하는데 이는 허구이다. 실제 남한산성 전투 내내 청군이 성벽 장악을 시도할 정도로 병력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현실에서는 농성 초기 무기력했던 조선군이 차츰 몰래 기어나와 청군을 기습하기까지 하자 적극적인 공성전을 줄이고 장기전을 시도한다.
6.4.1. 김류를 지나치게 깎아내렸다는 주장에 대하여
당시 김류 정도면 암만 박하게 봐준들 그냥 본인이 확고한 입장을 가지기 보단 원만한 선에서 중지를 모으는 것에 골몰하는 보수파적 인물 정도로 그리는 것이 가장 온당하며, 병자년 이전부터 도체찰사직을 맡아 수행하며, 주화론적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척화파가 주장하는 결전이 실제화 될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북변 방어 체제 구축에 상당한 성의로 임하는 등 합리적인 면모마저 보이는 인물이었으므로, 영화가 김상헌을 조선의 충신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김류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과하게 깎아내린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김류가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성 밖의 적군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냈고, 그 후에 아랫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다.
실록만 보면 알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찬 사서인 병자록(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에는 이와 같이 김류의 찌질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김류의 명령으로 장교가 아군을 베어 죽였던 것도 실화였다. 영화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사상자를 축소 보고하기까지 했다.○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 뿐이었다.
(중략)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병자록》 《잡기》
실록이 병자호란의 주요 전투들을 대체로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연려실기술이나 병자록·남한일기류의 각종 사찬 사서는 상세하게 기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병자호란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사찬 사서들도 중요한 1차 사료로서 취급한다. 그것이 그 사료들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뜻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영화가 김류를 깎아내리기 위해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닌 것이다.
관련 기록들을 김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실록과 교차 검증되는 부분만 인정한다고 해도, 김류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조선군이 큰 피해를 입었음은 사실로 볼 수밖에 없다. 위의 29일자 기사는 누구의 명령으로 출병을 이뤄졌는가를 명시하지 않고 김류가 후퇴를 명령한 사실만 강조하고 있어 패전에 대한 김류의 책임을 상당 부분 면책시키고 있으나, 연려실기술이 기록한 대로 출병을 명령한 주체가 체찰사 김류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이와 같이 바로 이튿날 기사에서, 인조가 병력 구성이 보병 위주임에도 고지의 이로움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간 실책을 김류에게 탓하고 있는 것이다.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지휘를 잘못하여 참패하였으니, 황공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보병과 기병의 형세는 현격하게 다른데, 경솔하게 평지에 내려갔으니 어떻게 패하지 않겠는가. 중원(中原)에는 평지에 내려갔을 경우 처벌하는 군율이 있는데, 이는 패몰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인조도 아는 병가의 이치를 야전에서 구르는 직업군인들이 모를 리가 없으므로, 성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장수들이 출병을 만류했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무리한 작전을 누구보다 꺼렸을 것은 당연히 병사들일 것이므로, 산성 수비군이 산에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 그러자 장교를 시켜서 사람들을 베어가며 사지로 몰았다는 기록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 일선 지휘관급만 8명이 전사했고 김류가 임금에게 잘못을 빌 정도의 대패였으므로 사상자가 300명이 넘었다는 기록 역시 허황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이에 대해 남한산성 포위 초기에 남한산성 수비군이 출성 전투에 적극적이었음을 드러내는 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기사들을 나열하며 김류가 성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병졸들을 억지로 재촉해서 떼로 죽게 만들었다는 위 병자록 기사가, 김류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던 나만갑의 왜곡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적과 싸우기를 자원한 병사들로 이뤄진 '자모군(自募軍)'의 활동 기록을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러한 기록들은 12월 24일까지에 그친다. 그런데 병자록에 나오는 남문 밖(실록에서는 북문 밖) 전투는 12월 29일에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 며칠만에 그렇게 돌변할 수 있냐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전쟁 진행 과정에서 태도를 완전히 뒤집은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위의 실제 역사와 다른 점 항목에 나오는 1월 27일 인조의 출성 고지만 살펴 봐도, 인조는 그 불과 며칠 전까지도 본인은커녕 세자의 출성 건의조차 "율로 다스렸던" 상황이었다. 저 포스팅을 참고해도 12월 25일과 29일에 청의 포위 병력이 상당히 증원되었으므로,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출성을 꺼리게 되었다고 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에 문제의 전투가 청 병력이 많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것으로 가정한다고 해도, 이는 김류에 대한 진정한 변호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병사들이 출전을 기피했다는 병자록의 기록이 과연 사실이었나 의심할 여지는 커질지 몰라도, 대군도 아닌 적에게 대패한 책임자의 무능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설령 위에 인용된 병자록 기사를 날조로 치부하더라도, 실록의 관련 기록까지 허위로 간주하지 않는 이상 12월 29일 남한산성 수비군이 야전에서 대패했으며 그 책임자가 체찰사 김류였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43]
이 전투 하나만으로도 병자호란의 김류는 까일 만 하다.
12월 14일, 인조는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개성 유수의 장계를 받고 강화도로 파천을 결심했으나, 한성부를 뜨려는 순간에 적군이 양철평,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적지를 바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김류는 기껏 들어온 요새에서 엉뚱하게도 다시 강화도로 옮겨 갈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적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경기도를 크게 가로질러 다른 피난지를 구하자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사#s-1.2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로 2차 몽진이 시도되었으나, 눈보라가 몰아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던 까닭에 결국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김류는 그 후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병조판서 이성구와 함께 강화도 행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물론 김류가 강화도에 꽂혀 있던 것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섬이라서 방어에 유리했고, 평야를 품고 있으니 군량도 넉넉했을 것이다. 멀리는 몽골 침입 때 가까이는 정묘호란 때도 북방 이민족에게 함락되지 않았던 전력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강도(江都)가 탐스럽게 보여도 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산성에 들어왔으면 거기서 버틸 생각을 하는 게 맞다. 굳이 또 이동을 하겠다면 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을 선택했어야지, 서북에서 내려온 적을 맞아 서북방으로 이동해서 강화도로 들어가자는 것은 어리석은 제안이었다.
12월 17일에는 인조에게 송고종의 고사를 들먹이며 최소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탈출하라는 도박을 제안하기도 했다. 본인도 그러한 계책은 만에 하나의 행운[萬一之幸]을 바라는 요행수임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김류는 전시 재상으로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든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가 가장 강조한 김류의 부정적인 면모는, 처음에는 무책임하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사세가 불리해지니 살고 싶어서 주화론으로 돌아서는 기회주의적 행태였다. 이것이 현대인의 일방적인 매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당대, 그러니까 병자호란 당시부터 김류는 그러한 인물로 세간에 비춰지고 있었다.
1637년 1월 22일부터 조선 정부는 청나라 측에서 요구한 척화신의 압송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그래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자, 누구를 보내야 하나, 보내서는 안 된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조정이 들끓었는데, 위의 상소는 압송을 반대한 의견 중 하나다. 이 상소에서 글쓴이는 척화신들을 적진에 보내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며, 똑같이 척화를 주장했음에도 중신들은 책임을 면하게 된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러면서 입에 올린 게 바로 김류의 이름이다. 얼마나 꼴 같지 않았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두고 죽여버리자는 극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하고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진실로 이 무리들을 베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끝내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에서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무너져 흩어질 염려가 있을 듯싶습니다. 신이 근일에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익숙히 보고 통분스러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 한마디 하려고 생각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무리들이 바야흐로 국사를 맡고 있어 말해도 무익할 뿐 분란만 초래할까 참으로 염려되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은인자중하며 감히 발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이미 끝장이 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에 한번 죽을 계획을 결심하고 어리석은 심정을 모두 진달하니, 전하께서 혹시라도 신이 무고하는 말을 한다고 여겨지시거든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 간교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소서. 신은 차라리 송(宋)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죽을지언정 차마 이 무리들과 함께 천지 사이에 서지는 못하겠습니다.
그 때 조선 조정에 척화에서 주화로 돌아선 인물이 한둘이었겠냐만은, 상소를 올린 유계가 언급한 실명이 김류 하나였던 걸 보면, 김류가 그런 면에서 뭔가 남달랐긴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김류는 이런 짓거리까지 했다.
일국의 재상으로서 동료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청나라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난 날 척화를 입에 올린 사람이라면 누가 강하게 주장했네 약하게 주장했네를 가리지 말고 전부 잡아 보내자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자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호란 당시에 대간(臺諫)들이 사사건건 태클 거는 것에 질렸는지, 내가 오랑캐를 배척하자 주장했으니 나를 묶어 가시오 하며 자수한 사람들과 함께, 특별히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의 관리들 전원을 지목하고 있다.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 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인조 시기 전반을 그렸다면 모를까, 남한산성 전투 시기만을 다룬 창작물에서 당시 조정의 대신 하나를 악역으로 삼자면 김류만한 자가 없었던 것이다.
6.4.2. 척화론의 실리적 성격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척화론이 단순한 명분론이 아니라 실리적인 면이 있었는데 영화에서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척화론의 근거가 선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탓에 관객이 척화론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있다. 척화론자들은 결코 명과의 의리와 같은 명분만을 놓고 척화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여진·거란 등의 유목민족들은 늘 급양 능력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군세를 끌어모은 후 기병의 빠른 발을 이용해 수도를 직격해서 적의 우두머리를 붙잡고 항복을 강요한 뒤 병참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군사를 물리는 속전속결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러므로 설사 남한산성의 성첩에 붙어 있는 대신과 왕이 전부 죽는다 하더라도, 항복 조약을 맺지 않고 적의 보급이 한계에 이를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전술적 패배는 있을지라도 전략적으로는 우리의 승리라는 것이 척화론의 근거였던 것이다. 대명 사대라는 명분은 조정의 이러한 주장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였을 뿐이다. 즉 척화론은 지도층이 전부 죽더라도 국가는 살아남아서 자주를 지켜야 한다는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현이었지 비현실적인 교조주의가 아니었다. [요약]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는 달리 병자호란 발발 전과 진행 과정에서 제기된 척화론은 철저히 교조주의적인 명분론 위주였다는 반박이 있다.
1636년 초까지 인조 정권은 내심 만주 왕조를 경멸하면서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계승했다는 평가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후금의 침략에 무력하게 무너진 전적이 있었으니, 다들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정에 척화론이 득세하고 외부적으로도 반청 기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636년 용골대의 입국 때부터다. 그때, 나중에 삼학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사헌부의 홍익한이 이런 상소를 올린다.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
우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소문이 나서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있으며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면서 한마음으로 사대하기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랑캐를 섬기며 편안함을 취해 겨우 보존하고 있습니다. 비록 세월을 연장해 가고 있으나, 조종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천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겠으며, 후세에 대해서는 어쩌겠습니까.
(중략)
그들이 맹약을 변경하고 흔단을 연 것은, 우리를 호통하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우리를 높여 천자로 삼았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시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가 보낸 사신을 죽이고 그 국서를 취하여 사신의 머리를 함에 담아 명나라 조정에 주문한 다음 형제의 약속을 배신한 것과 참람하게 천자의 호를 일컫는 것을 책하면서 예의의 중대함을 분명히 말하고 이웃 나라의 도리를 상세히 진술한다면, 우리의 설명이 더욱 펴지고 우리의 형세가 더욱 확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만일 신의 말을 망령되어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신의 머리를 참하여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결론은 후금 사신을 참수해서 그 머리를 명나라에 바치자는 거다. 척화의 근거는 대명 천자 타령, 소중화 타령, 사대 타령 뿐이지, 중원 왕조와 만주 왕조 사이의 전쟁은 명조의 승리로 끝날 테니 그 때에 대비해서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식의 실리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다.
홍익한만 이랬던 게 아니라 척화론을 주장하는 신료들은 하나같이 현실 감각이 마비된 자들이었다.
"오랑캐의 국서를 태우고 사신을 참해야 하며 그러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후세에 찬사를 받을 것"이라는 홍문관의 상소
"조선이 일어난 근본이 중국을 섬기는 데 있으니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천심을 거르는 것이요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는 홍문관 교리 조빈의 상소
"정묘년에 지긴 했지만 그 후로 싸운 적이 없으니 실제로 붙으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것"이라는 이조 참판 정온의 차자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척화하겠다는 '정론'이 바뀌었음이 슬퍼서 통곡하고 싶다"는 홍문관 교리 김익희, 부수찬 이상형의 차자
'실리적인 관점의 척화 주장'의 근거로 거론되는 사료는 이런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사(虜使)에게 증여하는 것과 변방에서 교역하는 것을 모두 토산물로써 하고 중국 물건을 파는 것을 일절 금하여서 뒤폐단을 막고 후환을 끊으면, 중국이 우리 나라의 기미책을 듣고 그 부득이한 사세를 알아서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나라가 중국 물건을 가지고 오랑캐와 호시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대노하여 절교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번 모 도독(毛都督)이 무고했던 말과 일치하니, 신은 조정이 무슨 말로 변명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설령 중국이 너그러워서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모의 나라에서 가져다가 원수인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의리에 비춰볼 때 어떠합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흉적은 가까워서 그 세력이 두렵고 중국은 관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부모의 자애를 믿고 공경하기를 태만히 하며, 도적의 침략만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김상헌이 후금과 교역할 때 우리 나라 물건은 팔아도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내비치고 있으니 척화론이 단순히 명분론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글은 명나라가 취할 수 있는 보복 행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막연히 배척[斥絶]을 우려하는 정도다. 실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김상헌이 중국 물건으로 교역하지 말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대국의 질책' 같은 것이 아니라 '천조(天朝)',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바르게 섬기는 '대의(大義)'였다. 중국이 뭐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당연히 안 하는 게 신하 나라로서의 도리란 거다.
'실리주의적인 척화론' 비스무레한 것은 역설적으로 척화론이 초래한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된 다음에 나온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위로는 지존이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래로는 60만이 넘는 백성들이 청의 포로로 끌려가는 되는 참화를 입게 되자, 비난의 화살이 전쟁 불사론을 펼치며 외적을 불러들인 척화파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 병조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일찍이 정사하는 자리에서 노하여 문관들을 질책하기를,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라 일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하였고, 참찬 정기업(鄭基業)이 그 말을 찬양하여 자못 기세가 당당하였다. 좌랑 남노성(南老星)이 나가서 처자를 찾다가 붙들려 그날 저녁에 진작 들어오지 못하니, 기광(基廣)이 노성을 끌어내었다. 대개 기광은 오랫동안 사류(士類)들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무장(武將)에게 붙어 거칠고 패려함이 이와 같았다. 구굉(具宏)이 팔뚝을 걷어 붙이고 큰 소리치기를, “윤황(尹煌)이 늘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서라도 쳐서 물리치겠다.’ 하였는데, 여덟 아들이 어디 있는가. 화친을 배척하기를 주창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만일 윤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크고 작은 무인들이 성을 지킨 공은 무장들이 이룬 것이고 오늘 성을 나온 것은 중흥과 같은 것이라 하면서 교만 방자하여 문사들을 노예와 같이 보니 사람들이 모두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그러니 척화파로서는 싸우자고 하다가 진짜로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서 형편없이 지고 말았지만, 대청 강경책 자체는 할 만했다는 식으로 자기방어 논리를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실질적인 이득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친명-반청 정책을 입안하기는 커녕, 대외 확장 정책을 펴고 있는 이웃 나라에 대해 적대하는 태도를 보인 정권으로서는 필수적인, 철저한 전쟁 준비조차 내팽개친 자들이었다.
사실 조선의 지배층이 실용적인 판단에 입각해서 대외 정책을 펴 나가고 위기에 임박해서는 실질적인 대비책을 세웠으리라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현대인의 시각'이다. 전근대인 특히 조선 중기 집권 사림 세력들의 정부 운영 기조는 그러한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는 그랬다.
인조 정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척화론에 대한 견해는 이렇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한 척화신의 억설로 마무리한다. 영화가 당시 조정을 '무의미한 명분론에 사로잡힌 무능한 자들'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 과연 안타까워 할 일일까?
김수현이 말했다. "낮은 백성들이 도륙을 당할지언정 주상께서 어떻게 성을 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壽賢曰, 下民雖爲魚肉, 自上豈可出城?
6.5. OST
본작의 OST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담당하였다.[44] ''' 그 정도의 네임벨류가 따르는 인물이라면 이에 관련하여 적극적인 홍보를 했어도 될 텐데 개봉시기 즈음에 이르러서야 공개한 것이 약간 의외라는 의견이 많았다. 한국 사물놀이의 대표라 불리는 국악인 김덕수 또한 OST에 감수로 참여했음이 크레딧을 통하여 드러났다.
본작이 호평받는 요소이기도 한데 사카모토 류이치가 마찬가지로 담당하였던, 같은 혹독한 겨울을 배경으로 한 레버넌트 OST가 연상이 되면서 해당 작품과 마찬가지로 음악이 상당히 장면과 매치가 잘되어 어우러졌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OST가 없는 장면이 상당수 있다 보니 음악에 대해서 미지근한 평을 내놓는 측도 일부 있기도 하다.
더불어 사카모토 류이치가 참여한 첫 한국 영화이다. 본 작 참여 이후로 piknic에서의 전시, 부산국제영화제 참여 등 친한적 행보가 더욱 두드러진다.
7. 평가
원작자인 김훈은 시사회에서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작가인 내가 작품 뒤에 감추어 둔 메시지를 감독이 끄집어 내 언어화하는 것을 보고 ‘들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마냥 립서비스로 던진 말은 아닌 듯하다. 이후 특별출연했던 썰전 242회차에서도 영화의 화면 연출을 칭찬했다.
대화만 해서 지루하다는 평이 있다. 전투신이나 포격신 와중에도 졸았다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 영화가 주로 성 안에 갇혀 굴욕적인 화친이지만 삶의 길을 가느냐, 굴욕적인 삶을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낫느냐는 2가지 의견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려내는데, 2시간 20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동안 흘러가고 원작의 건조한 상황 묘사가 오히려 상황의 비극성을 묵직하게 전달하는 것에 비해 영화 상에서는 효율적으로 묘사하지 못해 밋밋하다는 의견이다. 전쟁신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 밑에도 나와있지만 원작 소설 자체가 남한산성을 소재로 담담하게 얘기를 풀어내는 편이고 영화 역시 반전이나 자극적인 이야기, 액션신 등이 거의 없는 편이고, 당시 조정의 갈등과 최명길과 김상헌의 언쟁 위주이기에 오락 요소가 없기 때문인 듯 하다. 하지만 음악과 연기, 연출 등에 있어서 평이 전체적으로 좋은 편이다. 무기력함과 동시에 책임회피에 급급하고 민중에게 불합리를 강요하는 조정의 모습을 그려내어, 그간 대규모 예산의, 전쟁 또는 역사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에서 필수품 같았던 국뽕을 배제한 것은 신선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소설 원작에서 드러나는 조선의 암울한 상황을 계절이나 색감과 더불어 상당히 잘 표현해냈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성에 갇힌 채 죽어가는 조선군의 모습들, 그리고 가끔 희망이 보이다가도 금방 여지없이 짓밟히는 장면들이 더해지면서 어둡고 추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침내 청군이 대포를 쏘기 시작할 때는 작중 최명길이 경고한 "세상이 무너질 것입니다." 가 그대로 실현된다. 적병이라곤 성벽 쪽 빼면 하나 보이지 않는데 성내의 민가는 물론이고 임금 계시는 지엄하신 행궁까지 무너지면서 박살이 나버리는 장면을 보면 세상이 무너지는게 무엇인지 관객 입장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투가 종료된 후의 장면들도 의도적으로 인물의 모습과 무너진 건물들을 같은 화면 안에 잡는 연출로 처절함과 암울함을 묘사하였다. 당시의 처절함과 암울함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감독이 디졸브, 플래시 백 같은 영화 전환 효과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의 시점 역시도 조선측과 청측을 모두 비추기보다는, 철저하게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조선인들 위주로 극을 진행하여, 마치 관객들 역시도 함께 남한산성에 갇혀서 압박 받고 고민하도록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다.
국내 평론가들의 평은 좋은 편이다. 네이버 평론가 평점은 6점을 준 박평식[45] 을 빼면 모두 7점을 넘고, 8점을 준 평론가들이 많아서 7.5점을 기록하고 있다.[46] 이동진도 별 3개 반을 주면서 좋은 평가를 하였다. 해외 평가에서는 대체로 영화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평이 많다.
유독 밀덕, 역덕들의 반응이 좋다. 돌아다니는 평을 보면 'CJ가 역덕, 밀덕에게 통크게 기부해줬다'는 말이 나올 정도. 사학 교수, 저술가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호평이 많다. 기존의 사극 영화들에 비교해서 남한산성에 나오는 무기와 군제 등 세부적인 고증 수준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밀덕들이 남한산성의 조선군 조총병 묘사에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 사극 영화에서 조총병을 수준 높게 묘사한 작품은 2020년 기준으로 이 영화가 유일하다.
8. 흥행
8.1. 대한민국
손익분기점은 대략 500만 명이다. 여기에 광고비 등을 합친 가장 가혹한 손익분기점 예상치가 560만명. 전체적으로 영화의 평가는 좋은 편이지만 대중성은 다소 떨어지기 때문에 흥행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 많다. CJ의 배급 영화이면서도 한국 영화의 흥행 공식을 안 따라간 것에 대해서 놀란 사람들이 많다.
우선 첫 날 성적은 저렇게 호불호가 몹시 갈림에도 어쨌거나 선전한 편. 예매율 1위에서부터 시작하여 개봉 첫 날 444,478명(누적 관객수 473,396명)을 달성하며 박스 오피스 1위에 안착하며 지금껏 추석 오프닝 스코어 1위였던 《관상》(개봉 첫날 373,552명)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러고도 아직도 예매율 40%대를 유지하고 있으니 추석 연휴 때 잘만 입소문 타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면 흥행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 보인다.
CJ그룹에서 《군함도》의 처절한 실패에서 뭔가 교훈을 받았는지, CGV에 남한산성 스크린 싹쓸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킹스맨: 골든 서클》이 2주차임에도 IMAX, 4DX 등 특별관 전부를 석권하고(물론 남한산성은 IMAX, 4DX 버전이 없다) 일반관도 1-2개를 차지하면서 《남한산성》과 스크린을 나눠먹고 있으며 《범죄도시》 및 각종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스크린을 당당히 갈라먹고 있다. 개봉 전에는 100% 남한산성 스크린 싹쓸이 할 거라던 영화팬들은 '''우리 CJ가 달라졌어요'''라면서 다들 충격과 공포의 반응. 남한산성 스크린 수는 개봉 첫 날 1,124개 스크린으로 군함도 스크린 개수의 절반 수준이다.
2017년 10/4 기준 현재 예매율은 남한산성 41.2%, 킹스맨 22.4%, 아이 캔 스피크 15.7%, 범죄도시 9.5%, 딥 1.9%, 넛잡2 1.5% 등이다.
개봉 둘째 날까지는 총 1,024,121명이 보면서 이틀만에 100만 명을 갱신했다. 이 기록은 역대 추석 최고 흥행작인 《광해, 왕이 된 남자》, 《사도》의 개봉 4일째 돌파보다 이틀 앞선 것으로 역대 추석 영화 최단 기간 100만 돌파 신기록이다.
10월 7일까지 260만명이 관람하며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범죄도시》의 추격이 무섭다. 《남한산성》(-27%)를 비롯한 다른 영화들은 모두 전일 대비 관람객수가 감소했지만 《범죄도시》만 홀로 10% 증가한 관객을 동원하며 《킹스맨》을 제치고 2위에 안착, 1위 자리를 노리고 있다.
10월 8일에는 결국 《범죄도시》의 추격에 쫓겨 1위 수성에 실패했다. 확실시되던 300만 돌파도 아슬아슬하게 달성하지 못했다. 예매율은 비등비등한 상황이지만 흥행에는 빨간 불이 켜지고 말았다. 10월 9일에 300만을 넘기는 데 성공했지만 현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손익분기점은 달성할 것으로 보이나, 그 이상은 어렵다는 게 중론. '통닭인 줄 알았는데 백숙'이었다는 네이버 평으로도 대충 알 수 있듯이 추석에 보기에는 예상보다 무겁고 난해한 내용인지라 이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입소문이 부정적으로 흐른 듯.
10월 10일에는 《범죄도시》와의 격차가 많이 벌어지며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결국 손익분기점 돌파에는 실패했으나, 작품의 완성도가 높은 만큼 황해(영화)의 경우처럼 tv상영 등으로 어느 정도 손실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은 보인다.
혹자들이 말하길, 흥행의 실패 중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영화가 치욕적인 '패배'를 그대로 영화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8] 비록 한국 영화의 흥행 공식을 따라가지 않은 참신함 등 작품성은 좋았으나 결국 앞서 말했듯이 패배를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냈고 시종일관 암울하고 어두워 무거운 영화의 톤이 흥행을 이끌기에는 부족했다는 평.[49]
8.2. 북미
2017년 10월 6일 로스앤젤레스 지역권에선 개봉을 했다.
나머지 도시에선 2017년 10월 20일에 개봉.
2017년 10월 22일 기준으로 $138,486의 총수입을 기록했다. 링크
9. 여담
- 이 영화에서 인조 역을 맡은 박해일은 6년 전 동시대인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최종병기 활》에서 엄청난 활잡이 주인공인 남이 역을 맡았었다.[50] 칠복이 역의 이다윗은 남이 아역으로 출연했다.
- 최명길 역을 맡은 이병헌은 직전 시대를 다룬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군으로 출연했다. 두 영화에서 모두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역으로 출연한 셈.
- 남한산성의 제작자인 이든픽쳐스 김지연 대표는 원작자인 김훈 작가의 딸이다. 영화계에서는 명절을 겨냥한 대작으로 기획된 《남한산성》이 통상적인 흥행 공식을 따르기 보다는 원작의 깊이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 데에는 작가의 딸인 제작자의 영향도 컸으리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 영화의 흥행 여부가 앞으로의 한국 영화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관측하는 경우가 많았다.[51] 이 영화가 흥행할 경우, 한국 영화계의 고질병이라고 볼 수 있는 신파 등의 클리셰들이 빠져도 영화 자체를 잘 만들면 흥행이 된다는 풍조가 영화계에 스며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윤석도 웰메이드로 만들었는데 잘 안 된다면 다시 신파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며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달라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결국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고, 한국 영화판은 '신과 함께' 등 다시 신파로 흘러갔다.
- 주연 배우 4명 중 김윤석을 제외한 3명과 황동혁 감독이 직접 송파구에 위치한 삼전도비를 방문했다.
- 2017년 청룡영화상에서 택시운전사, 박열,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더 킹과 함께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하고 각본상 하나에 그쳤다. 물론 나쁘지 않은 성과다.
- 중국의 역사왜곡 교육을 받아온 중국인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영화라고 한다.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중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청은 중국의 역사로 취급하고 그런 청을 세운 만주족들은 만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북경식 표준중국어를 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분명히 중국이라고 알고있던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어가 아닌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를 쓰고 있다는 점부터 중국인들에게는 충격적. 게다가 작중에서의 조선은 '중국'인 청나라와 싸우고 있는데, 그러면서 내세우는 명분이 똑같은 '중국'인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니 하나의 중국 원칙만을 세뇌받던 중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중국을 돕자면서 중국과 싸우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