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스틸러스/역사
1. 개요
포항 스틸러스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포항 스틸러스의 뿌리, 대한중석 축구단
대한중석 축구단은 1956년에 창단된 '''대한민국 최초의 실업 축구단'''으로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 의해 196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1964년 12월, 군 출신이던 박태준이 대한중석[1] 사장으로 임명되어 강원도 영월 상동광산을 시찰하던 중 대한중석 축구단 선수들이자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었던 함흥철, 한홍기, 조윤옥, 김정석 등이 축구 훈련 시간 외에 광산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축구선수들이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여 주며 서울에 숙소를 만들어 체계적인 훈련을 하도록 했고 선수들에게 국내 최고 대우를 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이러한 관심과 지원 덕택에 대한중석 축구단은 1965년과 1966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2연패 하고, 1967년에는 초대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는 등 당시 한국 축구의 큰 축이 되었다.
하지만 1967년 박태준 명예회장이 포항제철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축구단에 대한 투자와 선수들의 인프라 개선은 또 다시 후퇴하였고, 1972년 1월 예전처럼 다시 회사업무 시간 외에만 축구 훈련을 허용하는 방침을 내리기에 이른다. 결국 선수들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관련기사
해체 1년후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자마자 박태준이 포항제철 축구단를 창단함에 따라 대한중석 축구단의 잔류 멤버와 스탭진, 양지 축구단이 해산되면서 예편한 이회택 등 신진 멤버가 합류해 1973년 4월 1일 포항제철 축구단을 창단하였다.
감독부터 코치, 선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멤버구성이 대한중석 축구단과 상동해, 대한중석 축구단을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3. 실업축구단 시절(1973~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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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명예회장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 돌봤던 대한중석 축구단 선수단을 받아들여 1973년 4월 1일 포항제철 축구단을 창단하였고 5월 2일 대한축구협회에 선수등록을 완료하며 공식적인 행보에 들어갔다. 초대 감독은 한홍기 감독이었고 이회택 등 13명이 창단 멤버였다.
1973년 7월 3일 준공식 기념일에 맞춰 포항제철 축구단이 일본의 신일본제철 축구단과 친선경기로 첫 경기를 치른다.[2]
창단시부터 해외클럽과 친선경기가 벌어질 경우 대구와 포항에서 번갈아 개최하며 연고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관련기사
창단 2년차인 1974년, 당시 최고의 전국 규모 축구 대회였던 제22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3] 에서 성균관대학교를 꺾고 첫 우승컵을 품에 안으며 창단 1년만에 실업축구의 강호로 떠올랐다. 이후에도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리그 우승, 198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리그 우승, 1982년 코리언리그(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 등 아마추어 축구계의 강자로 이름을 떨쳤다.
4. 프로리그 참여 이후(1983~현재)
4.1. 포항제철 돌핀스(1983~1984)
1983년 프로축구인 슈퍼리그가 창설되었고 1992년 실업축구리그였던 코리언리그 우승팀인 포항이 수퍼리그로 넘어와 팀 이름을 포항제철 돌고래로 변경하고 K리그 원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마스코트도 팀 명칭과 함께 돌고래로 변경하였다.
포항제철 기반의 축구단 답게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대구/경북으로 연고지를 배정 받게 되었다.
형식상 모든 구단들이 연고지를 배정받고 출범을 했지만 자신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고 상대 구단의 연고지를 방문해서 원정 경기를 치르는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이 아니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마산, 청주, 강릉 등 전국 여러 도시들을 모든 구단들이 방문하여 한 경기장에서 해당 라운드 경기들을 모두 소화하는 리그 경기 운영 시스템이었다.
1983년 당시에는 실업축구단이었고, 1984년 2월 프로화 하며 완전한 프로축구단으로 거듭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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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포항제철 아톰즈(1985~1994)
1985년 2월 7일 팀의 상징인 마스코트를 돌핀스에서 철인 아톰으로 변경하였다. 명목상 이유는 돌핀스가 회사 이미지를 부각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포항제철 전직원의 사기를 진작시키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팀 이름도 마스코트와 함께 포항제철 아톰즈로 바꾸고 12년 동안 팀을 이끌었던 한홍기 감독이 부단장으로 승격, 후임으로 최은택 감독이 선임되어 1986년 프로화 이후 첫 리그 우승을 맛보게 된다. 이후 최은택 감독이 한양대 교수직에 복직하고 이회택이 3대 감독으로 선임된다.
1987년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연고제(광역지역연고제)를 도입하여 모든 구단들이 연고지 내에서 홈경기를 개최하고 중립 도시에서의 경기를 최대한 줄이면서 지역 연고 정착을 위한 노력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지역연고제 실시 원년인 1987년, 포항제철은 광역연고(대구/경북)의 주연고지인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했지만 관련기사 이후 포항축구전용구장 건설 계획과 맞물려 확실한 연고 정착을 위해 1988년부터 포항으로 연고지를 축소하게 되었고, 1988년 2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이후 프로축구연맹에서 광역지역연고제의 문제점(광활한 지역으로 인해 연고 정착이 어렵고 이로 인한 흥행 실패)이 대두되며 1990년부터 단일 도시로 연고지를 한정하는 도시지역연고제로 전환하였다.
1990년 한국 최초의 전용경기장인 포항 스틸야드를 완공하여 1991년부터 홈 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홈 구장을 옮긴지 2년 만인 1992년 세번째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부산 대우 로얄즈에 이어서 2번째로 리그 3번째 우승을 달성하는 팀이 되었다.
4.3. 포항 아톰즈(1995~1996)
1995년에 포철에서 독립해 포항프로축구(주)[5] 로 출범한 후 팀명도 '포항 아톰즈'로 바꾸어 시민구단임을 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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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법인화를 기념하여 한 시즌 간 착용한 유니폼. 사진 좌측부터 황선홍, 홍명보, 라데
4.4. 포항 스틸러스(1997~현재)
1997년 구단측에서 향후에 '아톰'이라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불러 일으키는 온갖 법적문제[6] 때문에 기존 팀명과 마스코트를 변경해야만 하는 시점이 왔고, 공모전에서 구단 서포터즈 클럽명 에서 딴 '스틸러스'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90년대 중반 한국 축구의 강호로서 축구계를 호령했으나 주축 멤버(황선홍, 홍명보, 라데, 최문식, 박창현 등)들이 이적, 은퇴 등으로 떠나고 2000년대 중반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겪는다. 매년 4강,6강은 꼬박꼬박 들면서도 이때부터 이어진 FA 삽질기와 플레이오프에서 이어지는 불운(울산, 수원) 등으로 무려 '''15년 동안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FA컵 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에서 2연속 우승을 하는 등 리그에서만 암흑기라는 말이지 그 이외에는...
2003년에 법인명도 팀명과 동일하게 바꾼 후 2004년 K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2005년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포항 스틸러스에 부임, 2007년에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차례로 꺾으며 4번째 우승 컵을 들어올렸다. 포항으로서는 악연 많은 3인방(울산, 수원, 성남)을 모조리 꺾고 올라가서 15년 만에 우승 컵을 들어올리는 대감격을 누렸고 상대편 팀들은 '''"어떻게 리그 5위가 최종적으로 우승하냐! 이건 무효야!(...)"'''하면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7]
이후 2008년은 시즌 4위로 마치고 2007년 K리그 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AFC 챔피언스 리그(이하 ACL)에서도 조별 예선 탈락하는 불운을 겪지만, FA컵 우승으로 2009년 ACL에 참가한다.
2009년은 여러모로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즌이 되었는데, 경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경기를 보는 내내 질 것 같지 않았다. 정규 시즌을 2위로 마치고 2009 피스컵 코리아(컵 대회) 결승 2차전에선 당시 황선홍 감독이 팀을 맡고 있던 부산 아이파크를 5:1로 꺾고 우승, 결승에서 K리그 팀들을 매년 탈탈 털어먹던 강호 알 이티하드를 물리치고 11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팀'''이 되었다. 2개의 우승 컵을 들어올린 후 2위 자리에서 준플레이오프 승자를 기다렸지만, 2007년 악몽을 안겼던 성남 일화에게 플레이오프에서 0:1로 패배하면서 ACL 우승을 포함한 더블에는 실패했다.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2009년 UAE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에 참여하여 유럽의 FC 바르셀로나, 남미의 에스투디안테스에 이어 3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한다.
클럽 월드컵이 끝난 후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 돌연 사임하며 스틸러스 웨이를 이어갈 '''아름다운 축구'''를 하겠다는 새로운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고, 결국 계약기간 반도 못 채우고 5개월 만에 조기 경질되며 '''포항 역사상 최초로 경질된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또다시 암흑기로 들어가나 싶었지만, 2011년 구단 레전드 출신 황선홍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파리아스 감독이 다져놓은 공격축구의 기반아래 당시에 세계축구의 트랜드인 패스 축구를 점목하며 스틸타카라는 별칭도 얻게되며 강팀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다. 이후 유스팀 선수들을 활용하며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으로 꾸준히 상위권에 위치하며 좋은 모습을 보이다 구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는 '''K리그 30년 최초의 리그 + FA컵 더블'''을 달성한다.
최근들어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세르지오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시절을 지난 이후 줄곧 경험이 일천한 외부인이나 이미 한 번 실패했었던 감독을 데려오며 전술적으로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2016 시즌부터 성적이 중위권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꾸준히 출전해오던 ACL은 어느덧 시즌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버렸으며, 현실적으로 상위 스플릿 진출을 목표로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 시점에서 전통을 가진 명문 구단으로서 인정은 받지만 강팀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8]
2019년 도중 또다른 구단 레전드인 김기동을 통해 이제야 겨우 부활의 조짐을 서서히 보이고 있다.
[1] 現 대구텍.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다.[2] 당시 기술이 없었던 한국이 일본까지 넘어가 온갖 수모를 겪었던 것을 복수하기 위한 박태준 회장의 계획으로, 1차전 무승부, 2차전 2-1 승, 3차전 2-1 통쾌한 승리 마무리하며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3] 아마추어 성인 축구 대회로 1952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상반기에 개최되었다. 2009년을 끝으로 폐지.[4] K리그 초창기 1983~1986년 까지는 프로축구단과 실업축구단이 혼재된 형태였다.[5] 포철, 삼일, 우리프로덕션 등 포항지역 향토기업들이 출자함.[6] 세계저작권협약에 따르면 아톰은 1951년에 일본에서 창작된 캐릭터이며, 가입시점인 1987년 이전 것이기 때문에 마음껏 써왔으나, 1996년 한국이 베른협약에 가입한 터라 어엿한 저작권 보호대상이 된 거다.[7] 한편으로는 이 해에 열린 아시안컵에 우성용(당시 울산), 이운재(당시 수원), 김상식(당시 성남)이 음주 파동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정의구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수원과의 경기에서 서포터들은 '''운재야 술값은 누가 냈노!''' 라는 걸개를 걸다가 경찰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8] 강팀과 명문은 엄연히 구분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