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축구 행정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포항 스틸러스 감독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프로 출범 이전
1980년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였고, 1981년 광운대학교에 진학하였다.
2.1.2. 포항제철 아톰즈 (1983~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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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프로화된 포항제철로 입단하여 5시즌 동안 55경기 24골을 기록하였다. 이 시절 1986년 팀의 우승과 1985년과 1987년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1.3. 럭키금성 황소 (1988~1991)
1988년 럭키금성으로 이적한 후 3시즌동안 28경기 2골을 기록하였다. 럭키금성에서도 1989년 준우승과 1990년 우승을 경험하였다.
2.1.4. 포항제철 아톰즈 (1991~1992)
이후 1991년 포항제철로 복귀하여 16경기에 출장하였으나 골은 없었다. K리그 통산 9시즌 100경기 23득점 19도움. A매치 기록 95경기 30득점과 비교해보면 지금 상식으로는 정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리그 스탯이지만, 쌍팔년도 당시에 전국구 선수라면 저게 정상이었다. 프로팀은 대표선수 월급 주는 호구쯤으로 여기고 마구잡이로 차출해서 굴리던 시절이었으니(...)[3] .
2.1.5. 로데스 AF (1992)
1992년 프랑스 2부리그 로데스 AF로 이적하여 18경기 2골을 넣었고 프로생활을 마감하였다.
2.2. 대표 팀 경력
2.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79~1981)
2.2.1.1. 1979년 FIFA U-20 월드컵
최순호는 19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처음 청소년 국가대표로 데뷔하였다.
2.2.1.2. 1981년 FIFA U-20 월드컵
2년 후인 1981년 호주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2골 2도움의 MOM급의 활약을 벌여 이탈리아를 4:1로 이기는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
2.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0~1990)
2.2.2.1. 1980년 AFC 쿠웨이트 아시안컵
1980년 8월 23일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1980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만 18세의 나이로 '''7골을'''(!) 넣으며 역대 최연소 득점왕에 올랐고,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2.2.2.2.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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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로 나서서 조별 리그 3차전인 이탈리아 전에서 62분에 1:1이 되는 동점골을 넣었다.[4] 하지만 그 경기에서는 2:3으로 졌다.[5]
최순호 본인은 이때 당시 상당히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차범근이나 허정무도 있고 그들이랑도 같이 훈련해 봤다. 그리고 실제로 해외 팀과 경기해 봤을 때 예를 들어 친선 형식으로 온 프로팀과 한국 국가대표팀이 붙어보는 형식, 주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이 붙어보는 형식, 2진급 대표팀과 붙어보는 형식으로 경기해 봤을 때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우리가 밀리긴 하지만 월드컵 나가기만 한다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월드컵에 나갔을 때는 전혀 달랐고, 전에 외국 선수들과 붙었을 때는 통하던 기술이 안 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해외에 나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고 한다.
2.2.2.3. 1990년 FIFA 이탈리아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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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정용환과 함께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6] 이 대회에서 유일한 득점인 스페인 전 황보관의 시속 114킬로 대포알 프리킥을 톡 차서 어시스트(...)한 게 최순호. 나름 멸망 직전인 한국 국대 중 그나마 준수한 플레이를 했으나 기본적으로 이 대회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한국 월드컵 진출사에서 독보적으로 흑역사에 가까운 대회라...[7]
사실 월드컵 본선보다 본선 진출을 위한 아시아 예선에서 최순호의 활약은 눈부셨다. 1986년 한국의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을 확정지은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맹활약한 것도 최순호였으며 마치 2000년대 이후 안정환처럼 한국 국대의 중요한 장면은 대부분 그와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국대공헌도가 높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때는 이탈리아에 가야한다며 맏아들을 이름 대신 '로마'라고 부를 정도로 국대에 헌신했다(...)[8] 이회택-차범근-최순호-김주성으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의 에이스 계보의 한 명이다.
2.3. 기록
2.3.1. 포항제철 아톰즈
- K-리그 우승 1회 : 1986
- K-리그 준우승 2회 : 1985, 1987
2.3.2. 럭키금성 황소
- K-리그 우승 1회 : 1990
- K-리그 준우승 1회 : 1989
2.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준우승 : 1980
2.3.4. 통산 성적
2.3.4.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2.3.5. 주요 개인 수상
- 대한축구협회 고등학교 최우수선수상 수상 : 1979
- 체육훈장 백마장 : 1980
- AFC 아시안컵 득점왕 : 1980
-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 1981
- 대한축구협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 1984
-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84
- 체육훈장 거상장 : 1986
- 충북문화상 체육부문 수상 : 1989
2.3.5.1. 표로 보기
2.4. 플레이 스타일
한국 축구 선수로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가졌던 선수가 차범근이라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선수는 최순호다.
스트라이커 겸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최순호는 신체조건과 파워와 스피드, 축구 테크닉, 축구 지능 등 축구 선수가 갖추고 있어야 할 거의 모든 긍정적 요소를 모두 갖춘 아시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선수였다. 185㎝의 장신에도 몸이 유연하고 발재간도 뛰어났다. 또한 슈팅 역시 날카롭고 강력했으며, 시야가 넓어 패싱 능력도 일품이었다.[9]
특히 패스에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8경기에서 1골을 넣고 8골을 도운 것이 그것이다. 대표팀은 8경기에서 17골을 터뜨렸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인 9골이 모두 최순호의 발 끝에서 만들어진 것. 당시 대표팀에서 골 가뭄을 겪으며 부진을 겪고 있던 시기라 자신이 득점을 노리는 대신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패싱과 어시스트 위주의 경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가 8경기 8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 잘한다는 선수들이 모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어느 누구도 적시에 최순호에게 패스를 넣어주거나 최순호의 패스를 받을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지 못했다.
2.5. 해외 진출 관련
1981년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유벤투스 FC가 최순호를 주목했다. 당시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도 최순호가 맹활약하고 득점까지 기록하자 유벤투스가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 전의 활약까지 이어지자 유벤투스는 더욱 열심이었다. 구단의 스카우트 담당자들은 물론 구단 수뇌진까지 나서서 최순호를 잡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최순호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그가 출전하는 국제대회 현장에 구단 관계자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가 끝내 최순호를 영입하지 못한 이유는 병역법 때문이다. 당시 병역법에 의하면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는 '''국내에서 5년간''' 해당 분야에 종사해야 했다.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 우승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최순호는[10] 어쩔 수 없이 강제로 국내에 남아야 했다. 그리고 이 5년 제한이 풀린 이후엔 최순호는 유망주가 아니라 즉시전력감으로 가치를 보여주어야 할 나이였고, 자연히 유벤투스 측의 관심도 그전보단 미지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11] 최동원도 비록 종목은 다를지라도 적용되는 병역법 규정은 동일했기 때문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MLB에 진출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는 관련법령이 개정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경력도 인정해 준다. 그래서 기성용 등의 선수들이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고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J리그를 준비하던 일본 실업 리그에서도 거액으로 최순호를 스카우트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하여튼 최순호 본인은 이 당시, 유벤투스 행을 은근히 원했기에 무산된 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3. 지도자 경력
- 최순호/지도자 경력 문서 참조
4. 행정가 경력
강원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12년 FC 서울 미래기획단장으로 선임되었고 2013년부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대한축구협회 시절에도 잡음이 없던 것이 아닌게 자기 라인이자 과거 강원 FC 감독 시절 자신을 코치로서 보좌했던 김상호 감독에게 U-19 대표팀을 맡겼다가 2014년 대회에서 조별 예선 광탈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후, 포항 스틸러스 감독에서 경질되고 몇 달 후에 유스팀 총괄 기술이사로 임명되었다.
5. 선거 이력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고향 청주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으로 충북도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현역의원 상대로 처참한 격차로 낙선했던 흑역사가 있다. 거의 트리플 스코어(...)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인 것으로 보인다.[12]
6. 여담
현역 시절에 꽤나 훈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한준희 해설과 장지현 해설이 뽑은 역대 대한민국 베스트 11에서 두 해설 모두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최순호 감독을 선정했다
200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역대 공격수들에 대한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회택 -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지만 기량만은 타고난 천재형 스트라이커
차범근 - 타고난 기량에 노력을 더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비교 거부.
이태호 - 기술이 좋은 게 단점 아닌 단점. 단순하게 슈팅해야 할 상황도 어렵게 끌고 갔다. 그에게 골 넣는 기술이 조금 더 주어졌으면 정말 대단한 선수가 됐을 것.
김주성 -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윙포워드로 봐야 한다. 노력파다.
황선홍과 이동국 - 두 선수 모두 득점 감각이 뛰어난 스트라이커다. 골 감각은 이동국이 낫다고 생각한다. 황선홍은 의욕이 뛰어나다.
안정환 - 타고난 축구 센스와 슈팅력이 있다. 그러나 90분을 뛰기에는 체력이 부족한 느낌이다.
박주영 - 스피드가 부족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플레이의 기복도 없어야 한다. 10점 만점에 늘 8,9점을 찍어야 하는데 7점 이하로 떨어질 때가 있다.
우성용 - 현역 선수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순간 스피드가 부족하고 스타일이 밋밋해 경기를 뒤집지는 못한다.
조재진 - 특징이 없다. 최근 한국 축구대표팀 공격수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이 선수하면 뭘 잘하는 선수’라고 곧바로 생각이 나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재밌는 부분이 많은데 이동국의 경우 황선홍과 비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근성이나 의욕 면에서의 단점을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박주영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알 수 없고 요상한 기복 을 지목했다. 안정환도 특유의 체력 부족을 지적하기도 했고, 이회택도 기량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을 얘기하면서 부족한 자기관리를 은근히 까기도 한다. 차범근 한 명을 빼고는 이 전설적 공격수의 평가 기준에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여러 모로 뼈가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차범근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 유소년 축구교실을 개설했다.
아들 최원우도 축구 선수로 2007년 K리그 드래프트를 통해 경남 FC에 지목돼 프로 선수로 데뷔했으나 부상 등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7. 같이 보기
[1] 스트라이커[2] 시즌 도중 경질.[3] 최순호의 선수 생활은 전두환-노태우 재임시기였고, 소속팀 포철의 구단주는 여당 국회의원 박태준이었다. 29만원 각하께서 선수 출장시키라는데 거부할 수 있을리가 있나. 당시 위용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88올림픽에 프로선수들은 출장을 못한다고 해서 대학 졸업한 국대선수들이 프로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버렸을 정도였다[4] 이 골은 외국에서도 월드컵 역대 멋진 골을 선정하면 종종 순위권에 올라가는 환상적인 골이다. 실제로 영국 BBC 선정 멕시코 월드컵 최고의 골 베스트 20에서 박창선의 골(13위)과 함께 순위권(10위)에 올랐다.[5] 하지만 이 시기 최순호의 활약은 3년 전 청소년 대표팀 참사와 맞물려 이탈리아에 박두익 이후로 그 이름 석자가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이탈리아에서 그의 이름을 박두익과 함께 많이 안다고...[6] 벨기에와의 첫 경기에서는 정용환이 주장이었고, 스페인 전은 최순호가 주장이었다.[7] 심지어 의리축구 등으로 인해 '최악'이라 불리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뒀다.[8] 실제 최순호의 맏아들 이름은 최원영이다. 최로마에서 개명한 것이 아니고 집에서만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출처[9] 위에 올려진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우선 기본기가 튼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대 수비수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는 중에도 공중 볼을 트래핑한 다음에 패스를 하거나 볼을 간수해내는 능력은, 그것도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전 월드컵 대회 우승팀)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해내는 재능은 분명히 아시아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특히 환경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1980년대에 선수 생활을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일.[10] 당시에는 병역특례가 적용되는 범위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기에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 대회로도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11] 유벤투스뿐만이 아니라 포르투갈 보아비스타에서의 오퍼도 18살 때부터 왔었는데, 최순호 역시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고 병역 문제도 있어서 좀 그랬는데 월드컵에 나가보고 나서야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유럽팀은 당시 나이가 찬 아시아 선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며 아쉬워하고 있다.[12] 그러나 이를 속단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김영삼의 민주자유당과 지금의 국민의힘은 성향이 꽤 다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