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데 보그다노비치
1. 개요
세르비아(구 유고슬라비아 SFR)의 전 축구선수. 1988년부터 2004년까지 프로축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여러 팀을 거쳤고, 알 와흐다 FC 활동을 마지막으로 현역은퇴하였다.
신의손이라 불리던 발레리 사리체프와 함께 90년대 초 들어왔던 K리그 외국인 선수의 초기 대표적인 스타 플레이어로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포항 스틸러스에서 뛰면서 147경기 55골 35어시스트를 기록한 말그대로 한국 프로축구의 레전드인 외국인 선수다. 이후 포항을 거쳐간 외국인 선수들 중 라데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 선수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주로 황선홍, 박창현과 함께 투톱을 이뤘으며 그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2011년 한 인터뷰에서 황선홍 감독 역시 예나 지금이나 K리그에서 나와 라데를 뛰어넘는 공격 파트너는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사기적인 조합이었다.
2. 특징
- 김치를 잘먹었다고 한다. 다른 음식도 많은데 왜 굳이 먹냐는 질문에 "돈을 벌기위해 왔지만 그 나라에 대해 이해를 해야 제대로 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쉬운 식문화 적응부터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남다른 프로 의식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열악한 K리그의 환경[1] 에서 오히려 인내심과 인생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라데의 외조카인 블라디미르 요반치치가 2012년 성남의 용병으로 왔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고 먹튀 취급을 받았다. 이걸 두고 친정팀의 옛 라이벌에게 빅엿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근데 딱히 라데가 추천한 것도 아니고, 요반치치는 아들도 손자도 아니고 조카다. 결국 선수를 잘못 보고 뽑은 성남 스태프의 자업자득.
3.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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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러스의 No.10 라데
포항과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를 거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으며 그 뒤에도 NAC 브레다[2] , 베르더 브레멘에서 뛰었다. 특히나 94년과 95년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1994년에 안양 LG 치타스를 상대로 2번이나 4골을 작렬했으며, 1995년엔 팀을 결승전 까지 이끌었다. K리그 역사에 회자되던 명경기인 일화와의 2차전에서 황선홍의 2골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내리 3골을 먹혀 이대로 우승컵을 놓치나 싶을때 후반 45분 극장골로 승부를 3차전까지 끌고 가며 우승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최고의 존재감을 뽐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시즌동안 K리그 통산 120경기에 나와 45골을 넣었고, 연계플레이 또한 훌륭해서 1996년 리그 도움왕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97년 일본으로 넘어가 한시즌동안 리그 8골, 리그컵 8골로 16골을 폭격하며 다시한번 클라스를 입증했다.
결국 그는 97년 여름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는데 성공하며 K리그를 거쳐서 빅리그로 이적한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비록 J리그까지 거친 것이라 해도 대단한 기록이라 할수 있다. 유럽으로 이적한 후에도 인터뷰에서 "한국은 날 키워주었다"라고 인터뷰하는 등 호감 이미지를 보여줬다. 유럽에서의 활약 또한 나쁘지 않았는데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팀 레전드 키코가 버티던 공격진에서 제한적으로 기회를 받은것에 비해 준수한 기록인 14경기 6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주전출장에 대한 욕구로 98년 겨울 네덜란드 NAC 브레다로 임대이적한다. 여기서 반 시즌동안 13경기 6골을 기록하며 가치를 증명한 그는 시즌 종료 후 130만 유로의 이적료에 분데스리가 명문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한다. 첫 시즌 8골을 넣으며 괜찮은 출발을 했지만, 이후 클라우디오 피사로, 아일톤 곤칼베스 다 실바에게 밀려 역시 백업, 교체요원으로 밀렸고 그러는 와중에도 2년간 리그 7골을 잡아낸다. 이후 2002년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로 이적해 1시즌을 뛴 뒤 2003년 아랍에미리트 알 와흐다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내고 2004년 은퇴한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유난히 한국 선수들과의 인연이 잦았다. 1998년 네덜란드 NAC 브레다에선 비슷한 시기 같이 입단한 노정윤과 호흡을 맞추었고, 2000년 초 베르더 브레멘에서 뛸 때에는 이동국이 임대로 팀에 합류하며 동료이자 포지션 경쟁자로 같이 뛰기도 했다. 주전경쟁과는 별개로 둘 다 포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또한 2002년 이적한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선 차두리의 분데스리가 데뷔전의 교체 파트너로 아웃되는 경험도 하는 등 유럽 가는 곳마다 같은 팀에 한국선수들이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선수층이 매우 두터운 유고슬라비아 국적이라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7년 라리가 입성 직후 대한민국에서 열린 1997 코리아컵 대회에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처음 뽑혀 3경기에 나와 가나전에 2골을 넣는다. 그러나 이후에는 국가대표팀에 불리지 못했다. 따라서 A매치 경력은 3경기 2골.
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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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도리를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골 셀러브레이션 흔히 말하는 마스크맨 세레모니로 유명하다.[3] 2013년 포항 스틸러스 창단 4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으며 포항 스틸러스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친선경기인 포항 스틸러스 40주년 레전드 매치에서도 골을 기록하면서 추억의 마스크맨 세레머니를 다시 한번 시전했고, 역시나 규정대로 경고를 먹었다.
한국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조금 말라보이는 얼굴에 대단한 미남으로 인기가 높았었다.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달리 대단히 예의 바르고 멋진 외모까지 가져서 그 둘의 상승효과로 인한 팬들의 버프가 대단했었다.
남아공 월드컵 직전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 관전와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했다. #
은퇴 후엔 고향인 보스니아로 돌아가 코치를 하다가 2013년 현재는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포항을 잊지못했는지 건설업체 이름이 '''포스코 치치'''로 지었을 정도이다.
5. 평가
2009년 축구잡지 BEST ELEVEN에서 황금발[4] 회원들이 뽑은 '''역대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용병'''으로 뽑혔다. 참고로 2위는 샤샤, 3위는 신의손, 4위는 피아퐁, 5위는 모따. 왠지 모따의 평가가 박한 것 같지만, 모따는 당시 커리어 진행중이었고 특히 위에 언급한 이들은 단순한 스탯상 우위가 아닌 당대의 K리그 헤게모니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무리뉴나 펩이 아무리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려도 토탈 풋볼의 아버지 리누스 미헬스나 압박축구의 창시자 아리고 사키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 41화 1부 2012 K리그 결산에서는 두 해설위원 모두 "공격 포인트로만 따지면 2012시즌까지 6시즌동안 데얀 다미아노비치[5] 이 앞설지 모르지만 '''수비수[6] , 미드필더, 공격까지 모든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당시 K리그에 주었던 임팩트를 생각하면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1위는 라데다"'''라고 평했다. 두 해설위원이 꼽은 최고의 외국인 선수 1위는 라데였고, 2위는 데얀, 3위는 성남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사샤 드라쿨리치.
즉 선수출신이나 해설가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공격수. 소속 팀에 우승컵을 밥먹듯이 안겨 우승청부사란 별명을 얻은 K리그의 레전설 공격수 샤샤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