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1937)

 

'''이강석
李康石
'''
[image]
맨 왼쪽부터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출생'''
1937년 2월 5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60년 4월 28일[1]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부모'''
아버지 이기붕(생부)·이승만(양부)
어머니 박마리아(생부)·프란체스카 도너(양모)
'''형제자매'''
누나 이강희,[2] 동생 이강욱
'''학력'''
경기중학교 (중퇴)
서울대학교 (법학 / 중퇴)
육군보병학교 (졸업)
'''임관'''
갑종간부후보생
'''최종 계급'''
소위 (대한민국 육군)
1. 개요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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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공화국의 국회의장 이기붕박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말년에 이승만양자로 입적된 사람[3].

2. 상세


이승만 前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도너와 재혼하기 전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어릴 때 병으로 사망했고[4],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기붕과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씨[5] 같은 정당의 정치가로서 친분이 있었으므로,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s-1되었다. 사실 이 입양은 법적으로는 무효였다.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6] 세간에서는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 한다고 말이 많았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민의원의장 이기붕의 아들이었으니 이강석의 권력이 컸을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으나,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여 결국 중퇴하였고, 육군사관학교에 재입학 하였으나 관절염 때문에 중퇴 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의 권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이강석이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난동을 부린 적이 많았는데도 보도 한 번 안 되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법정 공판이 열렸을 때는 이승만 정권에 진저리를 내던 대중들이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법정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차서 의자가 부서졌고, 심지어 판사 전용 출입문에까지 방청객들이 들어차서 판사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다 법복이 찢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조롱한 피의자 강성병의 진술에 방청석이 환호했다는 후문도 있다.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하고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신도 자살했다.[7]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쏘았다는 뜻인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하여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가 죽기 전에 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했던 상태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전부터 사는 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던 적이 있으므로 수면제 치사량을 복용하고 먼저 자살했고, 나중에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보기도 한다. 총 한 자루만 사용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타살론이라는 루머가 퍼진 이유는 뜬금없게도 도조 히데키 때문이다(...). 이유는 도조가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쐈는데 이게 실패[8]한 것. 사실 도조는 콜트 22 같은 소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다. 그런데 이게 와전되어 "자살 목적으로 가슴을 쏘면 실패한다."라는 속설이 퍼지고 이에 더해 "이강석이 가슴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타살이다."라는 말이 퍼지면서 타살론이 제기 된 것이었다.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에서 이환경#s-1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생각나게 하는 최후로, 권력을 잃은 자의 말로는 한결같다는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한동안 이강석이 친부모와 양부모를 부끄럽게 여겨서 친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식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2.1. 가짜 이강석 사건



경상북도 출신의 강성병이라는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하여 향응 접대를 받고 무전취식 등을 한 사건.

2.2. 창작물에서


길용우는 이강석이 말을 타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처음 승마를 배웠는데 이후 여러 사극에 출연하면서 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2.2.1. 야인시대


이승만 정권 12년의 종말, 그리고 그 2인자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그것은 인생무상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유당 2인자로서 권세와 영화를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이 일족의 비참한 죽음을 과연 누가 생각인들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비참한 죽음에는 또 다른 일설도 없지는 않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즉 당시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하야한 대통령을 위해 국민여론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인하는 일은 현대 사가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질 뿐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든, 제1공화국 정부와 자유당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122화에서 나온 극중 나레이션의 대사


학생 시절 동생인 이강욱과 함께 귀가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새해가 되어 이승만에게 이기붕 일가가 새해 인사들 하는 장면에서 이승만의 마음에 들어 이강석을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 이기붕은 갑자기 이야기를 들어 혼란한 와중에도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일 것을 권유하나 이승만은 이강석을 말한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없는 얘기로 하자며 화를 냈고, 이기붕은 마지못해 이를 승낙한다.
작중 서울대 입학 관련 사건도, 가짜 이강석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양자로 들어간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싶다가, 이승만이 최인규를 질책하던 장면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땐 육군 소위가 되어 있었다. 4.19 혁명 직후 독기를 품으며 권총에 탄환을 하나 하나 집어넣으며 자기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결심한 후, 결국 권총으로 가족들 모두를 사살하고 자신도 그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앞서 서술된 바 대로 이강석에 대한 에피소드가 다수 생략되다 보니, '권력을 등에 업고 날뛴 망나니' 보다는 '이래저래 휘둘리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온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인물'로 묘사된다. 무풍지대에 나왔던 타살설도 여기서 한 번 더 거론된다. 이강석이 가족을 사살하는 씬은 드라마 원작에서는 비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지만, 개그 영상에서는 이승만의 방귀 앞에 가족 전체가 집단 질식사하는 식으로 합성된다. 총을 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인지 누군가를 고자로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의사양반의 합성용(의사가 직접 총으로 저격하는 것)으로도 쓰였다.
[1] 1960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의 이기붕 일가 자살 기사에 이강석의 당시 나이를 24세로 표기했다.[2] 중학생 때 요절.[3] 입적 이후 영식 강석 소위로 호칭되었다. 당대 대한뉴스에서 확인 가능.[4] 친아들 이름은 이봉수이며 7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고 한다. 출처 - 연합뉴스 (2015.10.08.) : <역사속 오늘> 25살 연상의 이승만을 사랑한 '호주댁'[5] 두 사람은 모두 조선 태종의 후손으로 35촌 간이다.(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 이기붕효령대군의 18대손)[6] 의용민법 제111조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 조항은 이후 민법이 제정되면서 제875조(직계장남자의 입양금지)에 규정되었다가 1990년에 민법 개정으로 삭제되었다.[7] 가짜 이강석 사건의 범인 강성병도 징역 10개월을 살고 나온 후 1963년, 대구광역시의 한 여관에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8] 다만, 쇼였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