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7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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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명문가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바이에른의 선제후이며 후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한 야심가. 본명은 카를 알브레히트(1697. 8. 6~1745. 1. 20).
2. 생애
독일 남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엠마누엘(1662년 ~ 1726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폴란드 국왕 얀 3세의 딸이었으므로 그에게는 일단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 상속권을 주장할 혈연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카를 알브레히트를 요제프 1세의 딸과 결혼시킨다. 본래 아버지의 전처인 마리아 안토니아(1669년 ~ 1692년)가 낳은 장남 요제프 페르디난트(1692년 ~ 1699년)가 바이에른 선제후를 물려받고, 한때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가 되려 했으나[1] 불과 7살에 사망하여 카를 알브레히트가 선제후를 상속받았다.
막바지에 접어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고, 1726년 부친이 죽은 뒤 선제후 자리에 올랐으며, 카를 6세의 요구를 받아들여 살리카법을 부정하는 오스트리아의 국사조칙을 승인했다.[2] 이렇게만 보면 그냥 평범하게 나라를 다스리다 죽었을 사람이지만…
1740년,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령을 승계하자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야심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카를 6세의 말년 오스트리아가 대외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로 무능했기에 그는 여건만 되면 바로 들고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로이센과 그 국왕인 희대의 먼치킨이 먼저 국사조칙을 거부하며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이에 자극받았다.
그는 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1741년 합스부르크 영지의 상속권을 요구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여기에는 뒷사정이 있는데, 바이에른의 법률가들은 국사조칙의 허점을 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주장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조약을 발굴해냈다. 1546년 바이에른 선제후 알브레히트가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안나 공주와 결혼할 때 있었던 계약인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경우 '''비텔스바흐 가문이 오스트리아의 상속권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사문화된 조약이었지만 이것으로 우기기를 통해 국사조칙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덤으로 아내인 마리아 아말리아가 요제프 1세의 딸이기도 했는데, 요제프 1세의 첫째 딸은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에게 시집을 갔기에 동서지간에 짝짜꿍쳐서 오스트리아 영토 중 절반은 카를이, 나머지 절반은 작센이 갈라먹기로 멋대로 합의를 했다. 물론 프랑스가 먹기로 한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벨기에) 프로이센이 주장한 슐레지엔을 제외하고서였다.
전쟁 선포 직후 오스트리아와 적대하던 프로이센, 프랑스, 스페인[3] 으로부터 합스부르크 상속 권리를 인정받았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로서는 강력한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에 흡수된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고, 이 기회에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어느 정도 뜯어내 약화시키고 나서 오스트리아보다 만만하고 약한 바이에른을 조종해 단물을 빼먹을 작정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동맹군을 이뤄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
초반에는 선전했다. 1741년에는 그동안 합스부르크 지배에 신물이 난 체코 귀족들이 합세해 보헤미아 왕위[4] 를 갖다 바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배신을 때리고 여계 승계에 부정적인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도 카를에게 줄을 서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위는 위태로워보였다. 1742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선거를 열고 친동생 쾰른 선제후(쾰른 대주교)와 자신의 두 표(바이에른 선제후와 보헤미아 왕)를 포함, 만장일치로 당선되고[5] 대관식까지 열었지만 그 시각 자신의 영지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에 털리고 있었다. 큰 원인은 "프로이센이 알아서 잘 조져주겠지" 안심하고 대관식하러 자기 병력들을 멀리 프랑크푸르트까지 데려와서였다.
오스트리아는 희대의 먼치킨에게 개관광당하자 슐레지엔을 떼어주마 하며 서로 비밀리에 강화하고 화력을 바이에른 및 프랑스 군에 집중해 연전연승을 올렸다. 결국 바이에른-프랑스 연합군은 괜히 보헤미아 지방까지 침공했다가 역관광당해 오히려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을 오스트리아에게 점령당하고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지에까지 몰렸다. 프랑스 군의 도움으로 1744년 다시 바이에른을 일시 탈환하나[6] 이미 통풍이 심해서 몸은 만신창이 신세였고 후계자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와의 강화를 원했다.
결국 그는 대관식 후 '''단 하루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통치할 제국을 잃었다'''. 프랑스 지원군에 의존해 제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다가 1745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바이에른 선제후 후계자인 막시말리안은 오스트리아와 타협했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슐레지엔을 얻고 강화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얻은 것 없이 돈만 쓰고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3. 후손
그의 딸 중 한 명인 마리아 요제파는 원수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요제프 2세의 두 번째 황후가 된다. 그러나 요제프 2세는 마리아 요제파를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싫어했고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1남 5녀를 두었는데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 막시밀리안은 자손을 남기지 못 해 1777년 사망,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은 단절되고 먼 친척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뒤를 잇는다. 이 때문에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터진다.
[1] 이때 살아있더라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다만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인 만큼 신성로마제국 측의 입지가 유리해지겠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 7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2] 국사조칙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와 상관이 없다. 여자는 아예 피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선제후나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항목에서도 예전에는 이것을 매우 헷갈려서 잘못 서술한 적이 있을 정도. 애초에 번역을 '''오스트리아''' 왕위(실은 대공위) 계승이라고 하지 신성 로마 황제 계승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자.[3] 스페인은 이 시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단절되고 부르봉 왕가로 교체된다. 그 후 프랑스와 동맹이었다.[4] 30년 전쟁 때도 합스부르크에 반기를 들고 신교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체코귀족들이 알아서 보헤미아 왕위(황제 투표 권한인 선제후이기도 하다)를 바친 전력도 있고, 중심지 프라하는 빈에 이어 합스부르크 영지 중 2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헝가리보다 못한 대우와 자치 수준이라 세금만 받아먹는 합스부르크에 반감이 컸다. 이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말기 시절에 이르러 더 심해진다.[5] 영국 국왕이지만 하노버 선제후이기도 한 조지 2세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이라 불참[6] 1743년 조지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대륙에 상륙하자 프리드리히 2세가 다시 비밀강화를 깨고 바이에른-프랑스 편으로 참전한 여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