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스 1세
1. 개요
아이아키다이(Aeacidae) 왕조에 속하며, 발칸 반도 서쪽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이자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로도 유명한 인물.
아이아키데스의 아들[1][2] 로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에페이로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진력했으며, 마케도니아 왕 데메트리우스 1세와 전쟁을 벌여 마케도니아와 북부 테살리아를 빼앗았으나 리시마코스에게 격퇴당했고 이후 벌어지는 피로스 전쟁에서 여러 차례 로마군을 격파했다.
2. 생애
어려서 일리리아의 타우란티에서 부족장 글라우키아스의 손에 자랐으며, 13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뒤 추방되어 아테네로 피신했고 데메트리우스 1세를 따라 입소스 전투에 참여했지만 데메트리우스 1세가 패하면서 몰락하자 알렉산드리아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때 첫 번째 부인인 안티고네를 아내로 맞으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지원을 받아 네오프톨레무스 2세를 쫓아내고 복위한다.
이후 에페이로스를 헬레니즘적 군주국으로 경영하며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기원전 295년에는 아가토클레스의 딸인 라나사와 결혼해 시라쿠사와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코르키라 섬을 얻고 마케도니아 왕가의 내분을 틈타 서부 그리스에서의 영토 확장을 기도해 암브라키아, 아카마니아, 암필로키아 등을 얻었다. 기원전 291년에는 라나사와 이혼하고 라나사가 마케도니아의 왕 데메트리우스 1세와 결혼하면서 코르키라 섬이 데메트리우스 1세에게 넘어가자 마케도니아를 공격해 마케도니아와 북부 테살리아를 점령하고 아이톨리아,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지만 기원전 284년에 리시마코스에게 격퇴당했다.
기원전 280년에는 타렌툼을 구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나 헤라클레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279년에 아스쿨룸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군을 추격했으며, 기원전 276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다음해 베네벤툼에서 고전하다 로마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에페이로스로 귀국했다. 자세한 사항은 피로스 전쟁 항목 참고.
기원전 273년, 마케도니아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로 원정을 갔다가 클레오니모스의 요청에 따라 스파르타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뒤 아르고스에서 아리스테아스, 아리스티푸스간의 다툼에 아리스테아스 측으로 참전했다. 이 때 아리스티푸스 측으로 참전한 마케도니아의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맞섰는데, 아르고스에서는 자신들의 땅이 폐허가 될 것을 우려해 다른 곳에서 전투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고나타스가 다른 곳으로 물러나자 피로스는 그 틈을 타서 아르고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성문이 작아 코끼리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르고스인들이 저항하면서 고나타스에게 도움을 요청해 고나타스, 크레타에서 귀국한 스파르타의 왕 아레우스 1세의 협공을 받았다. 이들의 군사가 많은 것을 본 피로스는 성벽을 부수고 퇴각하려 했지만 전령이 아들 헬레누스에게 말을 잘못 전달해서 헬레누스의 군대는 성 안으로 진격하고 피로스의 군대는 성 밖으로 나가려다 뒤엉켜 부대에 혼란이 일어났다.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후 에페이로스의 왕위는 차남인 알렉산드로스 2세가 계승하였다.[3]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스파르타군을 치던 도중 피로스에게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한(상대편 병사로 참전했다) '''어머니가 지붕 위에서 던진 기왓장에 헤드샷을 당해''' 부상을 입어 말에서 낙마 했으며, 안티고노스의 병사인 조피로스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그러나 암살당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3. 평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로 가장 뛰어난 전술가이자 야전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다. 한니발 바르카는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 다음으로 뛰어난 명장이라고 평했으며 한니발 본인을 3위로 올렸다. 당대 명사들의 영웅담을 기록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술의 귀재라고 하고 본인이 저술한 전기나 전술서등도 당대와 후대 전술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본인이 적은 전기나 전술서 등이 없다.즉, '''소실된 기록들이 많다.''' 이 때문인지 실제로 이러한 활약상이 세세한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즉,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활약했는데도 남은 기록은 오히려 훨씬 더 적다.'''"피로스는 주사위를 던질 줄은 알지만 그 주사위를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 같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한니발은 그가 최초로 숙영지의 중요성을 자각한 장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적혀 있는 부분들에도 보급 부족 때문에 고생은 했어도 숙영지 자체로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4]
그러나 정치적 안목이나 전략적 식견은 좀 모자라서 적수[5] 를 너무 많이 만들었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원정에서는 그나마 있던 동맹들도 배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6] 결국 여러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목표였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는 이루지 못하였다.
4. 여담
- 당대에는 흔치않은 용맹과 과감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실제 그의 행보는 지장보단 몸소 앞에 나가 적의 사기를 꺾는 강력한 무장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가 어떤 면에서 전술적으로 뛰어났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 로마와 전쟁을 할 당시 에피소드로 다음의 내용이 있다. 당시 피로스의 주치의는 불만을 품고 피로스를 배반해서[7] , 포로 협상을 위해서 온 집정관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키누스(Gaius Fabricius Luscinus)[8] 에게 피로스의 독살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가이우스는 피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피로스는 가이우스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측근 자리를 주겠노라며 자기편으로 회유하려 하였지만, 가이우스가 답하길 그쪽에 가면 당신의 측근들이 당신을 버리고 나를 왕으로 옹립할거요라고 응수하였다(...). 이 대담함과 고결함에 두손 다든 피로스는 로마군 포로 600여 명을 석방해 주었다. 덧붙여 로마는 로마대로 질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똑같이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 이 로마군 포로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위의 독살 기도 사건이 벌어지기 전 피로스와 로마군은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시도했다. 이때 상호 협의에 따라 잠시 로마군 포로를 로마 측에 귀환시켰다. 만약 협상이 결렬될 경우 로마 측에서는 이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 포로들은 로마 진영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났고, 결국 협상이 결렬[9][10] 되자 한 명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피로스 진영으로 돌아갔다.[11]
-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따르면, 피로스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어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면, 그가 엄지발가락으로 우울증 환자를 쓰다듬으면 즉시 환자가 완쾌했으며(!), 피로스가 죽었을 때, 그 시신을 화장했는데 오른쪽 엄지발가락만은 무슨 수를 써서도 태울 수 없어 작은 함에 담겨 한 신전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 유명한 일화로는 에피이로스 왕국의 키네아스가 로마와 전쟁하러 가는 피로스에게 로마를 정복하면 좋은 것과 정복한 다음 등을 묻고 피로스는 자신의 원대한 원정 계획,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 비견되는 서방원정 이야기를 했다가 서방과 그리스 권 국가들 다 정복하고 난 다음에 편안히 지낼거라고 하자, 키네아스가 지금 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이야기 했다. 피로스도 이 대답에 감탄했지만 그래도 가기로 했다고 한다.[12]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전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아네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아네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아네스는 말했다.
>"전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13]
>"전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아네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아네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아네스는 말했다.
>"전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13]
[1] 계보를 올라가면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피엘로스가 조상이라고 한다. 즉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후손인 셈.[2] 참고로 피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6촌 동생뻘 되는 먼 친척 관계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에페이로스 왕족 출신. 이쪽도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의 후손임을 주장했다.[3] 피로스의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도 피로스와 함께 전사했고 포로가 된 삼남 헬레누스는 안티고노스에 의해 석방되어 에페이로스로 귀국했다.[4] 이게 대단한 게 자신은 전혀 모르는 타지에 원정을 갔는데 단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알렉산드로스조차 숙영문제와 타지를 원정갔을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가 간 곳은 당시 그리스권 국가들이 거의 생면부지나 다름 없는 곳이니 차이가 있긴 있다.[5] 로마, 카르타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시칠리아 섬의 도시들 등. 로마의 경우야 어쩔수 없다고 해도 다른 것들 특히 시칠리아 섬의 경우는 빼도 박도 못한 피로스의 정치적 실책이 맞다.[6] 이런 면에서는 외교적으로 뛰어났던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와 대비된다.[7] 기록에 따라서는 피로스가 판 덫이라고도 한다.[8] 애꾸눈 가이우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뇌물로 점철된 공화국 시절에도 청렴함으로 유명했다.[9] 처음부터 피로스가 제안했던 협상 내용이 로마에게 비교적 가혹한 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불가침을 준수하고, 그 중간지대에 잇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독립시킬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는 로마에게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뜻이었다.[10] 단,판본에 따라선 협상 내용이 다르다.로마에게 가혹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렇게까지 가혹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1]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형이라고 했다.[12] 이와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일화는 피로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현대의 이름없는 유럽인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플루타크 영웅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피로스 일화다.[13] 현대판으로 각색된 버전도 있다. 하버드 MBA가 느긋하게 낚시하고 일찍 집에 가는 시골 어부에게 매일 한시간씩만 더 고기를 낚아도 그 잉여분으로 투자를 해서 회사를 설립하고 번창시켜 좋은 값에 넘길 수 있다고 하자 평생 그 고생해서 뭐할거냐고 어부가 물어서 부자가 됐으니 여유롭게 낚시나 즐기고 저녁이면 가족들과 식사하고 친구들과 술한잔 하며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어부가 난 이미 지금 그러고 있다며 웃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