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트 132

 

1. 개요
2. 해외 생산
2.1. 아시아 피아트 132
2.2. 기타 시장
3. 둘러보기


1. 개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사 피아트에서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생산한 후륜구동 중형 세단으로, 피아트 125의 후속으로 출시되었다.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한 세단이다. 뒷문짝에서 1세대 5시리즈, 알파로메오 알페타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모두 간디니가 디자인했다.
후속 모델은 1981년 출시된 피아트 아르젠타. 이름이 바뀌었지만, 사실상 페이스리프트 버전이다.

2. 해외 생산



2.1. 아시아 피아트 132


[image]
'''차량 제원'''
엔진
직렬 4기통 2.0리터 DOHC 가솔린[1]
배기량(cc)
1,995
최고출력(ps/rpm)
112/5,600
최대토크(kg*m/rpm)
16.1/3,000
구동형식
FR
전장(mm)
4,390
전폭(mm)
1,640
전고(mm)
1,435
축거(mm)
2,557
윤거(전, mm)
1,321
윤거(후, mm)
1,327
승차정원
5명
아시아자동차에서 면허 생산하고 기아산업에서 판매한 후륜구동 중형 승용차.[2]
소형차 시장에서 브리사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기아(기업)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후 중형차 시장에도 눈을 돌려 아시아자동차 기술제휴선 피아트의 최고급 중형 세단 132를 들여왔다. 대한민국에서는 1979년 4월부터 시판되었다.
새로운 감각인 플라스틱 범퍼와 알루미늄 휠 등 중후함이 돋보였고, 파워 스티어링을 적용하여 운전에 편리성을 높였다. 2,000cc DOHC 8밸브 가솔린 엔진은 최고출력 112마력, 최고시속 171km를 자랑했다. 대한민국 생산차 중 최초로 도입한 DOHC 엔진이었으며, 상당히 우수한 성능으로 고속도로의 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 4기통 엔진을 쓴 차량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성능에 걸맞게 새한 레코드 로얄(1,900cc)이나 현대 코티나 마크 IV(1,600cc)보다는 비쌌다. 같은 배기량인 그라나다보다 가격이 낮았지만 차체는 로얄보다 작았고, 마크 IV 수준이다 보니 대세는 적당한 가격과 큰 차체, 넓은 실내공간의 레코드 로얄이라던가, 마크 IV에 기울고 있었고, 성능이 좋았음에도 차체가 작고 비싸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더군다나 132는 장관급 관용차가 4기통으로 제한된 와중에도 이미 레코드 로얄이 대량으로 주문되는 바람에 채택되지 못했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에 따라 강제로 생산 종료된 1981년 10월까지 4,759대가 생산되었으며, 앞두고도 받으려는 대기자가 몰렸다고 한다. 하지만 당초에는 피아트와 면허 계약에서 명시되었던 것(엔진과 차체 철판을 제외한 국산화율이 40% 미만)보다 국산화율(20%를 넘긴 60.8%에 달하였다)이 높아지는 바람에 피아트 본사에서는 품질 관리로 피아트 로고 사용을 불허했으나, 라이선스 생산을 했음에도 피아트에서 대한민국 생산분을 테스트한 결과 이탈리아 생산분과 아무 차이가 없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허용했다고 한다.#[3] 대신 품질 검사를 워낙 까탈스럽게 해서, 1일 생산 댓수가 20에 불과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끝난 후 기아산업은 132가 단종되고 6년 후인 1987년에 중형 시장에 복귀했는데 그 차가 바로 콩코드다. 다만 콩코드마쓰다 카펠라 GC형을 들여온 전륜구동 차량이다. 그리고 기아(기업)후륜구동 중형 세단은 132 이후 오랫동안 나오지 않다가, 무려 36년 만인 2017년 5월, 스팅어가 대를 잇는다. 스팅어 역시도 고성능 모델이다. 40년 전에는 외국 모델인 132를 면허 생산했다면, 스팅어는 외국으로 꽤 수출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팅어는 패스트백형이라는 것.
세월이 하도 많이 흐른 탓에, 현재 번호판이 말소되지 않아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차는 5대 미만이라고 한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의 차량으로 등장했으며, 윤서인이 어렸을 때 자기 집 승용차였다고 이야기했다.

2.2. 기타 시장



3. 둘러보기





[1] 다만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4밸브 DOHC가 아닌 2밸브 DOHC이다. 더욱이 기아산업에서도 이 특징을 거의 홍보하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피아트 132가 DOHC 엔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2] 피아트 차량은 1970년대 초반에 생산한 피아트 124 이래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했다. 1976년 기아산업로 인수된 이후에도 아시아자동차에서 132를 포함하여 계속 생산했다. 참고로 124, 132 모두 피아트 뱃지를 달았으며 어디에도 기이(기업아시아자동차 로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 이후에 수입된 머큐리 세이블과의 차이점.[3] 스페인 생산분은 "Siat"로 로고를 달았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당시 기아 관계자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SIAT가 아니라 SEAT'''이다. 세아트는 본래 피아트를 면허 생산한 회사이므로 자체 로고를 달았던 것 뿐이며, 세아트 로고를 은근슬쩍 품질 문제와 관련짓기도 하나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132를 들여오기 전에 아시아자동차에서 피아트 124를 들여와서 피아트 로고를 잘만 붙여서 팔았던 일도 있다. 다만 이쪽은 132보다 국산화율이 낮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후 한국 조립 기술이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퇴보했을 리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품질 문제로 피아트 로고를 다느니 마느니 했다는 얘기는 믿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국산화율 운운하지만 실제로 피아트 132의 국산화율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엔진과 서스펜션 부품, 바디 패널 등 중요 부분을 다 수입해서 만들었다. 애초에 정말로 국산화율이 그처럼 문제될 정도로 높았으면 이 차의 가격이 경쟁이 안 될 정도로 높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 부품을 다 수입하니 가격이 높았던 것이다. 피아트 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옛날엔 기아에서 다소 과장된 광고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많다. (그리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여전히 옛날 기아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므로 잘 가려 듣도록 하자.) 마쓰다 봉고를 들여오면서 가봉 공화국 봉고 대통령 방한과 무리하게 연결지어서 대대적으로 광고했던 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