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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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어: 𐡕𐡃𐡌𐡅𐡓 (Tadmor)
아람어: ܬܕܡܘܪܬܐ (Tedmurtā)
고대 그리스어: Παλμύρα (Palmýra)
아랍어: تَدْمُر (Tadmur)
라틴어: Palmyra
1. 개요
시리아 홈스 주에 위치한 고대 오아시스 도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14㎞ 떨어진 시리아 사막에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에 위치한 중계도시 중 하나였는데, 20세기 초엽 이곳에서 발견된 한금(漢錦, 한나라의 비단)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실크로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팔미라는 북쪽으로는 산맥을 등지고 동쪽과 남쪽은 사막이 펼쳐진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대 팔미라어/현재 아랍어의 지명은 각각 '타드모르'와 '타드무르'[5] 로 와디와 오아시스 덕분에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면 신석기 시대부터 군락을 이루며 산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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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실질적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 시대로서 이미 아시리아 때부터 지중해 쪽으로 나가기 위한 무역의 중계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에마르에서 발견된 점토에서도 '두 명의 타드모르인을 증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과 아시리아의 왕 티그라트- 필레세르1세가 '타드모르의 아람인을 복속시켰다'라는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현지인들의 무역 거래장에 불과했던 팔미라는 헬레니즘 제국 시절인 기원전 217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역시 이 도시의 지리적 이점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팔미라 유적지인 벨 신전, '무덤의 계곡'에 건설된 묘탑 등이 건설된 것도 이 시기의 일... 건축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시리아의 토착적인 문화와 그리스 문화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62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병합하면서 시리아 속주를 만들었지만, 팔미라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여전히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지역으로서 남게 되었다. 기원전 41년 두 세력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팔미라에 대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이 도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있던 시민들은 '''전 재산을 싸들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한 것은 아무것도 안 남은 텅 빈 도시뿐이었고 결국 빈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서기 1세기 티베리우스 대에 이르러서야 시리아 속주의 도시로서 로마 제국에 편입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로마의 영향력은 적었지만 파르티아와 친선을 맺으려던 게르마니쿠스가 이 지역 인사를 사절단으로 보내고 로마의 제10프레텐시스 군단이 들어오고 세금 징수원들이 거주하게 되는 등 차츰 로마의 도시로 바뀌게 된다. 로마의 지배로 인해 이 지역은 점점 안정되면서 일대의 무역을 지배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의 페트라 정복 이후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무역 루트가 전부 팔미라 쪽으로 바뀌게 되면서 급성장을 하게 된다.
서기 129년에 로마 제국의 전역을 돌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하드리아네 팔미라'로 불리며 자유도시로 선포되었으며, 이때 그리스 문화들이 대거 확산되었다. 카라칼라에 이르러서는 식민시로 또다시 승격하게 된다. 이는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상들을 습격하는 비적들의 증가에 따라 팔미라가 자체적으로 군대를 키우기 시작함으로써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담당하는 일부로서 그 중요도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혼란과 사산 왕조의 증흥으로 팔미라의 무역로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붙잡은 기세를 몰아 팔미라까지 공격했지만 당시 팔미라의 지배자였던 오데나투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으며 결국 샤푸르는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황제 갈리에누스를 지지하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동방 속주의 방위까지 담당하게 된다.
샤푸르 1세를 격퇴한 오데나투스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 '동방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얻고 스스로 팔미라 왕에 오른다. 그러던 와중 262년 아나톨리아 원정이 끝난 후 오데나투스는 그의 첫째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하이란 1세에게 암살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제노비아가 아들 바발라투스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으로서 팔미라를 통치하게 된다.
3. 팔미라 제국
4. 팔미라 주요 유적
- 벨 신전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복원되었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신전의 입구는 무사하게 남아 있는 것을 BBC의 드론 사진을 통해 확인되었다. 팔미라를 탈환한 시리아 정부군이 신전 주변에 계속 머물고 있으며 바알샤민 신전과 같이 남아 있는 잔해로 재복원에 들어갈 예정.
- 개선문과 대열주 거리
- 극장
- 바알 샤민 신전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에 유네스코는 이를 전쟁범죄로 규정, 그리고 재복원을 위해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주체가 된 디지털 고고학팀이 파괴 상황과 잔해 탐색을 위해 약 5,000대의 3D 카메라를 현장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며 팔미라를 탈환한 현장에 남은 파편들을 중심으로 재복원 작업에 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복원됐다.
- 시르쿠 요새 (시타델)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13세기 요새이다.
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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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찍은 사진
팔미라는 이후 이슬람 시대에 작은 도시가 건설되었으나, 이 역시 1089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고대 도시 팔미라 자체는 이미 유적이 됐지만 유적지와 관련된 관광업 외에 위치적으로도 시리아 중앙에 위치한지라 이라크에서부터 송유관이 지나가며 근처에서 천연가스가 나며 아직도 오아시스를 통한 농업이 가능하는 등 현재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기에, 유적으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옛 지명인 '타드모르' 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유지하고 있다. 매년 팔미라의 세게문화유산 지정 기념 축제가 열리며, 2004년에는 약 5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시리아 각 지역과 다른 주변 나라의 난민이 대거 이 도시로 들어오면서 2015년 5월 기준으로 인구가 14만명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5.1. IS의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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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팔미라의 상징이던 열주가 기둥 몇개만을 남긴 채로 사라졌다.
팔미라의 유적지는 2015년 5월 IS가 점령하여 조직적인 파괴를 일삼고 있다. 2015년 9월 2일 2,000년이 넘은 팔미라의 고대 신전을 IS가 파괴한 것이 위성사진으로 확인되었다.[6] 이에 많은 고고학자들은 시리아 내전이 종식되어 안정을 되찾을 때를 대비하고자 팔미라의 유적을 3D로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2016년 3월 타이거 대령[7] 이 이끄는 시리아군이 진격, 2016년 3월 27일 시리아 정부군이 1년 만에 팔미라를 완전히 탈환했다.관련기사 예상대로 유적지 일부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구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드론으로 촬영한 팔미라 유적 상공
그러나 현지 시각 2016년 12월 10일 IS가 팔미라로 재진입했다.관련 기사 정부군이 IS에 밀려 퇴각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팔미라가 다시 파괴될 가능성에 직면했다. 2017년 3월 정부군이 팔미라에 재진입했다.#
[1]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그리스어, 라틴어의 팔미라(Palmyra)와 아랍어와 팔미라어의 '타드모르(Tadmor)' 모두 '종려나무의 도시'라는 의미.[6]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9/01/0200000000AKR20150901227000081.HTML [7] 현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