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근
韓聖根
1833~1905
1. 소개
조선 후기의 장군.
2. 생애
1833년 김포에서 태어났고 순무영 초관에서 지홍관과 함께 문수산성 수성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프랑스군 120명이 문수산성에 가까이 접근한 순간 프랑스군에게 집중 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은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한다.
이후 조정에서 공을 치하해 병조좌랑과 중추부첨지사에 임명했고 별기군의 정령관에 임명돼 신식 군대를 훈련했다.
그러던 도중 흥선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 옹립 사건에 휘말렸으나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1896년 중추원의관을 지냈고 1899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다가 1905년 사망해 충청북도 괴산에 묻혔다.
3. 여담
병인양요에서 활약한 양헌수 장군이나 신미양요에서 대패했으나 끈질기게 전투를 수행해 조선군의 기백을 보여준 어재연 장군에게 밀려 인지도가 낮다. 이유는 나라에서 안 밀어준 탓도 있기도 하고 두 장군은 스토리도 많은데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러 정족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과 도서를 지킨 양헌수 장군과 미군에게 대패했으나 자신의 동생과 함께 참전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어재연 장군보다 밀린 것이다.
나라에서는 두 장군을 기려 승전비를 세워주거나 추모비를 세워 후대에게 내용이 자세하게 전달됐고 두 장군의 격전지인 정족산성과 광성보는 잘 보존되거나 사진 기록이 남아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을 잘 보여줘 두 장군은 인지도가 있다. 한성근 장군의 격전지인 문수산성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성도 많이 훼손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성의 일부가 군부대에 있어 민간인이 접근하기 어렵다.
지금도 대우가 안습한데 양헌수 장군의 경우 장군이 쓴 일기는 사적이 되거나 양헌수 장군의 물건이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어재연 장군의 경우 국방부에서 호국의 인물로 선정되고 나라에서 추모비를 세워주거나 장군기를 반환받아 박물관 중앙에 전시하고 격전지였던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교과서에서도 두 장군의 이야기만을 서술하고 두 분의 초상화까지 그려 추모하지만 한성근 장군의 경우 그런 것도 없이 잊혀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성근 장군의 무덤이 있는 괴산군이 한성근 장군의 행적을 추적 기록물이나 유물을 홍보해주고 있고 한성근 장군의 고향인 김포시는 격전지인 문수산성을 복원하기 시작해 개선의 여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