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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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 휘하의 관민이 합심해서 배에 불을 질러 격침시킨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미국 정부가 자국민을 참살한 것에 대한 항의와 제국주의 시절 횡행하던 강제 개항을 시킬 의도로 1871년에 '''미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2. 전개
미국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흑선 사건을 통해 포함외교(gunship diplomacy)로 재미를 좀 봤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개항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판단에는 조선군의 전투력이 별볼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도 한몫했는데, 맞는 사실이었으나 순순히 문을 연 일본과는 달리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원정군을 이끄는 로저스 제독이 당황하기도 했다.
배 구경만 시켜줬을 뿐인데 알아서 오픈한 일본의 선례도 있으니 행동 개시 전에 한번 찔러볼 요량으로 신미양요 발발 직전인 1871년 2월 21일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공동 조사와 통상 요구를 제안한다.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미국 사신이 보낸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순전히 병인년(1866)에 그 나라의 상선(商船) 두 척(隻)이 우리 나라의 경내에 들어왔다가 한 척은 풍랑을 만났다 구원되었으나 한 척은 사람도 죽고 화물도 없어졌는데, 이처럼 서로 판이하게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피해를 당한 까닭을 알 수 없으니 그 원인을 알고 싶으며, 뒷날 그 나라의 상선이 혹시 우리 나라 영해에서 조난당할 경우 원칙에 입각하여 구해주고 화목하게 서로 대우하자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요약하면 "국적선 조난 문제면 구호해서 해당 국가로 보낼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 교역 문제는 만들어낼 물건도 없고 팔 물건도 그렇게 넉넉지도 않고 그나마 우리 쓸 것도 많지 않으니 장사 안 한다."는 입장으로, 단박에 통상 제안 거부를 때린 것.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조난당하여 와서 정박하는 다른 나라의 여객선의 경우에는 혹 양식을 원조하고 필수품을 대준 뒤에 순풍을 기다려 돌려보내기도 하고, 혹 배가 파손되어 완전치 못하면 육로로 호송하여 각각 그들의 소원대로 해 주고 아울러 지장이 없게 해 주었습니다.
(중략)
이번에 온 편지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자고 희망하였는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로서 호의를 가지고 서로 관계를 맺자면 접대해서 보내는 도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의논해서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하는데 의논하여 판명할 것이 무슨 일이고 교섭하자는 것은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난당한 객선이 있으면 돌보아 주고, 호송해 보내는 문제는 의논하여 판명하지 않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혹시 호의를 품지 않고 와서 함부로 멸시하고 학대한다면 방어하고 소멸해버릴 것이니 미국 관리와 통역들은 그저 우리 백성들이나 통제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섭 여부에 대해서야 다시 더 논할 여지가 있습니까?
종전에 다른 나라들이 조선의 풍토와 물산을 알지 못하고 매번 통상 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교섭하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외국 장사치들도 이득을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이미 동치 5년의 공문에서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바닷가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나라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난하고 물산은 변변치 못하며 금은(金銀)·주옥(珠玉)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고 미속(米粟)과 포백(布帛)은 넉넉했던 적이 없으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국내의 소비도 감당할 수 없는데 만약 다시 다른 나라와 유통하여 나라 안을 고갈시킨다면 이 조그만한 강토는 틀림없이 위기에 빠져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라의 풍속이 검박하고 기술이 조잡하여 한 가지 물건도 다른 나라와 교역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절대로 교역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외국 장사치들이 이득 볼 것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통상할 의사를 가지는 것은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똑똑히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번 미국 사신의 편지에서 아직 문제를 끄집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관리들과 의논하여 판명하고 교섭하자고 요청한 것도 혹시 이러한 일들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난당한 객선은 전례에 따라 구호할 것이니 다시 번거롭게 의논할 필요가 없으며, 기타 문제도 따로 토의하여 판명할 것이 없으니 오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러한 내용으로 그 나라 사신을 잘 타일러서 의혹을 풀어줌으로써 각각 편안하고 무사하게 지내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미국은 조선의 답신에 별 반응이 없다가 1871년 4월 9일에 함대를 배치하고 재차 편지를 보냈다.
당시에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어전회의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영의정 김병학에게 "미리견(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병학은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 가운데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이라는 곳이 있어, 도시를 개척하고 터를 다졌으며, 바다 밖 양이들과 서로 통교하니"라면서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고종은 "그렇다면 오랑캐와 통교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7] '''단''', 여기서 나오는 '부락(部落)'이라는 단어[8] 는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으로 정말로 촌락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국역본이 아닌 원문과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락(部落)의 진짜 뜻을 알 수 있다.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서양 사람의 편지에서, ‘회답을 올립니다. 어제 영업선에서 편지를 받아보니,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여기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하였고, 「여기로 온 경위를 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 문제들을 우리 흠차대인(欽差大人)과 제독대인(提督大人)에게 편지로 알렸고, 회답을 해주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배는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즉 대미국(大美國)의 배이며 여기에 온 것은 우리 흠차대인이 조선의 높은 관리와 협상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아직도 날짜가 필요하므로 우리 배는 이 바다 한 지역에서 정박하고 있으면서 조약이 체결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겠습니다. 배에 머물러 있는 두 대인은 다 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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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거부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자 미국은 계속 개항 요구를 한 끝에 강제 개항을 염두에 두고 로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대를 편성했다. 프랑스에도 연합하자고 제의했으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당시 작성한 지도 정도만 넘겨주고 협력을 거부. 이리하여 5월 14일에 미 해군 단독으로 나가사키에서 출항했고, 5월 21일 수원 인근에서 조선 측에 포착된다. 조선은 5월 31일에 문정관을 파견해 이들의 접근 의도를 추궁했지만 미군은 딴청으로 일관하며 고위 관료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요구만 반복한다.[9] 조선 측은 협상을 하자면서 군대를 끌고 온 것은 무슨 도리이며 개항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이를 일축한다.
4. 전투 발발: 손돌목 포격 사건
첫 접촉이 허사로 끝난 이후 미합중국 해군의 함대가 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6월 1일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었다. 남북 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 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 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 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명,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 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던 데다가 조선군의 포가 워낙 낙후되었기 때문이다.[10]
한차례 교전을 벌인 미군은 대원군과 글을 주고 받는다.
“올봄에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귀국 사신의 편지를 전해왔기에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의논하고 회답 자문을 보낸 동시에 귀 대인에게 전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이 본래 이름난 나라로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귀 대인은 아마도 사리에 밝아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터인데, 이번에 어찌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남의 나라에 깊이 들어왔습니까? 설사 서로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지만 누구인들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요새지에 갑자기 외선(外船)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든 나라의 일반적 규범으로서 처지를 바꾸어놓고 보아도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귀선(貴船)이 바닷가 요새지를 거슬러 올라와서 피차간에 대포를 쏘며 서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미 호의로 대하자고 말하고서도 한바탕 이런 사달이 있게 되었으니 매우 개탄할 노릇입니다. 귀선이 오고부터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사달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타일렀습니다. 그렇지만 귀선이 다른 나라의 규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새지 어구까지 깊이 들어온 이상 변경을 방비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임무가 방어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북경 예부에서 우리의 회답 자문을 미처 전하지 못하여 귀 대인이 우리 나라의 제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까? 이제 회답 자문 부본을 보내니 한번 보게 되면 남김없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외국과 서로 교통(交通)하지 않는 것은 바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확고한 법으로서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귀국 사신이 협상하려고 하는 문제로 말하면 어떤 일이나 어떤 문제이거나를 막론하고 애초에 협상할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높은 관리와 서로 만날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넓은 천지에서 만방의 생명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다 제대로 자기의 생활을 이루어가니 동방이나 서양은 각기 자기의 정치를 잘하고 자기의 백성들을 안정시켜 화목하게 살아가며 서로 침략하고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해서 위로 하늘을 노하게 한다면 더없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귀 대인이 어찌 이 이치를 모르겠습니까?
풍파만리에 고생하였으리라 생각하면서 변변치 못한 물품으로 여행의 음식물로 쓰도록 도와주는 것은 주인의 예절이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아메리카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 찬리(贊理) 흠차(欽差)인 영어, 한어 문건을 맡아보는 총판두(總辦杜)는【이름은 덕수(德綏), 중국인이다.】 회답합니다. 며칠 전에 군주가 파견한 우리 나라 관리에게 보내온 공문과 대청(大淸) 나라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 부본에 대해 다 같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提憲)에게 전하였으며 명령을 받들어 이렇게 회답합니다. 당신들에게서 온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에 의하면 귀 조정이 우리나라 군주가 파견한 관리와 그가 와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가지고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매우 안타까워하는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공격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비호하면서 변경을 책임진 신하의 직책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헌은 원래 포를 쏜 행위는 군사와 백성들의 망동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귀 조정에서 이것을 알고 꼭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높은 관리를 파견하여 협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행동하지 않고 기일을 늦추어가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귀 조정에서 3일, 4일 내에 만나서 협상할 의사가 없이 기한이 되기만 기다린다면 전적으로 군주가 파견한 우리 제헌이 처리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대략 이와 같이 적습니다.
보내준 많은 진귀한 물건들을 받고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보내온 예물을 돌려보냅니다. 이와 같이 회답합니다.”
5. 처절한 저항: 광성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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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대원군의 주장에 포격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듭 고위 관리를 보내서 협상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원군은 당연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은 6월 10일에 상륙해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 이어 어재연이 지키던 광성보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미국의 전력 및 피해를 비교해 보면...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조선군의 경우 미 해군의 상륙작전 3일 전에야 가까스로 파견된 중앙군 3개 초(오늘날의 중대급)를 광성보에 집중 배치, 미군의 공격을 강화부에서 광성보로 유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조선군은 미군 상륙 당일 지방군 소병력을 초지진 야습에 투입해서 미군의 반격을 유도했고, 이후 해안도로를 따라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소규모 척후 병력을 수시로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광성보 쪽으로 돌리려는 두드러진 시도를 반복했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예하 3개 초가 모두 타 군영 소속[15] 이어서 제대로 된 전투 조직을 구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이들은 지휘관 어재연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 와 본 적이 아예 없어[16] 유리한 방어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말 그대로 눈뜬 장님 상태였다. 여기에 화력조차 열세인데다 화력 집중을 위한 훈련도감 기반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 19세기 후반 조선군의 현실이었던 탓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광성보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선군은 조직적인 화망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그저 개별적으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무려 2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조선군 200여 명에게 집중 사격을 당했음에도, 총에 맞은 미군은 단 2명(해군 견습수병(Landsman)과 해병상병(Corporal) 제임스 도허티 포함 각 1명)[17] 뿐이었다. 나머지 미군 사상자는 모두 성벽 위에 기어오른 뒤에야 발생했다. 3명의 미군 전사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휴 맥키 해군 대위(추서 계급, 전사 당시 중위)는 성채 안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조선군이 쏜 총에 가랑이 부위를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긴급히 후송되었지만 다음 날 오후 5시 45분에 USS Monocacy 함에서 사망했다.[18] 맥키를 쏜 조선군은 곧 도착한 윈필드 쉴리 중령에 의해 사살됐다.
하지만 이런 참패의 와중에서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결사항전 했다. 패배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었고,[19] 거의 학살 수준에 달한 광성보 전투에서도 미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여도 끝까지 싸웠고 무기가 없는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서''' 저항했다. 함락 직후 생포한 패잔병들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바로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미군들을 노려보며 투신 자살하거나 아니면 미군의 총검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라는 투로 대던 조선군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피투성이 조선군을 고통없이 죽여주자던 미군도 있었을 지경.
일단 위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 비교를 보면 저게 정상적인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비율이 아니다. 공격 측에서 사람이란 사람은 다 죽일 각오로 하거나 방어 측에서 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 그전에 저 정도 전사비 자체가 웬만한 전력 차이로는 불가능한 비율이기도 하다.
지옥같은 남북 전쟁을 헤쳐나온 미군의 베테랑들도 독종같이 달라붙는데 질릴 대로 질린 모양. 구식이고 낙후되었긴 해도 400여 년간 임진왜란, 병자호란, 홍경래의 난 등의 굵직굵직한 전투를 벌이며 쌓아온 경험과 대원군 하에서 그럭저럭이나마 군사 기반을 갖추었던 중앙 집권 국가인 조선이기에 동양의 국가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경험이 없고, 그저 막연히 유색 인종이기에 오합지졸일 것이라거나 신비주의로만 생각했던 미국의 입장에서, 패배하긴 했어도 무서울 정도로 처절했던 조선군의 항쟁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전투 개시 전, 조선군의 군가를 들은 한 미군 수병은 '''"무섭도록 구슬프고 장엄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전후 기록들도 대개 승리했다기보다는 '''"완전히 바르긴 했는데... 뭐야 이놈들 뭐하는 놈들이야..."''' 에 가깝다.[20]
그러나 군인들의 기강 문제와는 별개로 전략적인 측면에선 시작부터 실패한 일이기도 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수습해서 후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당시 조선군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투 중간에 지휘관 자리에 있는 어재연이 전사[21] 해 지도력의 부재가 있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의 상륙을 허용해 왕실과 직접 연결된 기관인 외규장각이 탈탈 털린 경험이 있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유연한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기도 했다.
애시당초 상술했듯, 조선군은 미군의 공격을 그나마 방어력이 강하고 방어가 용이한 광성보로 유도를 했으며 이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조선군이 전술적으로 무능하진 않았다. 문제는 결전장으로 선택한 광성보였다. 광성보 일대는 강화도 동해안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유독 동쪽으로 튀어나온 반도 지형이라 미군이 반도 입구를 봉쇄하면 퇴각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군도 스스로 결전장으로 선택한 만큼 이 문제는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철수한 병력이 광성보를 포위한 미군의 뒤를 치는 것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 역시 후방습격 가능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광성보로 향하는 길목의 대모산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후방 공격을 사전 차단했다. 장비의 질적차이는 논외로 하더라도 조선군에게 불운했던 점은, 미군이 남북전쟁 4년여를 겪은 베테랑들이어서 실전경험이 매우 충분했고 훈련도 또한 우수했다는 점이고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군은 광성보가 함락된 후에도 초지진 등지에서 첨사 이렴의 지휘 아래 야간 기습을 가했고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한다. 미군은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 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해버렸고 조정은 3일 후인 6월 14일에 그것을 확인한다.
미국은 마지막으로 사로잡은 포로들로 협상을 시도하나, 조선 조정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고 미국은 별 수 없이 이들을 그냥 석방해 버렸다. 이들을 찍은 사진이 미국에 남아있다. 포로로 잡혔던 그들은 미군이 주는 밥을 내던지며 일절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런 냉담한 말과는 달리 조선 조정은 정작 포로들이 귀환하자 치료와 구휼을 베푸는 등 잘 대해 주었다. 이로 보면 저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운운은 오늘날의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와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뻗대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미 해군이 철수한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광성보를 공격하느라 탄약의 반 정도를 소모했고, 식수도 부족했으며, 풍토병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로저스 제독은 미국으로 귀환 후에 대체 그 비싼 원정 비용 쓰고 얻은 게 뭐냐고 크게 질책당했다. 불안정한 일본은 신미양요와 같은 사건으로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을 고려해 '''개항을 진행하였지만''', 조선은 통치권이 아직 견고한 중앙집권 상태였기 때문. 미군은 철수하면서 조선군 시신을 일부 수습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장교진은 그대로 매장, 일부 조선 병사들은 화장했다. 이후 시신 수습을 위해 도착한 강화도 진무사 정기원은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병사들을 불로 태워 화형시켰다며 분노하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23]
6. 역사적 결과
6.1. 미국 측
미군 전사자는 불과 3명뿐이었지만, 전사자 수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최소한의 피해로, 단기간에, 조선을 개항시키려던 것'''이었기 때문.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이같은 목표에 충실하게 움직여, 무력 충돌 전후에 조선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군사적인 이득이나 피해와는 상관없이 결과는 조선의 개항 거부였다. 따라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 본격적으로 침략하거나,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거나. 물론 미군과 조선군의 질적 격차는 매우 컸지만, 당장 파견한 전함 5척과 병력 1000여 명은 한 국가 전체와 싸우기에는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침략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서 '''한반도를 포기한다'''.
6.2. 조선 측
전투 이후 대원군은 지지 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덤으로 기세를 몰아 서원 철폐도 단행했다.
미국이 물러가긴 했지만 조선군 전멸이라는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파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했고, 위정 척사파는 위정 척사파대로 흥선군의 개혁 정치 및 남인 등용으로는 양이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단기적으로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내적으로 쌓이는 반발과 불안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과 2년 뒤, 대원군은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한다. 집권한 고종은 개국, 개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지 불과 4년 뒤, 일본이 미국을 흉내내어 운요호를 보내자, 별다른 충돌 없이 개국해버렸다.
7. 뒷 이야기
애초에 미국이 조선에 하나도 모르고 와서 개항하라 땡깡이나 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백삼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미국 상인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조선 홍삼의 벽이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조선은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유례(類例)없던 경쟁자로서 마찰을 빚은 것이었다.
신미양요는 초기형 방탄복 면제배갑이 활용된 전투이기도 하다. 의외로 총검이 면제배갑을 잘 뚫지 못해 미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미군은 이걸 노획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현재 단 2개만 남았다. 하나는 육군사관학교 육군 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다른 하나는 한동안 미국에 있었다가 임대 형식으로 반환받았다. 다만 두껍고 무거웠기에 6월의 여름에 그것을 입은 병사들은 매우 힘들어하였고, 방염 처리를 하지 않았지만 소이탄이나 예광탄이 아닌 당시 총탄으로는 불이 붙기는 어렵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면제배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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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전투 후 미국인 사진사에 의해 촬영된 면제배갑을 입은 조선군 해당 사진의 출처
참고로, 이 당시 남북 전쟁을 겪었던 미 해군 베테랑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선군의 끈질김은 겨우 4년 후에 벌어진 운요호 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미군 해군의 군함도 아니고 무장 상선에 불과했고 숫자도 훨씬 적었는데 말이다. 이유는 군수품 문제. 그 당시 고종이 일대 군영의 주요 수입원이던 경강수세를 갑자기 혁파하여 몇 달씩이나 군수 지원이 끊겼다[24] .
다른 국가와 비교해보자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 때 에도 막부가 굴복하면서 전쟁은 피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선교사 살해를 명분으로 한 침공에 어설프게 전쟁을 벌였다가 '''국가적으로 망했다'''.[25] 미얀마 역시 19세기 중반 영국과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밖에도 무수한 나라들이 서구 열강들에게 비슷하게 밀렸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수자기는 2007년부터 '10년 대여' 조건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실물 군기 유물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조선 시대의 군기는 프랑스 성 루이 성당에 있는 깃발을 비롯해서 여러 개가 남아있다. '10년'이라는 기간 제한과 '대여'라는 표현에 피약탈국으로서 반감이 드는 건 어쩔수 없겠지만, 약탈 문화재의 세계에서는 10년 대여면 오히려 후한 조건이라 할 수 있으니, 달갑지 않으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군사 유물 보존 실태를 고려하면[26] 냉정하게 말해 저 깃발은 미군이 가져가서 잘 보존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우리는 수자기를 영영 그림으로나 봤을 것이다. 게다가 전시 교전으로 인해 얻은 정당한 전리품(민간에서 약탈한 물건이 아닌 병기나 군 피복, 서류 등 군사 및 정부 물품들)은 국제법상 따로 조약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상 상대국에 반납할 의무도 없다.[27]
8. 미디어
현대의 미국은 대한민국의 동맹국이다보니 그렇게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28] 한미 통상 조약 이후 보빙사 파견까지 밀도 있게 다룬 1980년대 사극 <풍운>에서도 그냥 내레이션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 1990년대 이후에 간간히 드러내기는 시작하는데, MBC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선 병인양요와 함께 다루고 있는데 조선군이 처절하게 처발렸음을 소름끼치게 잘 묘사했다. 극중 조선군들은 프랑스 및 미군 사격에 추풍낙엽 신세였다. 다만, 병인양요 편에서도 이랬다. 약간 고증이 틀린 것이 있지만 휴 맥키 중위는 창에 배를 찔려 전사했는데 이 드라마에서 화살을 배에 맞아 전사했으며 미군 총검에 맞아 전사한 어재연은 미군 총격에 전사하는 것으로 나왔다.
- 반대로 찬란한 여명에서는 수십의 미군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어재연 혼자 칼로 베어 죽인 미군만 여러 명이며 미군이 물러날 때도 수십 명의 시체가 쌓여있는 묘사가 있다. 이쯤 되면 판타지(...). 참고로 동 드라마에서 병인양요 묘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 이제마를 다룬 KBS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의 후반부에 이 사건이 묘사되는데 당시 반미열풍이 불던 시절이라[29] 미군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죽은 미군이 너무 많다. 막판 육반전에서 조선군 지휘관들이 칼로 베어죽인 미군과 조선군 졸병이 돌로 내려 찍어 죽이는 미군만 10명으로 전체 전사자 수를 가볍게 넘긴다. 작품 전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이때 스승을 잃은[30] 이제마는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그렸다.
-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18화에서 잠시 등장하는데 문제의 광성진 전투에서 미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 내용으로 나온다.
- 구한 말을 배경으로 한 수사 드라마인 별순검#s-2(시즌 3 10화 '금수산')에서는 이 신미양요 때 참전한 사냥꾼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교전 중 동료들은 모두 전사하고 혼자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심한 PTSD를 앓게 되고 산에 은둔하며 살다가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
-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대체 역사 소설인 만큼 여기에 해당하는 사건은 나오는데, 실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만 명에 달하는 미국 - 영국 - 프랑스 연합군이 강화도로, 3천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부 지방으로 침입하여 '양요'가 아닌 '양란' 수준인 대규모 전쟁으로 일어난다. 이때의 조선은 원 역사와 달리 무진경장을 통한 자체적인 근대화가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상태였던지라 군대도 신무기인 갑식보총과 1백근 야포등이 보급되고 훈련도 잘되있었던 정예병이었던 덕에[31] 이 4개국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버렸고 이 승리를 기반으로 원역사의 불평등 조약이 아닌 더 대등한 상태로 문호 개방을 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전쟁이 크게 확대된 만큼 조선 역시 강화도는 아주 박살나버렸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영종진 등 포대들이 역사대로, 아니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고,[32] 강화부성마저 떨어진다. 어재연 역시 역사대로 가지만, 정기원은 역사와 달리 죽는다. 다만 이것이 허사는 아니었던 것이 그만큼 연합군의 피해도 원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고[33] 이것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전쟁을 적극 주장했던 자유당 정권이 붕괴해버렸고 미국에서도 그랜트 대통령이 탄핵 직전까지 놓였으며 일본도 조선의 승리로 인한 충격으로 반란이 터져 치안이 개판으로 되는 등 조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제대로 피를 보는 등 세계사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