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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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熙錫
창씨명: 井垣熙錫
1909년[1] 11월 27일[2] ~ 1983년 9월 3일[3]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4] , 호는 청남(靑南).
2. 생애
1909년 충청남도 목천군 갈전면(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매성리[5] 에서 아버지 한관교(韓寬敎)와 어머니 회덕 황씨 황성흠(黃聖欽)의 딸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청남도 도립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대전제일공립보통학교(현 대전삼성초등학교) 훈도,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청양군 비봉공립보통학교 훈도 등으로 임명되어 근무했다.
1936년 훈도를 사직하고 독학으로 1937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1938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 속(屬)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193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관리양성소 강사를 겸임하였으며#,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경상남도 창녕군수,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동래군수#, 1943년 7월 평안남도 지방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지방국장,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공업국장, 내무부 차관(1953년 9월~1954년 2월)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회(현 안전행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1959년 9월까지 여당 몫의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9월 신 국가보안법 파동으로 국회부의장직을 사임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3.15 부정선거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63년 연말 석방되었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고위공무원 경력으로 인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