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슈타인 원칙

 

1. 개요
2. 역사
2.1. 유래
2.2. 동독의 대응
2.3. 한계 및 폐지
3. 여담
4. 유사 사례

Die Halstein-Doktrin

1. 개요


1955년 서독의 외무차관(Staatssekretär)이었던 발터 할슈타인의 이름을 딴 정책으로,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원칙하에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국가(서독과 이미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의 경우)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정책은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집권해 동방 정책(Ostpolitik)을 펼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 체결과 함께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2. 역사



2.1. 유래


1955년 9월 서독의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 및 전쟁포로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서독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외교적 행보가 필요한 것이었지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독일 내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면서 '''두 개의 독일 중 하나와만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주장해 온 서독 정부에게 동독과도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소련과의 수교는 모순적인 외교정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데나워 총리는 같은 해 9월 16일에는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그리고 같은 달 22일에는 의회 연설에서 서독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제3국이 동독과 공식적 외교관계를 맺을 경우,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문제는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는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제재가 수반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아데나워의 이러한 발표는 어떠한 구체적 대응 방안이 결여된 선언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었고, 그에 따른 세부적인 외교적 제재는 1955년 12월 8일에서 10일까지 본에서 열린 대사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회의에서 실무적 역할을 담당한 외무부 정치국장 그레베는 "동독 불승인 정책"으로 불리는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제3국에 대한 제재방안을 마련했다. 그에 따르면, 제3국이 동독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으려할 때 서독 측이 바로 단교를 선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사 소환과 더불어 외교 사절단 축소와 같은 기본적인 외교적 압박을 거친 후에도 변화가 없을 경우, 최종적인 수단으로써 단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적인 조치들에 관한 내용은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할슈타인조차 "동독 불승인 정책"의 외교적 단교만을 강조했다. 1957년 10월 서독의 다양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방에 가장 우호적이었던 제2세계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가 일방적으로 동독을 승인하자, 서독은 결국 유고슬라비아와의 단교를 선택했다. 물론 이 사건 당시에도 "할슈타인 독트린"이라는 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음 해 7월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자인 슈벨리엔은 "Bleibt Polen Offen?(폴란드(와의 관계)는 미해결인 채로 남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서독의 동독 불승인 정책을 "할슈타인-그레베 독트린"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 용어에서 당시 유럽경제공동체의 집행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유명했던 할슈타인의 이름만 남았다. "할슈타인 독트린"이란 말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서독의 외교노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독트린(원칙)이란 말 때문에 브란트 동방정책 이전 서독의 외교정책은 지나치게 반공주의적으로 묘사되어 버렸다.[1]

2.2. 동독의 대응


1950년대 당시, 체제 경쟁에서 밀리고 있던 동독은 현상 유지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만이 독일을 대표한다는 서독의 입장에는 크게 반발했지만 이러한 입장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할슈타인 원칙을 방해할 만한 뾰족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결하기 위해 보통 동독은 타국의 공산당을 활용하여 해당 국가와 경제 교류를 하는 방식으로 외교관계의 물꼬를 트려고 시도했다.[2] 그리고 이러한 교류에서 한단계 발전한 것이 '공식적으로는' 동독 정부와 독립된 상공회의소와 그 대표를 해당 국가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가 실질적으로 대사 혹은 영사 권한을 행하는 무역 대표자를 파견하는 것. 그리고 최종 발전단계가 '경제 업무'를 논하기 위해서 외교관들이 해당 국가를 파견시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서독은 최종 단계까지 진행됐을 경우에 해당 국가에 항의를 했고 이전의 단계까지는 묵인...

2.3. 한계 및 폐지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을 서방세계와 제3 세계 국가에서 효율적으로 고립시켰지만, 동시에 1960년 베를린 문제[3]처럼 서독의 외교적 행보에도 제약을 가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결국 독일 사회민주당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동구권 공산국가와 활발히 외교관계를 진행하는 동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할슈타인 원칙은 서독의 외교방침에서 폐기되고 만다. 기민당이 70년대 후반까지는 할슈타인 원칙을 당의 외교노선으로 유지했지만, 이미 이 시기에 접어들면 데탕트로 냉전이 어느 정도는 완화된 후였고 이미 한 번 맺은 외교관계를 돌리기도 불가능한 노릇이었으므로 후일 집권하는 헬무트 콜 총리 때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3. 여담


동독은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고,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았지만... 정작 중화민국과도 수교하지 않았다. 1955년에 중화민국이 독일과의 전쟁 상태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한 후에도 상호간에 민간 기구만 세우더니 결국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난 1972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따라서 독일과 중화민국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1941년 나치 독일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하면서 단교한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복구되지 못한 셈이 되었다.[4]
1956~1964년 올림픽에서 동독과 서독이 단일팀을 구성한 것도 이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동독은 개별 출전을 원하였으나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동독 올림픽 위원회를 승인해 주지 않아서 올림픽 참가를 포기하든지, 서독에 붙어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후 1968년 올림픽부터 동독과 서독은 개별 참가를 하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는 동독, 서독 모두 단일팀의 깃발과 노래를 사용하였으며 동독과 서독이 각자의 국기와 국가를 사용한 것은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부터였다.

4. 유사 사례


할슈타인 원칙과 비슷하게 대한민국 역시 냉전 초기에는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본래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쿠바같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친북적인 노선을 취하는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더더욱 강경한 할슈타인 원칙을 추구하고, 한때는 중화민국(대만)도 그랬다. 하나의 중국 참조.

[1] 신정훈,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교,통일정책(1955-1972). -'할슈타인 독트린'을 중심으로, 2013, 참조.[2] 서독도 다른 국가가 동독과 경제교류를 맺는 것까지 반대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3] 흐루쇼프가 미국에게 서베를린에서 군사력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통행권을 교섭하는 문제를 앞으로 소련이 아니라 동독과 협상하게 만들 것이라고 선포한데서 발생한 위기이다. 참으로 절묘한 것이, 서베를린에서 군사력을 철수시키면 당연히 동독과 소련이 서베를린을 병합할 것이었고, 그렇다고 통행권 교섭을 동독과 협상하자니 할슈타인 원칙에 떡하니 위배된다.[4] 위키백과와 본 나무위키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에서 서독과 중화민국이 1955년 수교해 1972년 단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1955년은 말 그대로 독중간 전쟁 상태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한 해일 뿐이고, 1972년은 서독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한 해인데 중화민국과의 단교도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후자 같은 경우는 의외로 흔한데 다른 나라들도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몇 년 있다가 중공과 수교한 경우가 몇 건 있지만 가장 최근의 감비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공과의 수교 연도가 중화민국과의 단교 연도이기도 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