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호(정치인)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1900년 12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립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범어사 산하 명정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동래 범어사 지방학림 3학년 학생으로서 동래장터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년여 옥고를 치렀다.
1926년 8월 문예잡지인 <평범(平凡)>을 창간했으며, 1928년 4월 신간회 동래지회 전형위원과 본부 대표위원, 정치문화부 총간사를 맡았다. 이후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대학 전문부 문화학과, 타이소대학 전문부 불교과 등에서 수학하였다. 이 시기 다이쇼대학 조선유학생 동창회 회장을 맡았고, 1930년 재일본 조선청년회 서무부 간사를 맡았다. 또한 1931년 3월 만당 도쿄지부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1932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며, 1932년 9월부터 1933년 5월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겸 학감을 지냈다. 1934년 7월 17일 경상남도 김해의 해은사 주지취임 인가를 받아 1937년 7월 임기만료로 물러날 때까지 주지를 맡았다.
1937년 2월 3일 본산지주회의에서 총본산 기초위원에 선출되었고, <불교>를 속간하여 신1집에서 신19집까지 편집인 겸 발행임을 맡았다. 그리고 <불교> 신19집에 '황실의 어번영을 축함'이라는 글을 실었다. 1939년 3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이사를 맡았고, 1940년 1월 중앙교무원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0년 7월 조선불교 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와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의 종정 사서를 겸했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9월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내선승려 합동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대동아전쟁과 일본의 사명'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3년 4월호 <불교>(신47집)에 '결전 제2년과 새로운 불교에 대한 구상'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고, 그해 11월 함경도 일대에서 학병 권유 강연을 했다. 1944년 11월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이 재단법인 조계학원으로 변경되자 이사를 맡았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 혜화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946년 1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혜화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동국대학교로 개명하고 1948년 11월까지 초대학장을 치렀다.
문시환의 경상남도지사 임명으로 치러진 1949년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부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12월 고등고시위원(종교학)에 위촉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7월에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납북되었고, 1952년 1월 30일에 평양에서 사망했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0년 3.1 운동에 가담한 행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지만, 2010년 친일 행적 사유로 서훈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