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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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시환은 1897년 8월 12일 경상남도 동래군 남면 밤대(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아버지 문정두(文禎斗)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동래면 복천동(현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주하였다.
1912년 공립동래보통학교(현 부산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동명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교사 김병규(金秉圭)의 가르침 아래 민족적 의분을 느끼고 3학년 때 무단가출을 하였으며, 그는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중국인무역상회 서기로 근무하며 비밀결사 화랑도(花郞徒)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으며, 안희제가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도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920년 4월 전진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중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에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내 제3비서부 위원이 되었다.#
1922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의 기자가 되었다. 1923년 1월부터 그해 5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가하여 노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안창호 계열의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고, 국민대표회의 후에는 보천교청년회 대표 강홍렬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김원봉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해 9월 귀국하던 중에 만주 안동현에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한편, 의열단은 그해 12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종로경찰서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파괴와 조선 총독 및 일본 천황 암살의 임무를 수행할 단원 11명을 선발하여 조선과 일본에 파견하였다. 문시환은 소위 '의열단 제3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불린 이 계획을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구여순·강홍렬·김정현(金禎顯)·오세덕·배치문 등과 같이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23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1924년 1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횡령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같은 해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직물상을 경영했다. 그러나 일제의 요시찰 대상자로 선정되어 1930년 4월 '후계공산당 사건'으로 오사카에서 검거되어 경성부로 호송되는 등 해방될 때까지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후 귀국하여 동래군 생활필수품상업조합 이사장, 부산직물소매상업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동래지부에 참여했다가 이탈한 바 있고, 미군정 하에서 경상남도 동래군수, 경상남도청 도훈국장 및 상공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6월에는 무소속구락부에 가담해 연락위원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에서는 국회 산업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여 근로자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는 의정활동을 했다. 또 국회 내에서 남북통일을 목표로 결성된 연우회(硏友會)가 그해 9월 이정회(以正會)로 개칭되자 기획부 전임위원에 위촉되었다.[4]
그해 10월 18일 초대 경상남도지사에 임명되면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1월까지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도지사로 재임하던 1949년 3월 경상남도 임시 비상사태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여수·순천 10.19 사건 작전 비용, 상해군경 및 이재민 구호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해 금 1만원을 내는 등 솔선수범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치안문제를 책임지라며 사퇴를 종용했고, 그해 8월과 9월 거창과 진주에서 각각 '8.23 사건' 및 '진주군청 습격사건' 등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결국 1949년 11월 14일 사임했다.
1950년 부산극장을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그해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지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당시에는 일본 유학 시절 닦은 영어 실력으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특별 고문이 되기도 했다. 1959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72년 제헌동지회 53명이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 동참했으며, 1973년 11월 11일 별세했다. 별세 후 자녀들은 장례식에 대한 허례 낭비를 생략하고 20만원을 인재양성에 써달라며 원불교 육영부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