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캐벗 로지
1. 개요
Henry Cabot Lodge Jr.
미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2. 생애
전형적인 보스턴 브라민 출신의 WASP 상류층이다. 로지의 할아버지는 매사추세츠 주의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헨리 캐벗 로지[1] 이며, 또 그는 연방당 소속의 메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캐벗을 6대조 외할아버지로 두고 있다. 보스턴 브라민답게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잠시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로지는 공화당 소속으로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메사추세츠 주의 주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이후 1937년에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1944년에 의원직을 사퇴했으며, 이는 2차대전에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선거에서 다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로지는 뜻밖에도 1952년 메사추세츠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는데, 해당 선거의 당선자가 바로 존 F. 케네디다.[2] 이 패배 때문에 그는 오늘날에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다만 기부 입학을 통해 하버드에 들어간 케네디와 달리, 로지는 자신의 학업능력으로 하버드에 입학한 우등생이었다. 게다가 해군으로 참전해 자신이 함장이었던 경비정을 격침당한 케네디와 달리, 로지는 육군 장교로서 우수한 전공을 세웠다.
또 로지의 패배는 보스턴 브라민의 정치적 영향력의 퇴조를 상징하는 사례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보스턴과 메사추세츠 주의 인구구성의 변화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국계 미국인들이 대거 모여살던 해당 지역에 공업화와 대도시화, 그리고 이에 따른 대량의 해외이민 유입으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과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비율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저학력 저소득의 노동자 계급들이었고, 따라서 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손손 연방당 - 휘그당 - 공화당이라는 우파 정당에 소속되어 정치활동을 하던 보스턴 브라민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퇴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3]
그럼에도 분구하고 해당 연도에 같이 치러진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로지는 공화당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고, 덕분에 미국의 주 유엔대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현직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당 선거에서도 로지는 케네디에게 밀려 닉슨과 함께 낙선하였다.
이쯤되면 로지는 케네디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지는 주 서독대사를 맡아달라는 케네디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케네디는 아일랜드계라 당시 WASP들이 중심을 이뤘던 미국의 주류 엘리트 사회에 철저히 외면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WASP 출신의 보수 성향 기술관료들과 온건파 공화당 정치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보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케네디의 제안을 수용한 로지는 아예 외교관으로 전업(?)하여, 훗날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고위 외교관으로 재직했다. 이후 그는 은퇴하여 1985년에 사망한다.
[1] 즉 이 문서에서 다루는 헨리 캐벗 로지는 정확히 말하자면 헨리 캐벗 로지 2세다.[2] 케네디의 외조부이자 보스턴의 지방 유력 정치인이기도 했던 존 피츠제럴드는 로지의 할아버지와 선거에서 대결해 패한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케네디가 2세 대결에서 외할아버지의 설욕을 해낸 셈.[3] 한국과 비교하자면, 경남권의 낙동강 벨트 권역에 공업화가 많이 이뤄져 이곳에 전라도 출신 노동자들의 비율이 급증하고, 이에 따라 민주당의 득표율이 급증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낙동강 벨트는 양 진영이 경합인 것과 달리, 미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게 일어나서 완전히 민주당의 텃밭이 되버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