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피닉스
1. 개요
1994년 현대그룹이 창단했던 실업 야구단으로 실업리그에는 1995년부터 참여했다. 처음에는 '''의욕적인 돈지랄'''로 특급 대졸 선수들을 긁어 모아 프로리그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프로팀급으로 꾸렸다. 그러나 현대그룹 해체 후 매각과 인수를 왔다갔다하며 KBO체제를 위기로 몬 '''현대 유니콘스와 더불어 현대그룹의 민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현대 피닉스는 창단 당시 이름이고, 창단 후에는 현대건설로 변경되었다. 당시 기사. 그래도 당시 야구팬들은 현대건설로 팀명이 변경돼도 현대 피닉스로 불렀다. 한편, 1995년 현대그룹의 태평양 돌핀스 인수 직전 팀명을 '현대 피닉스'로 하려고 했지만, 이후 팀명을 '유니콘스'로 확정하면서 '현대 피닉스'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1년만 사용한 이름이 돼버렸다.
2. 역사
2.1. 야구판 진입을 원했던 현대
현대그룹은 그 동안 올림픽 유치를 해서 프로스포츠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면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로스포츠에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당시 현대가 현대 호랑이와 현대 코끼리라는 명칭으로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에 참여했는데 야구에는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야구에 참여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체계가 갖추어지다 보니까 그냥 접었다. 그러나 정주영이 총수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3위로 낙선한 뒤로 이미지가 매우 악화되었는데, 이미지 개선용으로 뒤늦게 프로야구에 참여하려고 했다.[1]
그러나 당시 쌍방울을 끝으로 8구단 체제가 완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한 팀을 추가하는 것은 리그의 대칭성을 깰 수 있었다.[2] 이렇게 되면 3연전 기간 중 노는 팀이 생기고... 그 뿐만 아니라 당시 현대그룹의 라이벌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그룹과 LG그룹은 현대그룹의 야구단 창단을 반대했다. 당시 재계 랭킹을 보면 현대가 독보적인 1위였다. 재계 1위 기업이 프로야구에 참여하는 것이 기존 그룹들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특히 LG의 경우는 창단 시에 회장의 부재라는 이유로 참여 기회를 놓치고 MBC 청룡을 겨우 인수해서 1990년에 창단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가 참여하겠다는 것을 쉽게 손을 들어줄 의사가 없었다. KBO는 기본적으로 사무국이니 뭐니는 간판일 뿐이고 실제로는 대기업 구단주들의 카르텔 구조이기 때문에 유력 구단 몇개가 반대하면 외부 참여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의 야구계 진입에 대한 기존 회원사들의 반대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농구나 배구에서 보여주었듯 현대는 우승을 위해서라면 압도적인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기존 프로스포츠계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단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이미 다른 종목에서도 현대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던차에 이제는 야구판에서도 이 추태를 보게 생겼으니 당연히 야구계 진입을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9구단으로 창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현대는 판단, 마침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대비하느라 현금이 급했던 쌍방울과 교섭을 시도한다. 교섭 결과 쌍방울 레이더스를 400억원 선에 매각하기로 합의를 찾았으나, 쌍방울은 유니버시아드 선수촌 2개동을 지어줄 것을 추가로 요구했다. 이를 승낙할 시 인수 대금 규모가 800억원 정도가 되는데, 두 배나 뛰어버린 가격에 현대는 손을 떼고 만다.
쌍방울 인수를 포기한 현대는, 곧바로 아마야구계 점령을 시도한다. 마침 프로야구 출범 이후 실업야구는 존립을 위협받고 있었고, 이에 대한야구협회의 최인철 회장은 프로측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반응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선수 스카우트 문제를 놓고 아마-프로간의 갈등은 날카로워졌고, 결국 최인철 회장은 본래의 임기보다 3년이나 빠른 1994년 1월 17일에 사의를 표명한다. 이어 협회 집행부가 총사퇴하고, 수습대책위원회는 현대그룹에 도움을 요청한다. 현대는 이를 수락하여, 3월 7일에 당시 현대석유화학의 사장이었던 이현태 회장이 새 야구협회장으로 취임한다.
아마 야구를 접수한 현대그룹은, 곧이어 '''프로야구 제2리그'''를 창설을 염두에 두고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여 스타급 아마추어 선수들을 긁어모았다. 현대 피닉스는 KBO 산하 프로구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KBO의 지명권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고, 이 때문에 현대에서 제시하는 거액에 프로에 지명받았던 선수들이 프로 입단을 포기하고 실업야구단인 현대 피닉스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현대 피닉스에서 선수들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평균 2-3억원 수준. 특히 당시 대학 최대어였던 연세대의 에이스 문동환에게는 계약금 3억에 현대건설의 아파트 분양권을 합쳐 약 5억 이상의 대우를 해줬을 정도. 그때까지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은 1993년에 LG에 입단했던 이상훈의 1억 8천 8백만원[3] 이었고 당시 최고 연봉을 받고 있었던 선동열의 연봉이 1억원 근처였으니 당시 공룡재벌 현대의 돈지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 돌핀스가 매물로 나오자, 현대는 실현 가능성이 어려운 제2리그 창설 대신 기존 팀 인수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그래서 태평양을 1995년에 470억원에 인수하여 현대 유니콘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2.2. 현대 유니콘스 탄생 이후
피닉스 선수들은 널널한 실업야구 리그에서 1995-96년 '''만화같은 전승'''을 거두면서 우승이란 우승은 휩쓸지만, 선수들은 유니콘스가 생기자 더이상 피닉스 소속으로는 프로야구에 뛰어들 수 없음을 알고 각자 지명권을 가진 프로야구 입단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후 특급 선수들이 모두 프로로 가버린 후인 1995년부터 현대건설 야구단이라고 이름을 변경하고 진짜 실업팀처럼 유지되다가 현대건설 소속에서 현대전자 소속으로 변경되는 등 일렬의 과정을 거쳐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4]
그런데 이렇게 현대 피닉스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별로 말로가 좋지 못했다. 프로야구로 돌아올 때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원금+이자)를 물어야 했고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프로구단측이 도와주기는 했어도 이런 점에선 거의 이득이 없었다. 게다가 남들은 3-4년차가 되었을때 아마에서 구르다가 팀에 합류하다보니 손해본 3-4년치 인상분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손해에 가깝다.
더욱 큰 문제는 실력저하. 수준이 낮은 실업야구에서 대학야구팀과 전력이 비슷했던 실업팀들과 상대하다 보니 아마야구 시절에는 이름 날리던 선수들의 실력도 하향평준화되어 프로에선 소리없이 사라진 사람이 많다. 특히 타자의 경우가 심했는데 강혁이나 문희성 등이 대표적인 경우. 그래도 투수들은 조금 나았는데, 문동환이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했으나 역시 아마 시절의 기량과 비교했을 때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이 중평. 대전고 시절 초고교급 투수였던 안희봉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이미 투수로서의 가치는 사라진 뒤였고 대학에서 완전히 정착한 타자로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알루미늄 방망이를 쓰던 실업야구에서는 그런대로 통했지만...
이 때문에 아마야구 시절에 지명권이 유효해 프로 진출한 선수들 외에 현대 피닉스 활동 중 신인지명을 받고 프로에 진출한 경우는 김낙관 한 명 뿐이었다. 그나마도 '''지명팀이 현대 유니콘스였다.'''
2.3. 평가
현대 피닉스가 프로야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신인 선수들의 몸값을 엄청나게 높였다는 점이다.''' 물론 현대 피닉스 창단으로부터 수 년 후 박찬호의 성공에 자극받아 메이저 진출 열풍 때문에 그렇게 오른 면도 있다. 그리하여 1990년 중반에 프로야구에 입문한 선수들 중에는 실력에 비해 계약금은 엄청나게 먹는 먹튀들이 유난히 많았다.
더불어 그 전에는 은퇴 후가 안정적이라고 프로 지명을 받고도 실업팀에 입단하는 선수가 있었으나, 현대 피닉스 때문에 몸값이 오른 덕분에 실업팀에 가고자 하는 선수가 더 줄게 되었다. 안 그래도 명맥만 겨우 유지하던 실업리그의 소멸을 가속화하는데도 일조한 셈.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는 현대 피닉스가 보유했던 선수들에게 지불했던 계약금을 이용해 이 선수들이 프로로 가면서 구단에 물어야 했던 위약금을 받는 대신 해당 선수들이 가게 된 구단의 선수들을 받아오는 방식으로 전력을 강화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5][6] 여러모로 현대그룹으로 인해 당시 프로야구판의 질서는 크게 흔들렸고 이에 영향을 받은 삼성까지 함께 돈지랄에 뛰어들면서 2000년대 초반 프로야구판을 현대와 삼성이 지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흥미 저하로 관중도 함께 줄어든 것은 덤.
3. 유니폼
유니폼에 관한 사진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과거 신문에 등재된 사진들도 문동환이 등장하는 이 두 사진을 제외하면 찾기가 힘들 지경. 홈유니폼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에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이다.
4. 창단 멤버
(출처: 최형석님 블로그)
- 감독: 최한익(천안북일고 감독)
- 코치: 안병환(경남상고 감독)
- 인스트럭터[7] : 김봉연, 김시진
- 투수: 문동환(연세대)[8] , 안희봉(연세대), 김동호(계명대), 염규빈(홍익대), 조용범(경남대)
- 포수: 배종훈(계명대), 조태상(한양대)
- 내야수: 김재걸[9] (단국대), 최창수(경희대), 문희성(홍익대), 윤현필(건국대), 강필선(연세대), 장재명(연세대)
- 외야수: 조경환(고려대), 김낙관(동국대), 박은준(계명대), 윤제성(고려대)
5. 과거 소속 선수
[1] 막상 프로 원년에는 경기인천강원 연고로 오퍼가 있었다. 82년 말 나온 1982 KBO 연감의 프로야구 창설 과정에서 서술하기로는 '현대그룹에서는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이 88올림픽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창단을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경인 지역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들어오게 된다.[2] 2013 시즌부터 2년간 NC 다이노스의 1군 참가로 9구단 체제로 가기는 했으나 이 때는 기존 8구단 체제를 10구단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도기였기 때문에 현대그룹이 제9구단 창단을 추진했던 당시와는 다르다.[3] 당시 이상훈은 2억을 계약 조건으로 요구했으나 LG 구단에서 신인 연봉 1200만원을 합쳐 2억 계약이라고 내세우는 꼼수를 부렸다.[4] 현대 피닉스의 해체를 2002년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02년에 해체된 팀은 당시 대한야구협회장사(정몽윤 회장)였던 현대해상화재보험이다.[5] 요약하면, 1) 롯데 자이언츠는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와 현금 5억에 트레이드, 2) 롯데는 계약금으로 5억을 문동환에게 지급, 3) 문동환은 계약금 5억을 이용해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을 지불하여 계약을 해지.[6]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거부하고 계약금 4억3천만원(!)에 피닉스로 입단했다.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의 최상덕과 해태의 박재홍 1차지명권을 트레이드 하는 조건으로 피닉스를 떠나게 된다. KBO는 몇 년 뒤 선수 지명권의 트레이드를 금지하게 되었다.[7] 당시 프로 출신 선수는 아마야구 지도자를 할 수 없다는 조항 때문에 인스트럭터란 직함을 달았지, 실질적 코치 역할을 수행했다.[8] 이후 현대 유니콘스는 문동환의 아파트 분양권을 포함한 계약금의 위약금과 이자를 부담스러워했던 롯데 구단을 상대로 이 금액을 면해주는 대신 전준호를 받아오는 사실상의 현금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9] 현대 피닉스 입단 전 신인 지명에서 지명한 삼성과 계약하며 현대를 이탈, 이중계약 파동에 삼성과 현대가 법정공방을 벌여 결국 삼성에 입단했다. 계약금 2억 1천만원이라는, 당시 최고 계약금을 받으며 선수 몸값 폭등에 첫 장을 장식했다.[10] 원 지명팀 해태의 계약금에 불만을 품어 현대 피닉스와 계약했다. 이후 해태가 지니고 있던 박재홍의 1차지명권을 최상덕과 트레이드하는 형식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다.[11] LG 트윈스가 1차 지명권을 쥐고 있었으나 현대 피닉스, 다이에 호크스와 3중계약 파문을 일으킨 끝에 LG 입단 후 2년만에 현대 유니콘스로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