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라이벌 시리즈

 


'''재계 라이벌 시리즈'''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1. 소개
2. 역사
2.1. 시리즈의 시작
2.2. 치열했던 라이벌리
2.3. 사라진 시리즈
3. 여담
4. 역대 전적[1][2]
5. 역대 위닝 시리즈
6. 삼성과 현대를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7. 관련 문서


1. 소개


과거 KBO 리그에 존재했던 더비 매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하기 전까지 가장 유명한 더비 매치였다.
삼미-청보-태평양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으나, 1996년 당시 재계 서열 1위 현대그룹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재계의 영원한 라이벌 삼성과 현대의 맞대결이 프로야구에서 실현되었다.[3]

2. 역사



2.1. 시리즈의 시작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자면 재계순위 1위의 현대와 2위의 삼성은 그룹간의 라이벌 의식이 존재했고[4] 사업뿐 아니라 스포츠를 통한 대리전을 활용하기도 했었다. 1970년대 현대전자 농구단의 아성에 도전한 삼성전자 농구단[5]을 시작으로 1994년에 한국탁구 최고의 팀이었던 삼성생명 탁구단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대백화점 여자탁구단,[6] 1995년에는 프로축구 원년 팀인 울산 현대가 있던 축구판에 이운재, 박건하, 고종수, 이기형등 스타급 선수들을 앞세워 창단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같은 해에 현대 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이 있던 배구판에 김세진등 슈퍼스타들을 긁어 모아 출범한 삼성화재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연히 삼성 라이온즈가 원년부터 참여했던 KBO 리그에도 현대그룹은 눈독을 들였으며[7][8] 1990년대부터 야구단 창단 추진을 시작했다. 현대의 움직임에 야구인들과 각 구단들의 반대가 이어졌고 결국 현대그룹은 KBO 리그와는 독자적인 리그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현대 피닉스를 창단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고 1995년 태평양 돌핀스를 450억원이라는 거금으로 인수하며 야구판에서 삼성 그룹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2.2. 치열했던 라이벌리


모기업들의 경쟁만큼이나 정말 치열했다. 경기뿐 아니라 사소한것 하나까지 상대팀보다 낫거나, 최소한 동등해야 했을 정도. 당시 양팀의 라이벌과 관련된 일화을 몇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으로 선수단 이동에 버스 3대를 동원하자 삼성 라이온즈도 이에 질세라 선수단 버스를 2대에서 3대로 늘렸다.
  • 현대 유니콘스는 인수 첫해인 1996년 선수들에게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기면 당일에 보너스를 현금으로 모든 선수들에게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걸었고 당연히 이를 알게된 삼성도 맞불 작전을 놓게 되었다.
  • 1996시즌 종료후 삼성의 강기웅은 현대로 가는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은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강기웅이 현대의 수준 낮은 선수들과 뛰는걸 거절했다"라는 루머들을 언급하며 불을 지피기도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1996년은 현대가 인수창단 첫해에 바로 준우승까지 했던 해이며, 삼성 라이온즈는 창단 이래 최하위인 6위를 찍은 해라는 점... 그리고 이 6위라는 기록은 장장 20년을 버티다 2016년에 와서야 깨진다.
  •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해태 타이거즈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온 것도 이 두 팀이다. 어차피 죽어나가는 건 다른 기업, 그룹들이지 현대와 삼성에게는 남의 일이었던 것(...).
    • 1997년 현대그룹은 얼마를 들여도 좋으니 드림팀을 만들어라라는 지시를 구단측에 내렸고 구단은 이에 따라 쌍방울 레이더스에 선수 2명과 현금 4억을 내주고 박경완을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삼성은 이에 질세라 해태 타이거즈조계현을 현금 4억원에 데려왔다. 이후 현대는 이명수[9]를 데려 왔고, 이명수 영입 다음날에 삼성은 김형석정회열을 데려온다.
    • 1998년 현대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좌완투수 조규제박정현가내영, 6억원의 현금과 맞바꿔서 데려왔다. 그리고 그해 현대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에 빡친 삼성 수뇌부는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무조건 최상급 팀을 만들어라는 지시가 떨어지며 한화 이글스에서 노장진을 트레이드로 데려온후 곽채진, 황두성, 양준혁을 내주면서 현금 18억을 추가해 해태 타이거즈임창용을 영입, 또한 OB 베어스의 에이스 김상진을 현금 6억 5천을 주고 데려왔으며,이어 쌍방울 레이더스이계성, 양용모에 현금 20억까지 얹어준 뒤 김기태김현욱을 데려오기에 이른다.
    • 1999년 현대는 안병원에 현금 7억을 얹어주며 LG 트윈스로부터 임선동을 데려왔고, 삼성은 포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상훈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갑용을 데려오는 선택을 한다.
    • 1999시즌 종료후 삼성은 프랜차이즈 김상엽, 박충식을 보상선수로 내주는 선택을 하면서 FA 시장에서 김동수이강철을 데려왔으며, 현대는 심재학을 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 예정이던 마일영을 현금 5억원을 주고 데려왔다.[10]
이런 엄청난 돈지랄이 이어지자 리그의 전력 불균형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커졌고 야구계 안팎에서 두팀을 향한 쓴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재밌는건 이런 돈지랄 레이스에서 현대가 삼성 보다는 이득을 봤다는 것이다. 현대는 이명수,심재학,박종호,임선동,마일영을 잘 써먹었고 삼성에서 트레이드로 SK갔다가 방출당한 김동수가 현대에서 되살아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삼성은 이름값이나 돈에 비하면 다 먹튀가 되는 바람에 손해를 왕창 보았다. 그나마 건졌던 것은 임창용과 진갑용 정도였고, 나중에 기반이 흔들린 현대에서 박종호,박진만과 심정수를 빼왔지만 이들은 전만한 기량을 보여주진 못했다.
경기 또한 양팀이 치열했는데,
  • 1996년 6월 2일 숭의야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정명원이승엽에게 빈볼을 던지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이어졌고 이것이 패싸움으로 이어지는 추태가 벌어지기도 했다.[11] 정명원이 이승엽에게 빈볼을 놓은 사연…현대와 삼성, 두 재벌의 대리전 이 사건을 보고 받은 현대의 고위 관계자는 "그게 현대의 정신이다"라며 극찬했다는 카더라가 야구판에서 나왔다. 실제로 당시 벌금을 현대 구단에서 대납해줫고 금일봉도 받았다고 한다. 정명원 문서 참조.
  • 2002년과 2003년에는 양팀의 주포인 이승엽심정수의 홈런왕 경쟁이 치열했다. 홈런 레이스 결과는 각각 1개[12], 3개[13] 차이로 모두 이승엽의 승리로 끝났고, 시즌 MVP도 모두 이승엽이 차지했다. 2002 시즌에는 이승엽이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하면서 단독 홈런왕에 올랐고, 2003 시즌에는 두 선수가 모두 50홈런을 돌파하면서 오 사다하루의 한 시즌 최다홈런 아시아 신기록에 도전하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홈런 경쟁이 벌어졌다. 다만 세부 스탯에서는 양 선수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였고, 2003년의 경우 심정수가 OPS에서 이승엽을 크게 앞섰다.[14]
  • 두 팀이 라이벌로 있었던 기간 내내 줄곧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정작 포스트시즌 맞대결은 단 2번 밖에 없다. 그 중 한 번이 바로 9차전까지 치뤄진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 9차전 빗속의 조용준KBO 한국시리즈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오주원(당시 오재영)의 심판 헤드샷이라 카더라. 참고로 다른 한 번은 양대리그 시절인 2000년에 치뤄진 플레이오프로, 당시 드림리그 1위 현대가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를 거치고 올라온 삼성을 4-0으로 압살했다. 삼청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89년 당시 태평양 돌핀스와 삼성이 사상 최초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룬 바 있으며, 결과는 2-1로 태평양의 승리. 결국 포스트시즌만 놓고 보면 삼성은 현대를 이긴 적이 없다.

2.3. 사라진 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이후 막강한 왕조구축이 가능할 것이라는 많은 야구인들의 예상과 달리 현대는 2000년 모기업이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계열 분리를 겪은 데다, 야구단에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정몽헌 회장이 2003년 투신자살하면서 지원이 점차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2004시즌에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팀의, 기둥들을 FA로 삼성에 내주는 모습이 나타나며 재계 라이벌 이미지가 퇴색되었다. 당시 야구계와 야구팬들은 경악할 정도의 대 사건이었는데 돈이라면 밀리지 않았던 현대가 돈싸움에서 밀렸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

◎ 맞대결에서 유독 강한 현대

'재계 라이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어색해졌지만, 다른 배경을 빼고 맞대결의 경기내용만 놓고 보면, 두 팀은 여전히 라이벌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삼성 입장에서는 현대와의 만남이 악연일 것이다.

2007년 기사 중.

그러나 현대는 유독 삼성만 만나면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역대 전적중 삼성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 때는 단 3번, 특히나 현대의 몰락이 가속화되던 2004년 이후로 현대가 해체하기 전까지 한번도 상대전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지 못했다.[15] 그래서 올드 삼성팬들 중 삼성 상대로 우위를 찍고 날아다녔던 현대 유니콘스를 악마취급하고 아예 이 팀 자체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꽤 많다.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면서 KBO 리그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재계 라이벌전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3. 여담


  • 프로야구 매니저에도 현대와 삼성 선수들로 덱을 꾸리면 재계 라이벌이라는 이름의 팀컬러를 장착할수 있다.
  • KIA 타이거즈의 경우에 현대자동차그룹의 일원이기 때문에 넓게 보면 재계 라이벌 시리즈의 흔적은 남았다고 볼수 있다. 게다가 삼성 vs 해태-KIA 역시 상당한 라이벌 관계이다.[16] 심지어 LG 트윈스 역시 모기업의 자금력으로는 다른 기업들 저리가라 할 수 있는 데다 그 팀 역시도 한 때의 삼성처럼 현질을 엄청 한 적이 있어 2010년대 이후로는 삼성과 LG의 대결을 재계 라이벌 시리즈라 보는 시선도 있다.
  •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지금은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는 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포스트시즌 맞대결 경험이 있는 유이한 구단들이다.
  • K리그에서도 재계 라이벌은 존재하는데 바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전북 현대 모터스[17]/울산 현대[18]의 맞대결. 또한 공교롭게도 수원 "삼성"의 연고지인 수원시는 과거 "현대"의 임시"연고지"였다.[19]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울산 현대의 재계 라이벌 매치는 1996년 K리그 정규리그 결승전이 가장 유명하다. 1차전 수원 삼성의 외국인 공격수 데니스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일궈 내자 수원에서 열린 2차전에서 양팀간의 격렬한 난투가 벌어지며 수원 삼성에서 3명, 울산 현대에서 2명이 퇴장 당하기도했다. 삼성쪽에서 "야! 짐싸라!"라며 선수단 철수라는 강경 대응까지 내놓을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던 이날 경기는 울산 현대가 3:1로 승리를 거두며 최종 우승을 울산 현대가 가져갔다. 또한 전북의 매수 사건 이후, 수원과 전북의 라이벌전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2018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역사적인 경기가 펼쳐졌다.
  • KBL에서도 재계 라이벌을 찾을수 있다. 현대 계열사에서 떨어져 나온 전주 KCC 이지스[20]서울 삼성 썬더스간의 라이벌매치. 다만 KCC의 전신인 대전 현대 다이넷/걸리버스와 삼성 썬더스와의 라이벌매치보다는 흥행 열기가 떨어지는 편이다. 재계 라이벌 더비(농구) 참조. 현재 KBL에서 재계 라이벌은 보통 LG 세이커스와 삼성 썬더스를 가리킨다.
  • V-리그에서는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21]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가 재계 라이벌의 후신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여기는 로컬 더비인 충남 더비도 겸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클래식 더비(배구) 참조.

4. 역대 전적[22][23]


'''연도'''
[image]
[image]
'''상대전적'''
1996년
5승 13패
13승 5패
현대 유니콘스 우위
1997년
7승 1무 10패
10승 1무 7패
1998년
4승 14패
14승 4패
1999년
10승 8패
8승 10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0년
7승 1무 11패
11승 1무 7패
현대 유니콘스 우위
2001년
8승 11패
11승 8패
2002년
11승 1무 7패
7승 1무 11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3년
12승 7패
7승 12패
2004년
7승 2무 10패
10승 2무 7패
현대 유니콘스 우위
2005년
8승 1무 9패
9승 1무 8패
2006년
8승 10패
10승 8패
2007년
7승 12패
12승 7패
'''총 전적'''
'''94승 6무 122패'''
'''122승 6무 94패'''
'''현대 유니콘스 우위'''

5. 역대 위닝 시리즈



'''년도'''
[image]
[image]
'''상대전적'''
1996년
0번
6번
현대 유니콘스 우위
1997년
2번
3번
1998년
0번
6번
1999년
4번
2번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0년
2번
3번
현대 유니콘스 우위
2001년
2번
3번
2002년
3번
1번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3년
4번
2번
2004년
1번
4번
현대 유니콘스 우위
2005년
3번
2번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6년
3번
2번
2007년
1번
4번
현대 유니콘스 우위
'''총 전적'''
'''25번'''
'''38번'''
'''현대 유니콘스 우위'''


6. 삼성과 현대를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지도자로서 옮긴 경우는 ●표시.
현대의 경우는 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도 포함하며, 우리-서울-넥센-키움 히어로즈와는 별개의 구단으로 할 것.

7. 관련 문서



[1] 시범경기, 플레이오프 전적 제외.[2] 현대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1996년부터. 그 이전은 라이벌 매치라는 의미가 부여된 적이 없었기 때문.[3] 그 전에는 삼성과 LG가 나름 재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삼성과 현대의 자존심 대결에 비할 수 없었다.[4] 삼성전자와 후발주자 현대전자간의 라이벌 의식, 현대가 먼저 선점한 중공업(현대중공업), 자동차(현대자동차)시장에 삼성이 삼성자동차, 삼성중공업을 설립하며 뛰어든 것도 대표적인 예.[5] 일명 재계 라이벌 더비. 1980년대에는 현대를 대표하는 이충희와 삼성을 대표하는 김현준의 슛 대결로 유명하다.[6] 2003년에 해체되었다.[7] 현대그룹은 축구를 더 우선시 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야구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에는 한일은행 야구단과 제일은행 야구단을 합병해 현대건설 실업야구단을 만들 계획을 가지기도 했다. 제일은행쪽의 반발로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야구와 관련된 시도는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8] 다만 1982년 KBO 리그 출범 당시에는 현대그룹에게도 인천-경기-강원 지역을 연고로 프로팀 창단 제안이 갔지만 올림픽 유치 건에 집중해야 한다는 정주영 회장의 의사로 인해 거부한 바 있다. 그 덕에 해당 연고지는 비어버릴뻔 했지만 야빠였던 삼미그룹 회장이 막판에 극적으로 참여해서 탄생하게 된것이 바로 삼미 슈퍼스타즈.[9] 당시 OB 구단측에 현금을 주고 방출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김인식 당시 OB 감독도 구단 운영방침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10] 정확히는 쌍방울이 지명했던 마일영의 지명권을 5억을 주고 사왔다. 이 일 이후 신인 지명권 트레이드가 금지되었다.[11] 사실 이날 경기의 MVP는 훗날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이 되는 장정석이었지만 이 벤치 클리어링이 장정석의 결승 대타 만루홈런을 묻어버리면서(...) 장정석의 활약을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안습[12] 2002 시즌 이승엽 47홈런, 심정수 46홈런.[13] 2003 시즌 이승엽 56홈런, 심정수 53홈런.[14] 2003 시즌 OPS 심정수 1.198, 이승엽 1.127[15] 이 시기 삼성의 저승사자로 군림했던 선수가 바로 미키 캘러웨이다. 캘러웨이는 2005~2007년까지 현대에서 뛰면서 삼성전 '''8승 무패'''를 기록했다.[16] 이쪽은 88고속도로 씨리즈라는 이름의 라이벌 매치로 자리잡았다.[17] 현대자동차그룹이 모기업.[18] 현대중공업이 모기업.[19] 현대 유니콘스가 주장한 실 연고지는 서울특별시 였지만, 잠실 입성이 무효화 되면서 "임시"로 수원에 눌러 앉은 케이스이기 때문에 정식 연고지는 아니다. 정식 연고지가 없는 구단이었기에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을 떠난 2000년 부터 KBO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권이 박탈 되었으며, 현대도 수원을 연고지로 생각하지 않아서 수원시 일대 지역 마케팅에 소홀히 했다. 그 덕에 관중수는 바닥을 찍었고 K리그 관중 동원 최고의 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관중수와 비교되면서 야구의 암흑기때 KBO 리그를 놀리는 주 소재로 사용된 1순위 팀이었다.[20] 위에 설명했듯이 현대전자 농구단이 전신이다.[21] 전신이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22] 시범경기, 플레이오프 전적 제외.[23] 현대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1996년부터. 그 이전은 라이벌 매치라는 의미가 부여된 적이 없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