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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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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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기념 리매치 인터뷰에서.
1. 개요
前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 코치이자 前 극동대학교 홍보처장 겸 교수다.
'''KBO 리그 원년 홈런왕'''으로 해태의 초창기를 빛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 최초의 전국구 스타이다. 때문에 팀의 개국공신이자, 해태의 여러 스타 출신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가는 원로 대접을 받는다. 해태 출신 선수들의 기념 모임에서도 회장을 맡고 있다.
2. 유소년기
7남 4녀(11남매) 중 6번째로 출생, 어린 시절 몸이 아파서 학교를 몇 년 늦게 입학했다.[2]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타고난 운동신경[3] 과 부단한 노력으로 군산상고와 연세대 야구부의 붙박이 4번타자로 활동했다.
1976년 군 입대 이후 복무 기간 동안 육군 야구단에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제대하여 연세대로 복학해 활동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 비거리가 긴 홈런을 날리기로 유명했는데 공대 옆 운동장에서 친 홈런이 백양로를 가로질러 학생회관에 떨어진 일화도 있다고 한다.
3. 실업야구 시절
1979년부터 실업야구에 뛰어든 그는 스타급 신인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고, 이후 내내 실업야구의 거포이자 스타플레이어로 실업야구를 대표했다.[4] 그래서 1979년에 한국화장품 야구단으로 데뷔해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31세의 나이로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다.
당시 야구 선수들의 평균 은퇴 나이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프로에 뛰어들었는데, 해태에서의 활약은 한 마디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업야구 시절 대스타였던 덕분에 프로야구 출범때 모든 프로 선수들의 대표격이나 다름 없었고, 선수들의 연봉을 김봉연의 연봉계약 기준으로 맞출 정도였다. 이 당시 김봉연의 연봉은 2천 4백만원. 그 때문인지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 연봉 1위자리에 오른다.
4. 해태에서의 활약
프로야구 원년 해태 타선은 주로 (1번 김일권), 2번 차영화,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준환, 6번 김종모가 출전했는데, 선수의 대부분이 김씨라서 '''김씨왕조'''라고 불렸으며, 위의 김 씨들은 모두 일발 장타가 있었다. 당시 코칭스탭간의 불화와 모기업의 지원 부족, 그리고 총원 18명의 초미니 선수단 으로 해태는 4위에 그쳤지만, 해태의 3, 4, 5번은 공포의 클린업 트리오였다.[5]
김봉연은 초대 주장 겸 4번 타자로서 22개의 홈런으로 원년 홈런왕에 등극했다.[6] 홈런 수도 대단하지만, '''홈런 22개 치는 동안 삼진은 겨우 16개'''에 그쳤을 정도로 타석에서의 심리전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원년 홈런왕 레이스에서 1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부상당했고, 당시 백인천이 계속 이를 추격하자,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타를 자청, 홈런을 쳐냈다. 이때 절룩거리면서 베이스를 돈 것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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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시리즈 MVP 수상장면.
이듬해인 1983년에는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여행을 다녀오다 큰 교통사고를 입어서[7] 선수생활을 위협받는 부상을 입었다. 한 달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홈런레이스에 뛰어들지만, 아무래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후기리그는 대부분 출장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당시 전,후기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규정에 따라 해태가 이미 전기리그 우승을 하여 코시 진출을 확정했으니 후기리그의 성적은 한국 시리즈 진출에 영항을 주지 않았다. 이후 회복한 김봉연은 이를 만회하기라도 하듯이,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첫 우승에 기여하고, MVP를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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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통사고로 인해 코 밑부분을 무려 300바늘 이상을 꿰매게 되자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기른 운동선수가 생소하던 시절 그의 콧수염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상처가 아문 후부터 면도를 하게 되어 오랫동안 볼 수는 없었지만 콧수염은 김봉연을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8] 아이러니하게도 콧수염을 깎은 84시즌과 85시즌은 2할대 중반의 타율로 공갈포로 전락했다.[9]
1986년에는 이미 프로야구 시대의 홈런왕으로 위상을 굳혀가던 삼성의 이만수와 최초의 통산 100개 홈런 경쟁을 벌이지만, 최초 100호 홈런의 영광은 이만수가 차지했다. 대신 김봉연은 이 해에 프로리그에서의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회했다.[10] 이때의 나이가 35세다. 당시로 보면 평균 은퇴나이가 한창 지난시기 였다.
결국 이듬해인 1987년부터 시즌 홈런개수가 10개 미만으로 줄었고, 1988년에도 홈런 수가 10개를 못 넘겼다. 자신의 최대 강점인 홈런이 줄어들자, 198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김봉연이 회고하기를 자신의 홈런 타구는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니 체공시간이 길어서 관중들이 좋아했다고 한다.#[11] 그리고 학교-프로팀 후배인 김성한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배팅 케이지에서 연습을 더 하려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고 한다.
5. 은퇴 후
1989년부터 코칭스탭이 되었다. 그 후 1994년까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12] 코끼리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옮기면서 차기 감독 0순위로 거명되었다. 이 당시 2군 감독이었던지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프런트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13] 후배 김성한이 감독직을 맡으면서 감독직은 물 건너갔다. 1995년에는 SBS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으며, 1996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연수를 받았다. 2005년 경에는 MBC ESPN에서 프로야구 경기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나 교육자로 투신했고, 2001년부터 극동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하였다.
2020년 6월 20일에는 KIA 타이거즈의 올드 유니폼 데이를 맞아 1988년 한국시리즈 MVP 문희수와 함께 시구, 시타를 했다. 또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 홈런을 갱신한 나지완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구단으로부터 감사패와 특별 유니폼을 수여받았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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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선수 중에서 보기 드문 석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100개씩 영어단어를 외우고 잠자리에 든다고 하고, 대학교 시절에는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체육교사 자격증까지 땄다고 한다. 이 후 연세대 이우주 총장의 "석사과정도 밟으라"는 격려에 고무되어 석사 학위까지 따냈다고 한다. 특히 프로생활 중에도 경기가 없을땐 항상 수업에 참여했다. 이러한 학구열은 교사인 형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은퇴 이후에는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교수로 제 2의 삶을 살았다. 공부하는 야구선수이자 선수/지도자 생활 이후 제 2의 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사람으로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14]
- 학교 재학 중인 아마 시절 초기에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질투한 일부 선배들에게 심한 기합을 받고 운동을 방해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4번타자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 백넘버는 27번인데, 김봉연이 은퇴한 후 김봉연이 타격코치가 되어 키운 이호성이 27번을 썼다. 그런데 이호성의 흑역사 때문에 이 번호는...[15][16] 그래서 김봉연은 이호성 살인 사건 때 등번호를 물려줄 만큼 자기가 아끼던 후배가 그 지경이 된 걸 어이없고 속상하다고 표현했다.
- 김봉연이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타자가 아닌 투수로서였다. 군산상고 시절에는 에이스로 활악했고 연세대 1학년땐 추계리그에서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고려대 중심타자였던 허구연은 공이 아주 빠른데다 여기에 각이 큰 커브까지 있어서 치기 어려워서 투수를 계속 했다면 한국야구의 에이스가 됐을 것이라며 회고 했을 정도였다. 군산상고 시절 은사인 고 최관수 감독이 투수를 안 할땐 방망이도 좀 쳐봐라 라고 해서 타석에 나가니 곧 잘쳐 1학년 때 5번을 시작해서 2학년땐 4, 5번 왔다갔다 했고 3학년이 되어서 부동의 4번 타자가 되었다.연세대에 진학한 후에는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러닝훈련에 빠지며 타자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1975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뽑혀 필리핀을 상대로 한 이닝에 홈런 2개를 치는 등 홈런왕에 올랏고 1976년부터는 부동의 국가대표 4번 타자로 기용됐다. 실업야구 시절에는 3연속 홈런을 몇번 쳤고 홈런왕은 대학때부터 휩쓸었다.
- "아기공룡 둘리"에 '김몽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마운드에서부터 3시간이 걸려 날아오는 둘리의 초 슬로볼[17] 을 기다리다 지쳐 포수, 심판과 함께 졸다가 원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만다.
-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김성한 전 감독을 대신하여 KBS 광주방송국의 '베이스볼 매거진 야호'의 해설자로 발탁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김봉연 교수는 한 주간의 경기 촌평과 함께 타이거즈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데, 2013년 5월 6일에 있었던 직속후배 김상현의 트레이드 소식에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직속 후배였던 만큼 더 많은 기회를 KIA에서 부여받길 원했었다는 후문.
- 교직에 들어서면서 현장을 떠난 지 15년째이지만, 여전히 야구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인터뷰에 의하면 선동열의 후임 감독으로 다시 타이거즈 일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듯 했으나 김기태가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 2016년 2학기를 끝으로 극동대학교 교수에서 정년퇴임 하였다. 떠난 지 오래된 현장 대신, 학계 경력을 바탕으로 문제가 산적한 스포츠 행정이나 산업전략 등에 기여하면 어떨지 올드 팬들은 또 다른 변신을 기대하고 있다.
- 전주시 어느 아파트에 가면 친형이 경비원으로 재직 중이신데 친해지면 음료수 한 병과 싸인볼로 맞바꿀 수 있다고 한다.
- 속풀이쇼 동치미에 교수 자격으로 출연하였다.
- https://youtu.be/XS_Q4S7PV00 (2009년 MBC 인터뷰)
7. 연도별 주요 성적
[1] 원래 전주북중학교에 다녔는데 야구부가 해체되어 전학을 갔다고 한다 #[2] 그렇다 보니 73학번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 55년생인 김준환과 군산상고 동기생[3] 김재박과 함께 대학야구 도루 랭킹 1, 2위를 다퉜다고 한다.[4] 당시 실업리그는 거의 프로 리그처럼 운영되었으며, 한국 시리즈(당시 명칭으로는 코리안 시리즈)도 있었다.[5] 그 다음 83년에는 2번 김종윤과 그 해에 합류한 재일교포 포수 7번 김무종까지 더하면 9명 라인업 중 7명이 김씨. 거기다 선발투수가 김용남이 나오면 10명 중 8명이 김씨. 그 당시 KKK타선이라고도 불렸다.[6] 원년 1982년에는 각팀 경기 수가 80경기에 불과했으니, 거의 나흘에 한개 꼴로 홈런을 친 셈이다. 만약 팀당 경기 수가 100경기 이상이었다면, 더 많은 홈런도 칠 수 있었다는 의미.[7] 1983년 6월 28일(이 당시 올스타전은 6월 3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친구의 자가용을 함께 타고 여수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남해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를 운전하던 김봉연의 친구가 화물트럭을 추월해 앞서가려다 맞은편 차선에서 버스가 나타났고 그 버스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다가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고였다. 이 사고로 김봉연은 전남대병원에서 5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은 뒤 의식을 회복했지만 같은 차에 탔던 친구와 친구의 아들은 중상을 입었고 친구의 부인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이 때 김봉연은 부인과 자녀를 대동하고 여행을 떠났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다른 차를 타고 있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8] 김봉연 인생에서 콧수염을 기른 시절은 1983년 후반기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활약과 그 콧수염에서 나오는 강렬한 인상 덕택에 콧수염을 기른 김봉연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9] '탈모왕'이라는 별명을 이 때 얻게 되었다. 별로 달가운 별명은 아니다. 홈런을 노리고 온 힘을 모아 어퍼스윙을 해서 모자가 자주 벗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김응룡 감독이 '헬멧을 끈으로 묶고 나가라'고 했을 정도다. 결국 홈런을 포기한 '공심'(마음을 비우다) 타법을 선언하며 예전 기량을 되찾았다.[10] 1986년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프로통산 99개 홈런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87년 시즌의 첫 홈런이 100호 홈런이 되었다.[11] 공의 아래 부분을 때려 공을 띄우는 스킬을 익혔다.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홈런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비슷하다.[12] 등번호까지 물려주면서 공들여서 자신의 타석이였던 4번 타자로 키운 이호성은 김봉연이 이 시기에 키운 선수였다. (이호성은 1990년에 해태 입단)[13] 김봉연 본인은 인터뷰에서 구단주가 해태에서 기아로 바뀌면서 감독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밝혔다.[14] 스포츠 선수나 군인, 연예인 같은 직종은 그들만의 리그가 구축되어 있어서, 은퇴 후 사회에 진출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김봉연이 코치 시절 애제자로 키웠던 이호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15] 타이거즈의 27번은 강철민, 호세 리마를 거친 뒤 2009년부터 김상현이, 그리고 2013년에 신승현이 쓰고 있었다. 2013 시즌 종료 후 신승현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김태영이 물려받았다. 이호성부터 27번을 단 기아 선수들이 자살, 트레이드, 돌연사, 트레이드, 트레이드 등의 부침을 겪으면서 27번 잔혹사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김상현이 음란행위로 임의탈퇴되면서 저주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시즌에는 포수 이홍구가 달았으나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현재는 SK에서 트레이드 되어 온 이명기가 달고 있다. 이명기는 KIA 타이거즈 이적 후 맹활약 하다가, 현재 매우 부진하고 있다. 이명기 이후에 27번을 이어 받은 문선재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6] 김봉연이 타이거즈 레전드이기도 하고 안습해진 27번이 더 이상 안습해지지 않길 바라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팬들이 제법 있다.[17] 둘리는 김몽연의 팬이라는 설정이고, 바로 전 장면에서 둘리의 강속구에 야구장 벽이 뚫리는 것을 본 김몽연 선수가 원하는 대로(빠른 공 보다는 느린 공이 치기 편하지 라고 했다)초 슬로볼을 던진 것이다.